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3화
곧 그가 바로 마력석의 워프 마법을 발현했다. 그와 동시에-
“아가씨가 사라졌어.”
일리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르하겐이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제게 경고의 말을 내뱉고 떠나는 하시스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 역시, 고귀한 핏줄과는 엮이는 게 아니었어.
이윽고 그 또한 복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여긴 어디지?’
나를 납치, 정확히 말하자면 납치를 하려고 했으나 실패해서 내가 대충 납치당하는 척을 해 주었던 사내들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패러렐하이스(투시).]
속으로 작게 주문을 외우자 눈을 감고 있음에도 주변의 상황이 그대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곳은, 지하 수로인가?’
꽤 음습한 곳은 빗물 같은 것이 뚝뚝 새고 있었다. 여기저기 이끼 같은 것들이 보였고 심지어 벌레들도 보이는 곳.
설마 이대로 던져 버리지는 않겠지. 그러면 바로 이 녀석들 목을 따 주마,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서 가고 있던 남자가 문을 열더니 이내 나를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것들이.’
“이봐, 얘 좀 잘 보고 있어. 알겠지?”
“저, 저희를 어떻게, 하, 하실 거예요.”
“글쎄, 그건 각하께 여쭈어야지. 뭐, 상관은 없을 거야. 그분은 자비로운 분이시라서, 너희들을 아주 고통 없이 죽여 주실 테니.”
그렇게 말한 남자 둘이 낄낄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나는 그대로 눈을 떴다.
‘아, 머리야. 이것들이 기절을 시킬 거면 확실하게 시키지, 뭐 이딴.’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상당히 어설퍼 보이는 그들의 행동과 달리 주변은 사람을 감금하기에는 너무 적절했다.
적절.
스스로 이딴 생각을 하고 나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내 망토 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저…….”
고개를 돌아보자 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조금 꾀죄죄하긴 했으나 그래도 반듯한 옷을 입고 있었다.
“너는 혼자 왔어?”
남자아이의 눈가에 약간의 두려움이 새겨져 있었다.
너는? 그의 물음이 다소 이상해서 나는 되물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엄마와 같이…….”
남자아이가 짚은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꽤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노인이거나 거동이 불편한 청년들이었고, 사지가 멀쩡한 이들이 있으나 대부분 말라빠져 힘도 쓰지 못할 것 같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아이는 몇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는 나와 이 남자아이 둘 뿐이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소년, 소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나이대였다.
한마디로, 이 방에 있는 것은 대부분 흔히들 약자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던 것이었다.
“저기, 저 쓰러진 분이 우리 엄마셔.”
과연 그의 손끝에는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아들과 달리 남루한 모습을 한 여자는 왠지 모르게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때 모여 있던 노인 중 한 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가, 이리 와. 거긴 춥단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충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아까 전부터 조금 서늘한 것 같기는 했다. 지하라서 그런가.
나는 일단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확인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여기, 다들 어떻게 오셨어요?”
솔직히 나도 이 상황에서 이렇게 구는 것이 다소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일곱 살짜리 아이가 이런 상황에서 태연자약하게 상황부터 파악하려고 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이곳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나와 다시 마주칠 일이 없는 인간이었고, 인질이 있는 이상 일단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난 이상한 향을 맡고 쓰려졌더니 여기였어.”
“나, 나도.”
“나는 그냥 길 가다가…….”
그리고 흘러나오는 답변은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그때, 그 남자아이가 다시 내 망토를 잡고 툭툭 잡아당겼다.
“우, 우리는 밥 먹다가, 엄마가 돈을 못 내서…… 일해서 갚으려는데…… 안 된다고, 갑자기 우리를 데리고 여기로 왔어.”
“어느 레스토랑인데?”
“모르겠어. 그냥 작은 레스토랑이었어.”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야 아무런 단서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주, 죽을 거야.”
“…….”
“우리 모두 다 죽을 거야. 아까 그랬어.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마물의 먹이로 넘길 거라고. 우린 다 죽을 거야.”
마물의 먹이?
“그게 무슨 헛소리야. 마물의 먹이라니.”
“모르겠어? 이 방, 이 방에 있는 게 무엇인지?”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 아닌 왜소한 체격의 청년이었다. 리건과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은 두 귀를 손으로 막고 벌벌 떨면서 읊조렸다.
“우리 다 죽을 거야. 우리 다 마물의 먹이가 될 거야. 여기는 마물 소굴이야. 저들은 악마야…….”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리건, 미안해. 생각해 보니 동년배 중에서 너 정도면 정말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던 거구나.
하지만 한평생 이런 범죄에 연루된 적 없을 소시민한테 뭘 바라는 것도 웃기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 캐묻는 것보다, 나는 뒤로 살짝 물러선 뒤, 손을 뻗었다.
[레이어시팅(환하게).]
그 순간 방 안이 환하게 밝혀졌다. 내 반지의 검은 기운은 이미 아직도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여기가 마물의 소굴이라는 것이지.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문득 사람들이 기대어 있는 벽 속에서 일렁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설마.”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천천히 벽 쪽으로 다가갔다.
“비켜 봐요.”
말을 마친 내가 벽을 잡았다. 마치 천이라도 되듯 그대로 잡히는 것을 옆으로 걷었다.
그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허, 허억!”
“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수십 개의 쇠 우리였다.
마치 탑처럼 차곡차곡 층층이 쌓인 쇠 우리에는 각각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들이 갇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쉽게 마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니까, 벽이 아니라 쇠 우리를 쌓아서 만든 뒤 천으로 덮어 놓은 거였어. 이 방은 마물들을 보관하는 장소였던 거야.’
그런데 대체 왜? 누가?
내 주변은 이미 아비규환이 되었다. 사람들은 엉엉 울지 않으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심지어 기절을 한 이도 있었다.
그때 아까 전 나를 옆으로 부른 노인이 급히 나를 잡았다.
“아, 아가, 이리 와. 저, 저건 위험해.”
이 와중에도 나를 생각할 겨를이 있나.
나는 침착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냥 흑마법사와 연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납치를 당해줬을 뿐인데,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 아가.”
“일단, 나가도록 하죠.”
놀랍게도 마물들을 보자 외려 머릿속이 더욱더 이성적으로 변했다.
당연했다. 이 방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평민으로 보이는 이들이었고, 애초에 마법사나 검사, 자신을 지킬 만한 수단이 있는 이였다면 끌려올 일도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고, 이 자들을 전부 구해서 나갈 수 있는 것도 나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다만.
‘이대로 사람만 데리고 나갈 수는 없어. 혹시라도 놈들이 마물들을 수도에 풀어놓으면, 아니 수도가 아니더라도 어디에 풀어놓더라도 위험해.’
나는 그 위쪽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쌓인 쇠 우리를 응시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마물들을 손에 넣은 거지.
아니, 손에 넣은 게 맞긴 한가.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흑마법은 생명 자체를 개조하는 힘이 있었다.
인간도 부활시키는 그들이, 마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닐 것 같았다.
‘대체 누가 제국의 수도에 이딴 것을!’
나는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이 천천히 정리되었다.
일단, 여기에 있는 마물들을 전부 정리한다. 그리고 밖에 있는 놈들을 황궁으로 데려가 족치고, 이곳에 있는 이들을 데리고 나간다.
“아, 아가, 빨리 이리로 온.”
“뒤로 물러나.”
“응?”
“잠깐만, 아가. 마법사이니?”
“누나, 안돼. 아무리 누나가 마법사라도 마물들한테는 못 당해!”
언제 봤다고 벌써부터 누나야. 요즘 애들은 원래 다 이렇게 붙임성이 좋은가.
나는 만류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게 앞으로 나섰다.
물론 마물들은 평범한 마법사 혼자서 상대하기에 무리였다. 비올레도 마물을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었다.
다만 현재, 이 마물들은 케이지 속에 완전히 갇혀 있었고, 수십 마리였지만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며, 무엇보다도.
‘흑마법이면 모를까, 실체가 있는 마물을 상대하는 건 내 전문이지.’
애초에 내가 마력을 얻은 것도 혈혈단신으로 북쪽으로 쳐들어가 얻은 것이었다.
체계적으로 스승을 모시고 마법을 배우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내 마법은 전부 나 스스로 죽이고 처리하면서 습득한 것이었다.
그래서 매우 거칠고, 그리 정석적이지 못하고, 아카데미나 마탑의 학자들이 보았다면 어떻게 저런 술식을 쓸 수 있냐고 말했겠지만.
‘마법이라는 건 소용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정통이 아니면 뭐 어때, 내가 정통 마법사들보다 더 강한데.’
[아포데미움(파괴진).]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빠 미안해, 지금 상황에서는 아빠 채찍보다 내 능력이 더 소용이 있는 것 같아.
채찍은 움직이는 상대와 싸우기에는 적합하지만 케이지에 갇혀 있는 존재와 싸우기에는 그리 적절한 무기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