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9화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도 해 볼 만한 도박이에요.”
“글쎄, 과연 그럴까. 진짜로 모든 일이 말처럼 순조롭게 흘러갈 수 있을 거라고 보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 말마따나 진짜로 그 몇몇 고위 귀족 중에 흑마법사가 있다고 쳐도, 만약 그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흑마법을 쓰지 않으면?”
“…….”
“쓴다고 해도 문제다. 흑마법의 가장 큰 문제는 불안정함과 알 수 없다는 점이니까. 그들이 어찌 나올 줄 알고.”
칫. 이딴 식으로 허점을 찌르다니.
사실 레르하겐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번 계획으로 인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결과는 바로 단숨에 범인을 특정 짓는 것이지만, 가장 나쁜 결과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적만 자극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 해 볼 만한데? 이 세상에 백 프로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책략이 어디 있나.
얻을 수 있는 건 적어도, 아예 아무것도 안 한 채 그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훨씬 더 진지하게 반대하자 나는 되레 할 말을 잃었다.
기실 예전이라면 그냥 밀어붙였을 텐데, 아무래도 축제 날 일도 있으니…….
그럼 역시, 숲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 뒤 레르하겐이 그들과 함께 영역 내로 들어가면 그때 따라 들어가는 것이 나을까?
그러면 레르하겐이 협조를 해 줄 것 같은데.
아니 근데 그러면 나는 진짜로 위험해지는걸?
레르하겐이 옆에 있으면 그나마 그의 뒤에라도 숨지, 혼자서 들어가면 진짜로 홀로 싸워야 하잖아.
그럼 같이 못 들어가게 하면 홀로라도 들어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을까?
아니야, 그럼 레르하겐 성격에 아예 협조 자체를 안 해 줄 수가 있어. 그리고 겨우겨우 관계를 풀었는데 더 악화되면 안 돼.
‘아악, 미치겠네.’
결국 방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맴돌았다.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조용하게 서 있었다.
상대가 레르하겐만 아니었어도……. 리건이면 패서라도 협조를 하게 만들 텐데 레르하겐이라서 불가능했다.
그럼 어떻게 설득하지? 아니 설득이라는 것이 안 먹힐 텐데.
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살짝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때 갑자기 위쪽에서 가벼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그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한숨을 쉬고 싶은 건 나인데 왜 로드님이 한숨을 쉬어요? 괜히 발끈해서 톡 쏘아붙이려는데, 레르하겐의 옅은 벽안이 그대로 내게 꽂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던 눈이 살짝 감기더니, 묵직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라고 말해 보았자, 딱히 듣지는 않을 테지.”
어?
예상 밖의 전개에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일부러 입을 꼭 다물고 있는데, 레르하겐이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한번 방법을 써 보지. 그들을 극한으로 밀어 넣어서, 흑마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보겠다.”
“어?”
“대신,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라. 네가 보이지 않으면 나는 바로 숲을 몽땅 날려서 너를 찾아낼 테니 알아서 하도록.”
거의 승낙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당연하죠. 저도 제 목숨 아까운 줄은 누구보다도 잘 알거든요?”
“글쎄,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만.”
“그럼 일단 장소를 정하고, 미리 확인해 둔 뒤에 ‘목표물’은 전부 숲에 가둬 놓는 것으로 하죠. 그리고 로드님이 ‘상황’을 만들어 그들 중 누군가가 흑마법을 쓰는 순간, 가급적이면 포획하는 거예요.”
“글쎄, 그렇게 순조롭게 될지 의문이군.”
“될 거예요. 로드님이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그가 안 되면 대체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그의 힘이 내 힘이라도 되듯 쓸데없는 자부심이 피어올랐다.
레르하겐은 내가 지나칠 정도로 좋아하자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런데 괜찮겠나?”
“또 뭐가요?”
“그중에 진짜로 범인이 있다면 어쩌겠냐는 것이다.”
“어쩌긴 어째요, 당장 나를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으라고 한 뒤 바로 처형시켜 버려야죠.”
“흐음.”
“상관없어요. 저는 애초에 누군가를 신뢰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
“인간은 원래 수시로 배신을 예상하면서 살아야 하는 법이에요. 특히 저처럼 사방이 적인 인간은.”
레르하겐은 내 말에 침묵했다. 그리고 곧, 그가 모습을 감추었다.
말 한마디 없이 떠났음에도 나는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대신.
‘좋아, 레르하겐의 협조도 있으니까.’
그럼, 사냥을 위해서 ‘준비’를 해 볼까?
* * *
이 차원에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레르하겐은 단 한 번도 약해 본 적이 없는 존재였다.
그는 겔라에게서 가장 위대한 것만 받았고, 그것을 대가로 그가 잃은 것은 감정과 마음이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 너는 강하니까. 마음이 없어야 한다. 소중한 존재도, 증오하는 존재도, 사랑하는 존재도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필연코 재앙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신물에 불과했던 그는 겔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시간이 흘러 세월이 쌓이면서 그는 어느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강함이 마음을 가지면, 그것이 곧 재앙의 시작이리라.
“스승님.”
레르하겐은 자신을 부르는 하시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걸리는 게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하시스의 말에 레르하겐이 미간을 좁혔다. 하시스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리고 곧, 그가 입을 열었다.
* * *
사냥 모임을 위한 초대장이 각 가문에 전해진 뒤, 내 예상대로 불참을 고하는 가문은 없었다.
엘비어츠 공작가는 애초에 내가, 정확히 말하자면 ‘에스트리아’가 초대장까지 보냈는데 불참할 리가 없었고, 델멘 공작가도 리건이 나름대로 잘 구슬렸는지 참여를 알렸다.
샤트 공작가 또한 참석한다고 답장이 왔고, 공작가들이 다 참석하는 상황에서 후작가가 자리를 비울 리가 없었다.
특히 웬일인지 애들러 후작은 초대받은 가문 중에서 가장 먼저 답장을 보낸 가문이었다.
딱히 저번의 그 으름장이 효과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나름대로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목적이 뭐든 그간 말을 듣는 척도 안 하던 가문들이 빠르게 와서 꼬리라도 흔드는 꼴을 보니 못내 기분이 좋았다.
다만 그중에서 가장 의외였던 것은 세베르 켈리어드였다.
나만큼이나 사람들이 와글와글한 곳, 특히나 귀족들이 목적을 갖고 모이는 곳을 싫어하는 그는 웬일인지 꽤 흔쾌히 참여 의사를 비쳤다.
애초에 그가 거절을 해도 흑마법을 운운하면서 강제로 끌고 올 예정이라 그의 참석은 예정된 것이었지만.
저번부터 묘하게 황실의 사무에 적극적인 그의 태도가 다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절대 흑마법 따위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그가 혹시 만에 하나 진짜로 내게 악의를 품고 그딴 짓을 벌여서 이렇게 이상하게 나오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물론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서 바로 철회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각 가문의 답장을 받은 오후, 셀라를 방에서 내보낸 뒤 나는 홀로 방에서 마력으로 좌표를 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좌표의 끝은 당연히 일전에 말했던 대로, 이번 사냥이 이루어질 시치프 숲이었다.
비록 사냥 당일 가장 중요한 것은 레르하겐의 조치겠지만, 사건의 당사자로서 나는 미리 숲의 지형이나 구도를 익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마력으로 흔적을 남겨 사냥 당일 더 쉽게 방향을 찾고 싶었다.
“흠. 이 정도 위치면 적당하려나.”
처음 가 보는 곳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바로 워프로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기사단과 함께 가거나 시종들을 대동하고 가서 마차를 이용하곤 했다.
“혹시 이상한데 떨어지지는 않겠지. 혹시라도 사냥터 외부에 떨어지면 귀찮아지는데.”
물론 황실 사냥터인 만큼 내가 가겠다는 걸 저지할 이는 없었다.
다만 사전 답사라는 것은 원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게 다녀와야 그 의미가 있는 것이라서, 나는 신중하게 좌표를 확인한 뒤 마법을 발현했다.
화아앗-.
나는 일부러 평소와 달리 마력 시동어를 생략한 뒤 속으로만 좌표를 읊조렸다.
아니, 그것은 읊조린다기보다는 ‘생각’을 하는 것에 불과했는데, 이 며칠 동안 의지만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마력을 쓰다 보니 나름대로 이렇게 간단한 마법은 시동어 대신 생각으로 대체하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야말로 순식간에 원하는 곳에 번쩍번쩍 나타날 수 있는 레르하겐과 달리, 내 시도는 미숙하기 짝이 없어 지연 현상이 일어났다.
‘그냥 시동어를 말할걸. 실력이 달려서 그런가 시동어로 마법진을 구현할 때보다 더 오래 걸리잖아?’
나는 괜히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었기에 나는 바로 생각을 접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제대로 왔네.’
다행히도 구성한 좌표에 문제가 없는지 나는 익숙한 사냥터에 정확하게 착지했다.
황족을 제외한 이들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기에 지금 이 사냥터에는 나 혼자일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일단 함정을 설치할 만한 곳부터 알아보고, 혹시라도 내가 위험에 처할 시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지 미리 준비를 해야겠어.’
레르하겐이 나를 도와주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만 믿고 놀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이건 내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사냥터의 입구에 도착할 무렵, 나는 왠지 모르게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마치 무리라도 이루듯 수많은 인기척에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지?’
나는 바로 경계의 눈빛을 했다.
누가 감히 내 사냥터에 침입한 거지? 심지어 현재는 낮이었고, 밖에는 황실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한데 이렇게 당당하게 내 사냥터에 들어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