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0화
저도 모르게 긴장한 얼굴을 했다. 더 앞으로 갈까, 아니면 돌아가서 전력을 데려올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왁자지껄한 청년들이 들이닥쳤다.
“흠? 저기 누가 있는데? 쪼끄만 게…… 다람쥐인가?”
“너 이 녀석, 누가 봐도 다람쥐 크기가 아니잖아. 너는 눈이 아니라 뇌부터 고쳐야겠어.”
“아니, 그런데 꼬마 같은데, 누구지?”
“뭐? 아이라고? 황실 사유지에 아이라니 그것도 저렇게 사랑스럽, 잠깐만, 저 머리카락 색 어디서 본 것 같…….”
“폐하?!”
“아니 이놈 진짜 눈이랑 뇌가 어떻게 됐나…… 우리 폐하는 어른이시다! 심지어 너보다 키가 크다고!”
“너 지금 나 키 작다고 놀리는 거냐?”
“다들 입 다물어. 여기서도 싸우냐 너희들은.”
“저, 혹시, 황녀 전하십니까?”
청년들의 대화 내용에 나도 모르게 경계를 점점 내려놓았다. 대신 왠지 모르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딱히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왠지 모르게 직감적으로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눈에 익은 반듯한 검은색 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을 똑바로 본 기사들의 눈가에 경악이 서렸다.
“헉, 귀여…….”
“쉿.”
이상한 말이 나온 듯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
나는 그들의 제복을 훑었다.
‘역시 중앙기사단이었어.’
황제의 외부 일정 호위는 원래 중앙기사단이 책임진다. 따라서 그들이 숲에 미리 와서 지형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사냥일까지는 며칠 남은 상태였고, 대체적으로 안전 확보는 전날이나 당일 아침에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오늘 기사단이 이곳으로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흐음. 귀찮게 됐네.’
나는 왠지 모르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호위를 맡고 있는 이들에게 이미 내 외형이 알려졌을 것이 분명하고, 설사 모른다고 해도 황족에게 주어지는 인장을 황녀용으로 따로 만들어 두어 신분을 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 왜 이곳으로 홀로 왔는지를 먼저 설명해야 했고, 설사 설명한다고 해도 그들이 납득을 할지는 모른다.
‘오늘 숲으로 들어가기는 글렀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눈알을 데굴 굴렸다.
그리고 그때, 아까 전 내게 황녀 전하냐고 물은 기사가 자신들의 동료를 힐끔 보더니 이내 살짝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춘 뒤 입을 열었다.
“아, 저는 체인즈 필론입니다. 저희는 중앙기사단 소속, 켈리어드 대공 전하 휘하의 기사들입니다. 혹여 황녀 전하가 맞으십니까? 저희가 전하를 직접 뵌 적이 없어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비록 말투는 딱딱했으나 애초에 반듯하고 순한 인상 때문인지, 아니면 다정한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이 소속을 밝혔는데 내가 이리 가만히 있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에슈트 드 레비아체, 아르시제스다. 이건 내 인장이고.”
말과 함께 내민 인장을 확인한 기사들의 얼굴에 그야말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들의 눈에 나도 알 수 없는 감정이 각기 실렸다. 나는 그것을 그들이 안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어쨌든 사냥터의 치안을 책임지게 된 그들의 입장상 이렇게 낯선 이가 들어왔는데 막지 못했다는 것도 큰 실책이니까.
게다가 세베르의 성격상 이런 실책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볼 인간은 아니라서, 그들 입장에서는 황족과 황족의 허가를 받은 이들을 제외한 이가 들어온 상황이면 당연히 긴장해야 했다.
아마도 처벌을 면할 수 있어 기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신을 체인즈 필론이라고 소개한 갈색 머리의 청년 기사가 입을 뗐다.
“중앙기사단 제1분단, 황녀 전하께 예를 취하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까까지만 해도 수근거리던 기사들이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곧바로 자세를 취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아르시스의 미래에 영광과 무한한 축복을.”
곧 그들이 어깨와 심장 사이에 살짝 손을 얹고 고개와 허리를 조금 숙였다.
기사 중의 기사들만 선발했다는 말이 참인 듯, 그야말로 절도와 격식이 반듯하게 잡혀 있었다.
‘역시 세베르가 이끄는 기사단이라 그런 건가. 하긴, 그 성격에 기사들도 자기처럼 교육했겠지.’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돌아갈까? 그리 생각하는데, 아까 전 나를 보고 다람쥐니 폐하니 따위를 말하던 기사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한데 황녀 전하께서는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혹시 폐하도 이곳으로 행차하셨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기사들을 쭉 둘러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방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물러설 수는 없지.
“그냥, 궁금해서 왔어.”
“궁금하다니, 무엇을.”
“며칠 뒤에 여기서 사냥이 시작된다며?”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응. 그래서! 그래서 보러 왔어! 여기 동물들 엄청 엄청 많을 거 아니야.”
아, 내 인생아.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지.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면서 최대한 순진무구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나름 그럴싸하지 않을까.
분명 아이가 된 초기까지만 해도 파파로 불렀다고 오해하는 것도 질색을 한 것 같은데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지.
그러나 어쨌든 나는 지금 황녀였고, 예닐곱 살이었으며,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내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그렇게 보일 의무가 있었다.
나는 일부러 누가 봐도 기대된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한 톤 올려서 외쳤다.
“그래서 궁금해서 보러 왔어! 아빠의 레어에는 그런 동물이 없거든. 나 처음 봐, 그런 거.”
레르하겐의 레어에 동물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내가 모르면 이들도 모를 것이 뻔했고, 그런 의미에서 내 거짓말은 나름대로 그럴싸했다.
그러나 정작 내 말에 그렇군요, 라고 바로 납득할 것 같던 기사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는 혹시라도 내가 아이 노릇에 심취해서 뭔가를 그르친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왜 그렇게 봐? 내가 뭐 잘못했어?”
그에 불안한 얼굴을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갑자기 뒤편에 있던 청년 한 명이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하…… 역시, 내일 재스민에게 청혼해야겠어. 올해 안으로 결혼해서 딸을 낳을 거야.”
“얘가 또 재스민한테 처맞을 소리를.”
“둘 다 쉿.”
목소리는 작았으나 대화의 내용은 똑똑히 귀에 들려왔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뭐야, 내가 이상했던 게 아니었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어이가 사라지고 말았다.
겨우 그딴 이유 때문에 이렇게 분위기를 잡았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필론 경이 입을 열었다.
“동물 친구들을 보러 오셨습니까? 홀로?”
동물이 왜 내 친구야. 망할.
“응!”
그러나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나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었든 나에 대한 경계를 풀고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사이에 은은하게 오는 내 어른적 자아의 자괴감이 자꾸만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긋 웃었다.
“어마마마도 와도 된다고 하셨어! 그래서 온 거야, 혼자!”
“하지만 기사도 없이 이리 오시면, 그전에 어찌 오신 겁니까? 마차를 타고 오셨습니까?”
“워프로 왔어. 아빠가 도와줬는데?”
대체 어느 부모가 이렇게 위험하게 예닐곱 살짜리를 함부로 집밖에 나돌아 다니게 하겠느냐마는, 나는 이제 누가 들어도 좀 말이 안 되는 행위는 다 레르하겐에게 돌리기로 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기사들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재스민을 여자 친구로 둔 그 기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진짜로 홀로 오셨습니까? 시녀도 없이?”
“응. 워프로 왔어. 그냥 구경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안 돼? 내가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황녀 전하. 게다가 이 숲에 있는 동물 친구들은 다 너무 흉맹해서 황녀 전하를 잡아먹을 수 있…… 아니, 왜 찔러!”
“이 자식이 황녀 전하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닙니다. 황녀 전하, 동물 친구들은 절대 황녀 전하를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 친구들은 그냥 낯을 좀 가릴 뿐입니다.”
“아니 뭐가 낯을 가리는 수준이냐. 오전에 보니까 늑대도 풀어놓던데.”
“황녀 전하께 그렇게 겁을 주면 어떡해? 충격받으시면 어쩌려고!”
“헙.”
다 들었어. 충격 먹을 거면 진즉에 이미 다 먹었다고.
나는 왠지 모르게 내가 생각했던 중앙기사단의 이미지와 점점 궤를 달리하는 그들의 언사에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동안 내가 봐 왔던 중앙기사단의 기사들은 언제나 세베르와 한 치의 다름도 없이 그야말로 절도 있는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고, 그들이 이렇게 시끌시끌하게 구는 모습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하긴 황제 앞이니까 그럴 만도 하지. 아니, 황녀 앞이면 그러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나는 괜히 속으로 투덜댔다.
그러나 그때, 필론 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이곳은 곧 사냥이 열릴 터라 주로 맹수들로 차 있습니다. 아무래도 황녀 전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동물 친구들은 보지 못하실 겁니다.”
나는 더없이 정중한 얼굴로 동물 친구를 운운하는 필론 경을 보았다. 뭔가 절대 안 들여보낼 상황인 것 같은데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