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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52화 (52/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2화

“나 안 죽일 거잖아, 아가씨? 당신처럼 이성적인 사람이 나를 죽였을 때의 실리를 계산해 보지 않았을 리가 없어.”

“그렇긴 하지만, 수틀리면 죽일 거야. 나는 폭군이잖아?”

그에 일리안이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때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인형 가게 부근에서 갑자기 소란이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인형 가게 주인이 새 인형을 갖고 왔는지 아이들이 환호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사이에 이블린은 마치 샌드위치같이 끼어 있었는데, 앞으로 달려가는 아이와 달리 그녀는 그저 이리저리 밀쳐지고 있었다.

그에 기사들이 급히 그녀를 꺼내려고 했으나, 정작 아이들이 와글와글한 곳이라 그들도 손을 쓰기 어려웠다.

차라리 적진이었다면 바로 옆으로 치워 버릴 수 있으나, 어쨌든 아이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아니 쟤는 왜 어딜 가도 저렇게 홀대를 받고 살아? 그냥 밀어 버리고 자기가 나가면 되잖아.”

“아가씨, 본인이 하지 못하는 건 다른 사람한테 요구하면 안 돼.”

“나는 그럴 건데?”

“거짓말, 아가씨 어렸을 때는 그러지 못했잖아.”

“뭐?”

“내가 알아. 그래 보이거든.”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젠장. 그런데 맞는 말이라서 더 분했다.

“가서 이블린이나 데려와. 저러다가 애 넘어지겠어. 저 기사들은 뭐 한대.”

“내가?”

“빨리 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쟤 데리고 오면 황궁으로 돌아가자.”

어차피 오늘 하루 종일 축제장을 돌았으나 딱히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내가 걱정했던 것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었으므로, 지금 상황을 보건대 딱히 큰 문제가 일어날 기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뭐, 수상한 움직임도 없고.’

결국 일리안은 나에 의해 강제로 이블린을 데리러 갔다. 나 또한 분수대에서 내려와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나저나 하시스는 뭘 찾았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어?”

망토를 정리하던 나는 우연하게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얌전하게 내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의 보석에서 갑자기 약간의 파동이 일었다.

‘뭐지?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겠는데?’

과거 전적을 살펴보았을 때 반지에 이런 흔적이 나타나는 것은 대부분 내가 흑마법에 의해 공격을 받았을 때였다.

그러나 현재, 나는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 멀쩡하게 서 있기까지 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례적인 상황에 내가 경계를 바로 세웠다. 주변을 훑어보자 딱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나는 일부러 손을 살짝 들고 기운을 살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반지에서 일렁거리던 검은 기운이 확 일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어두컴컴한 골목이 들어왔다.

함정?

누가 봐도 그리 상서롭지 못한 기운을 흘리고 있는 골목은, 딱 봐도 들어가면 안 될 것처럼 보였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미쳤다고 저기를…….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읍, 살려-.”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이가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그 검은 옷을 입은 이가 누군가를 끌고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아, 젠장.’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누가 봐도 함정이었다.

딱 봐도 뇌가 있으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인형 가게 부근에서 이블린을 겨우 ‘구출하고’ 있는 일리안을 보았다.

적에게 이미 나는 노출이 되었다. 아까 전의 납치는 도발이었고, 일종의 선전 포고였다.

당연하게 내가 이블린과 함께 왔을 것을 예상했겠고, 그렇다면.

‘칫.’

호위로 데려온 기사들은 애초에 전력이 되지 못한다.

저들이 이블린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내가 초대에 응하지 않을 시 화살은 이블린에게 간다.

만에 하나의 상황을 위해서 일리안은 이블린의 옆에 남겨 두는 것이 좋다.

그래도 어린아이를 나 몰라라 하는 인격 파탄자까지로는 보이지 않으니까. 최소한 집까지는 데려다주겠지.

그리고.

‘어차피 나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으니까. 차라리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나를 죽게 내버려 둘 가능성이 높아.’

우리의 언약의 내용은 그가 나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지, 그가 나를 보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일리안은 이대로 나를 내버려 둬도 그에게는 이득이라는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친 뒤 곧장 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골목은 과연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침착하게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뭐야? 이 꼬맹이는.”

“뭐, 뭐야. 이거.”

응?

나는 나를 보자마자 갑자기 깜짝 놀라는 두 사람을 보며 뭔가 내 예상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꽤 치밀하게 진행된 함정과 별개로, 두 사람은 허둥지둥거리며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전에 함정이 맞긴 하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갑자기 그중 한 명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극적인 향이 코를 찔러왔다.

‘아, 머리 아파. 아픈데.’

어…… 기절할 정도는 아닌데? 아까 그자는 왜 쓰러졌던 거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이것들을 쓰러뜨리고 들어갈까 아니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누군가가 나를 질질 끌고 가는 것이 느껴졌다.

* * *

일리안이 에슈트의 부재를 눈치챈 것은 그녀가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어, 황녀 전하는…….”

이미 아이들에게 치여서 엉망이 된 이블린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까 전 자신을 ‘구해 준’ 일리안에게 닿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확인한 이블린이 흠칫했다.

일리안의 얼굴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우아한 호선을 그으며 휘어진 그의 입술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정작, 에메랄드를 닮은 그의 녹안은 누가 봐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는데, 섬뜩하기 그지없는 그 표정에 이블린이 뒷걸음질 쳤다.

‘여, 역시 무서운 사람이었어.’

그녀는 비록 어렸지만, 마그릿을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을 봐 오면서 입만 웃고 있는 인간들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일리안은 심지어 마그릿보다도 더욱더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것이 바로 이블린이 일리안을 보고 무서워한 이유였다.

“이봐.”

그때였다.

조용하게 에슈트가 있던 곳을 응시하던 일리안이 뒤에 서 있는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아까 사탕을 사러 간 내 동생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만 이 꼬마 아가씨를 후작가로 데려다주겠어?”

“황녀 전하께서 혹시 길을 잃으신 건.”

“아니. 그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야. 알잖아, 위대한 드래곤 로드의 아이라는 거.”

“안 됩니다, 공자님. 저희는 무조건 황녀 전하를…….”

“그냥, 돌아가. 내 동생은 내가 챙길 테니.”

그렇게 말하는 일리안의 목소리에는 묘한 섬뜩함이 있었다. 일리안은 기사들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꼬마 아가씨를 꼭, 제대로 저택에 데려다줘. 알겠지?”

“네. 레이디 이블린, 이쪽으로.”

곧 기사들이 이블린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이블린이 마음에 놓이지 않는지 자꾸만 뒤를 힐끔거렸다. 그런 이블린을 향해 일리안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곧 그들이 인파에서 사라지자, 일리안이 거짓말같이 얼굴 위에 있는 미소를 지웠다.

미소를 지운 일리안의 얼굴은 생각 이상으로 서늘했다.

“흐음. 우리 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이러면 곤란한데.

내가, 자신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일리안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그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에슈트는 사라졌고, 아마도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제 발로 사라졌든 아니면 납치를 당했든 그녀가 사라졌고, 시비가 확실한 그녀의 성정으로 보았을 때 제가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저를 벌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을지도.’

어쩌면, 자신이 도움을 청하면 이블린마저 위험에 청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비록 에슈트는 자꾸만 부정하지만, 그는 그녀가 이블린을 꽤 아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히 아이에 대한 배려인지, 아니면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배려인지 차치하더라도 어쨌든 에슈트는 이블린을 퍽 신경 썼다.

‘그럼, 그냥 이대로 그 꼬마 아가씨를 집에 데려다주었다고 말하면 상관없으려나?’

그러니까 그는 그냥 이블린의 안전을 보장했고, 에슈트는 죽어도 상관없고 살아도 상관없다.

그에게는 핑계가 있었고, 아니, 사실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더 좋았다.

- 황제를 죽여라.

부모를 죽였다고 했지. 어미와 아비를 죽였다고 했다. 일리안에게 그것은 천인공노할 짓이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부모를 살려야 하는데.’

그래, 나는 내 부모를 살려야 하는데 말이야.

에슈트를 죽여야 내 부모가 산다. 최소한 그것이 룰처럼 정해진 지금.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리안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 나는 죽지 않아.

일리안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눈가에 서리던 그 깊은 삶에 대한 지독한 집념. 그와는 다른, 올곧게 앞만 보고 살아온 이의 단단함.

아이 같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강인한.

“하아.”

일리안은 코를 찡긋했다.

‘일단 이번은 구하는 게 좋겠네.’

그렇게 생각한 그가 바로 품에 숨겨 놓았던 마력석을 꺼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그가 마법을 발현할 때 마력을 조금씩 꺼내 썼던 것으로서, 저번에 에슈트가 왔을 때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에슈트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은, 대체적으로 한 개의 마력석에 한 개의 마법 효과만 있는 다른 것들과 달리, 그의 것은 여러 가지 마법이 섞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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