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4화
[라 크리엘라(집단 속박).]
마력을 담아 술식을 외우는 순간-
번쩍-!
눈이 부실 정도로 화사한 마법진이 수십 개 눈앞에 나타났다.
피를 튀기면서 싸우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하나하나 죽이는 건 너무 시간이 드니까.
[크리미엘라, 아스타포티아(소멸).]
그냥, 한꺼번에 처리하자.
차례로 속박진과 파괴진을 소환해 낸 내가 마지막으로 이 모든 마법 수식을 겹쳐서 발현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 눈을 찌를 정도로 강한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물들의 비명 소리가 귀는 물론이고 머릿속까지 파고들었다.
꿰에에엑!
‘아, 소리하고는.’
하얀빛과 함께 휘몰아치는 강풍이 우리를 덮치고, 곧 사람들이 몸을 웅크렸다.
나는 그 앞에서 조용하게 앞을 응시했다. 치마가 펄럭거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으나 딱히 개의치 앉았다. 그저, 온전히 마법에 집중할 뿐이었다.
바스스슥-
마법진은 천천히 내려앉으면서 쇠 우리와 마물들을 먼지로 조각내고 있었다.
마치 분쇄된 듯, 한 무리의 검은빛으로 사라지고 있는 마물들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슈욱-
마치 사자의 아가리처럼 마법진은 마물과 쇠 우리의 잔해를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난장판으로 움직이던 방 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해졌다.
나는 두 손을 탁탁 털었다. 딱히 내 손을 더럽히면서 처리한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꺼림직했다.
마물들을 보아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읊조렸다.
“너, 너 누구야?”
그 물음에 나는 뒤를 힐끔 보았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를 보고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외려 나를 보면서 공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말해 주면 알아?”
“어, 어떻게.”
“마법으로 처리했으니 이제는 안전해.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이곳에서 나가겠냐 하는 것이지.”
하지만 사실 나가는 것은 마물들을 처리하는 것보다 쉽다. 흑마법의 방해가 있으면 곤란해지겠지만, 아까 전 그 두 멍청이들의 태도를 보건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신중할 필요는 있어. 다른 동료들이 있으면 곤란해져. 게다가 내 반지에서 검은빛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어?’
“뭐야.”
순간 손을 든 나는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읊조리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검은빛으로 일렁거리던 반지가 다시 평소와 다름없는 꼴이 되었다.
나는 당황했다.
‘설마 이거, 마물들 때문이었어? 이거 마물을 감지하는 힘도 있었어? 아닌데, 레르하겐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어쨌든 반지 속에 있는 검은 기운은 갑자기 사라졌고, 나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내,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은 별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내가 몸을 돌렸다.
나는 방을 한번 살펴보았다. 마물들의 잔해는 사라졌으나 방의 환경은 오래 있기에 적합하지 않다.
아까 전 내가 들어온 문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그러면 그 두 놈과 마주칠 수 있다.
나야 상관이 없지만 내 뒤에 있는 이들은 절대 그자들과 마주쳐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쓰러지거나 다리가 무너져서 그대로 주저앉으면 큰일이었다.
‘쯧. 결국 그 방법밖에 없나.’
기왕이면 이곳을 잘 보존한 뒤에 다시 조사하러 오고 싶은데, 그래도 일단 인간의 목숨부터 구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런데 그때, 아까 전 그 남자아이가 나를 향해 말했다.
“누, 누나 혹시 통로를 찾는 거라면, 이, 이쪽에 뭐가 있어.”
“응?”
“맞아. 아가. 아까 그 놈들도 네가 오기 전 이쪽을 짚으면서 뭐가 있다고 그랬다.”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그런데 통로가 있으면 뭐 해, 우리가 열 수도 없는데.”
“그래도 이 꼬마가 혹시 열 수 있을지…….”
“누나, 열 수 있어?”
나는 남자아이가 짚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벽 속에 뭔가 숨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다.
다만.
나는 손으로 벽을 콩콩 두드렸다. 딱히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나는 손끝에 살짝 마력을 모아 벽에 댔다.
문이 잠겨 있다면 문을 여는 마법을 쓰면 된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쾅!
“꺄아악!”
“뭐, 뭐야!”
“흐아아아앙, 또 왔어.”
“야, 시끄러.”
갑자기 밖에서 들리는 굉음에 나는 움찔했다.
뭐지, 또 무슨 일이 터지고 있는 건가?
‘안 돼. 이 밖은 축제가 열리고 있어, 밖에서 일이 터졌다는 건 축제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건데.’
젠장.
그렇게 된다면 죽는 것은 비단 이곳에 있는 이들이 아니다. 수도에 대규모의 사상자들이 생기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의 범인이 귀족이든 누구든 간에, 아무튼 피해가 평범한 인간들에 미치는 순간 그것은 나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 포고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손에 살짝 마력을 더 모아 벽을 부수려고 했다. 하나 그때, 다시 한번 굉음이 들려오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이건, 아까 전 그 남자들의 외침 같은데.’
게다가 첫 번째
설마, 축제에 무슨 일이 있은 게 아니라…….
콰콰쾅!
그때였다. 내가 생각을 미처 마치기도 전, 이번에는 거의 코앞이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굉음과 함께 갑자기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벽이 그대로 부서졌다.
“윽.”
그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하나 먼지가 파편이 덮쳐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정체 모를 은은한 방어막이 마치 우리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어 생각보다 내 주변은 별 반응이 없었다.
‘잠깐만, 방어막?’
나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에 눈을 깜박거렸다.
‘설마.’
벽의 파편이 방어막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자욱한 먼지와 모래가 함께 옆으로 갈라졌다.
나는 조금 더 인영의 정체를 자세히 보려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커다란 인영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혹시라도 적이라면 바로 방어 마법을 쓰려고 준비를 했다.
다만, 딱히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인영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마어마한 소란과 함께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레르하겐이었다.
“로…… 아빠!”
저도 모르게 평소에 부르던 대로 레르하겐을 부를 뻔한 나는 바로 말을 고쳤다.
레르하겐은 내 목소리에 바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서늘하게 내게 꽂히는 목소리에 움찔하고 말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
자기가 박살 내고?
나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누가 봐도 이 상황을 만든 건 레르하겐 본인인데, 정작 화가 난 자도 레르하겐이었다.
그 모순된 상황에 내가 미간을 찡그렸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아니, 잠깐만, 화가 났다고?’
나는 레르하겐의 표정을 살폈다.
딱히 언성을 높이지도, 그렇다고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도 않았지만 묘하게 그의 모든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나는 당황함에 헛웃음을 쳤다.
아니 위험에 처한 건 나인데 왜…….
“내가 말한 것 같은데.”
“……?”
“너 자신을 희생하지는 말라고. 그게 너를 돕는 대가라고 했다.”
아니, 희생 안 했는데?
나는 그냥 이것이 나를 향해 함정임을 알고 일부러 걸려들어 정보를 캐내려고 한 것밖에 없었다.
게다가 눈앞에서 사람이 끌려가는 것을 보았고, 심지어 나와 함께 있는 아이가 위험해질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끌려온 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그렇게까지 무모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는 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최소한 여기서 사지 멀쩡하게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레르하겐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의 벽안은,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감정을 잔뜩 품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속에 노골적으로 흐르는 짙은 분노에, 나는 괜히 속이 이상했다.
사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내가 한 것이 꽤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그러나 가끔 가다가는 위험과 적당하게 맞바꿔야 하는 것도 있었고, 일정하게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내게는 오늘 같은 상황이 그것이었다.
‘나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데 누굴 무모한 사람 취급을 하지?’
내가 진짜로 무모했으면, 지금쯤 죽음의 협곡으로 아예 쳐들어갔겠지.
“눈앞에서 납치당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네가 상관할 바인가?”
“아니, 이 무슨 헛소리를…… 눈앞에서 사람이 끌려갔다고요.”
“그래서, 네 목숨마저 마다하지 않고 왔다고?”
“아니.”
나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끌려갔다니까? 그리고 나는 아르시스의 황제였고, 힘이 있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 레르하겐은 당시의 상황을 모르니까 그럴 수 있었다. 나는 일단 흥분을 가라앉힌 채 레르하겐을 향해 설명했다.
“제 앞에서 사람을 끌고 갔어요. 제 반지에는 검은 기운이 있었고요. 저는 이게 저를 향한 도발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다른 이를 불러오면 되지 않나?”
“그러다가 끌려간 사람이 죽으면 어떡해요. 납치는 절대적으로 가장 빠른 시간 내로 인질을 구출하는 게 해결 방법이라고요.”
레르하겐은 그런 나를 보며 입매를 굳혔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 비낀 복잡한 감정은 진득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되레 당황한 것은 나였다.
대체 왜 이러지?
물론 백번 양보해서 내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한 게 그의 입장에서 다소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치자, 왜 걱정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다짜고짜 들어오자마자 나를 닦달하는 것은 그의 성정에 어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