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8화
* * *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이게 피해서 될 일은 아니야.’
다른 이면 몰라도 레르하겐은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였다.
그렇다는 것은 그의 앞에서 내가 무조건적으로 숙이고 갈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레르하겐은 드래곤 로드야. 내가 그의 앞에서 긴다고 해도 아무도 나를 비웃을 리가 없어.’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정신 승리를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소환 마법을 썼다.
익숙한 하얀빛이 살짝 반짝이자, 내가 말했다.
[제 방으로 와 주세요. 상의드릴 일이 있어요.]
말을 내뱉고 난 뒤 나는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조용하게 레르하겐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예상보다 훨씬 더 태평한 모습으로, 레르하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그날 보였던 눈빛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나를 싸늘하게 보리란 예상과 달리, 레르하겐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무심한 눈빛에는 딱히 기분 나쁜 기색도 없어서, 오히려 그의 눈치를 보았던 내가 되레 억울해질 지경이었다.
아니지, 내가 언제 그의 눈치를 봤다고?
내가 생각하는데, 레르하겐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그, 저번에 제가 납치를 당했을 때.”
“…….”
“아니, 제가 자진해서 그 사람들을 따라갔을 때, 약속 못 지킨 거에 대해서는 죄송해요. 저는 그게 딱히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제가 위험에 자진해서 들어간 건 사실이니까요.”
말을 내뱉은 내가 레르하겐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이정도면 너무 비굴하지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레르하겐의 시선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본의 아니게 침묵 속에 놓이게 된 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르하겐이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부탁할 일이 있나 보군.”
“…….”
“뭐지?”
정곡을 찔린 내가 이를 악물었다. 세상만사에 관심 따위 하나도 없어 보이는 데 대체 왜 눈치가 이렇게 빠르지?
내가 생각하는데, 레르하겐이 입을 열었다.
“네 성정에 그걸 진짜로 잘못했다고 생각할 리가 없지.”
어.
조금 의외인 말이었다. 마치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기분이 미묘해졌다.
레르하겐은 나를 힐긋 보았다. 그의 벽안에 깃든 물음에 나는 흐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맞아요. 사실 부탁할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뭐지?”
레르하겐은 딱히 내가 반성하는 기색이 없음에도 그리 개의치 않은 것 같았다.
그에 안심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일단 필요한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내가 그에게 물었다.
“혹시, 흑마법을 쓰고 있는 사람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없다.”
“……너무 즉답하시는 거 아니에요?”
“사실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마족을 처리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 리가.”
하긴,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까지 레르하겐이나 나나 이렇게 정신을 조여 매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레르하겐의 경우 딱히 정신을 조여 맨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쉽게 흑마법사를 알아볼 수 있었다면 진작 말해 줬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창턱에 기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는 레르하겐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 주변에서 흑마법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눈치챌 수 있나요?”
“네 반지가 있지 않나.”
“하지만 이 반지는 제게 작용하는 흑마법만 감지를 하잖아요. 뭐, 저번에 보니까 가끔 오류가 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제가 원하는 건 다른 거예요.”
“무슨 말이지.”
“만약 범위를 좁혀 주면, 그 범위 내에서 흑마법을 쓰는 누군가가 있을 때 그 마법을 감지할 수 있냐고요.”
“그전에 너를 이렇게 만든 치가 그렇게 쉽게 네 주변에서 흑마법을 쓸 거라고 생각하나?”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면 되죠. 로드님은 왠지 모르게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차별 공격이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정확히 말하자면, 사냥이라고 해 두죠.”
사냥.
그 아이러니한 말에 레르하겐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차가운 벽안이 그대로 내 위로 꽂혔다.
그에 나는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확실한 내 모습에 레르하겐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사냥?”
“사냥 대회를 열 거예요.”
“같은 뜻으로 쓰인 것 같지는 않은데.”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나는 그들을 사냥하겠죠.”
“그들?”
“후작 이상의 귀족들.”
레르하겐은 내 말에 의문을 품는 듯했다. 나는 목소리를 조금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그날, 소굴에 끌려갔을 때 그자들이 그런 말을 했어요. ‘각하는, 자비로운 분이라서 너희들을 고통 없이 죽일 거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마물이 발견되었죠.”
“…….”
“최근에 외부에서 발견된 마물, 개조된 것이었죠?”
“어떻게 알았지?”
“제가 갇힌 곳에 있던 마물들도 개조된 것이었거든요. 아시겠죠? 그러니까 어쩌면, 지금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 다 이어져 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렇다고 해도 마물을 풀어놓은 이가 꼭 너를 이렇게 만든 범인이라는 법은 없지 않나.”
“그렇지만, 흑마법이 출현한 이상 일단은 잡아서 족치는 게 중요하죠. 그리고 흑마법은 평범한 마법과 달라요. 수적으로 밀리는 그들은, 어떻게든 서로 도움을 받으려고 할 거예요. 한마디로, 한 놈만 잡아서 죽어라 패면 뭐든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후작 이상의 귀족들 사이에 있는 흑마법사를 잡겠다고?”
“네.”
“그들이 사냥에 응하리라 보나? 이 시점에서?”
“켈리어드 대공가, 엘비어츠 공작가까지 해서 이 황실의 주축이 되는 가문은 거의 다 수도에 있는 상황이에요. 물론 샤트 공작가도 와야 주축이 완전해지지만. 그쪽은 제가 후궁을 척살한 뒤에 찍소리 못하니까요.”
“왜?”
“샤트 공작 부인이 한때 제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마담 마드리엘과 사촌이거든요. 그 뒤로 몸을 사리는 중이에요. 마뜩잖은 얼굴을 해도 부르면 오는 가문이니까.”
“그들을 다 모아 놓아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제가 생각을 해 보았어요. 이대로 가만히 황궁에서 세베르가 물어다 주는 소식을 그저 기다리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일리안의 감을 믿자니 그것도 불안해서요.”
“그래서?”
“그러니까, 제가 직접 나서겠다는 말이에요. 지금까지 귀족들을 모을 명분도 없고, 갑자기 귀족들과 접촉하면 혹시라도 이상하게 여길까 봐 가만히 있었는데, 마침 엘비어츠 공작과 켈리어드 공작이 다 수도에 모였어요.”
“…….”
“그러니 환영 인사 겸 사냥 대회를 열겠다. 오랜만에 모여서 회포나 풀자, 고 전하려고요.”
“회포라.”
“물론 그들은 회포 따위가 아니라, 제가 이 기회를 이용해 그들을 견제하려는 장을 만든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무렴 실제 의도를 눈치채지만 못한다면 좋은 거 아니겠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연회를 여는 것이 더 많은 이들을 집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종종 나가는 사냥과 달리 연회는 너무 뜬금없었다. 내가 그런 장소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귀족들은 알았다.
무엇보다도 연회에는 쓸모없는 이들도 모여들 수 있었다. 이번의 사냥은, 필연코 후작 이상의 귀족을 겨냥해야 한다.
엘비어츠 공작과 켈리어드 대공을 위한 자리이니 자연스럽게 그들을 참석시키고 델멘 공작가야 리건을 시켜서 적당하게 정보를 흘리게 하고, 그렇게 델멘과 엘비어츠가 오면 샤트가 참석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니 자연스럽게 모일 거다.
세 개의 공작가와 대공이 모였는데 그 아래 후작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사냥에 오고 싶은 자들을 환영한다 말을 흘리면 그 아래 후작가들은 알아서 모이게 될 것이다.
“물론 인원은 줄일 거예요. 각 가문의 가주와 후계자 외에는 참석을 하지 못하게 하고, 상금은 뭐, 대충 로드님이 그때 주신 보석 중 하나로 퉁치죠.”
“그러라고 준 게 아닌데.”
“제 거니까 괜찮잖아요.”
“…….”
“그리고 사냥 대회가 시작되면 적당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흑마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주세요. 그럼 나머지는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대 보죠.”
“흑마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
“그거, 로드님한테는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물론 어려워도 나는 밀어붙일 거다.
그리고 레르하겐은 이런 내 성정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대수롭지 않게 알겠노라고 할 줄 알았던 레르하겐의 표정은 생각보다 그리 좋지 못했다.
생각 이상으로 침묵이 길어지자, 내가 눈썹을 까닥이며 물었다.
“안 되나요?”
“그럼 너는?”
“네? 저요?”
“너는 어디에 있을 거냐.”
“당연히 숲에 들어가야죠.”
“안 된다.”
“왜요?”
갑작스러운 그의 부정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왜 갑자기 안 된다고 하는 거지?
의문을 담아 레르하겐을 보자, 그가 깔끔하게 일축했다.
“위험하다.”
“뭐가 위험해요? 위험에 부딪치는 건 제가 아닌데요?”
“만약 그들 중에 진짜로 너를 이렇게 만든 이가 있다면, 과연 너는 무사할 것이라고 보나?”
“……아니요. 아니 근데 저번에 그 납치와 비교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고요. 이번에는 제 영역이고, 함정도 제가 팠으니, 모든 게 제 통제 아래 흘러갈 거예요.”
당연한 거 아닌가. 원래 사냥이라는 것은 피식자와 포식자가 바뀌는 순간까지도 감안해야 한다.
내가 그들을 잡으려고 하는 것만큼 그들 또한 나를 노리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꽤 좋은 기회였다.
손익 비교를 했을 때 이득이 더 크다면 당연히 이득이 있는 쪽을 취하는 것이 맞지 않나.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은 비단 나뿐인 듯, 레르하겐은 그럼 끝난 이야기 아니냐는 듯이 나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