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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51화 (51/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1화

하시스의 말에 레르하겐의 눈빛이 더더욱 가라앉았다. 그가 자신의 이마를 살짝 짚었다.

“하아.”

레르하겐 치고는 상당히 격렬한 반응에 하시스가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혹시, 뭐, 알고 계시는 거라도…….”

그러나 하시스가 말을 맺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허공에 금색의 빛이 돌더니, 이내 커다란 원형의 고리가 생성되었다.

“이건, 연금술사들의 텔레포트 고리 아닌가?”

그 순간 레르하겐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몇 초 뒤, 갑자기 원형 고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일리안이 성큼 그들 앞에서 나타났다.

“큰일 났어.”

“너 뭐냐. 너 그 꼬맹이들이랑 축제에 나가지 않았냐?”

“아가씨가 사라졌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하시스가 그대로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렸다. 그의 외침에도 일리안은 침착했다.

“말 그대로야. 아가씨가 사라졌어. ,일단 애들러 가의 꼬마와 기사들은 돌려보냈고, 중요한 건 아가씨의 안위야.”

“아니 대체 애를 어떻게 봤기에-.”

“…….”

“아니지. 걔가 생긴 건 그래도 어디 납치당할 실력은 아닌데……스승님. 당장 가 봐야 하는 거 아…… 어, 스승님?”

그러나 급히 물으려 고개를 돌리던 하시스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레르하겐이 앉아 있던 곳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하, 젠장. 골치 아프게 됐네.”

하시스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곧, 그가 냉랭한 얼굴로 일리안을 향해 물었다.

“너, 혹시 일부러 걔를 방치한 건 아니겠지?”

“글쎄.”

“혹시라도 걔한테 무슨 일 있으면, 넌 나나 스승님 손에 죽는다.”

말을 마친 하시스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홀로 남겨진 일리안이 쓰게 웃었다. 곧,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글쎄,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축제는 생각 이상으로 시끌시끌했다.

그러나 딱히 기분이 나쁜 소란은 아니었다.

오히려 축제의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평소보다 더욱더 흥분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언제나 내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던 이블린은 평소와 달리 입을 헤 벌리고, 주변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와, 예쁘다.”

“흐음.”

“황녀 전하. 저거, 저거 예쁘지 않아요?”

그런 이블린이 가리킨 것은 누가 봐도 저가의 구슬 목걸이였다. 비즈를 촘촘히 끼워 맞춘 목걸이는 그저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굳이 돈을 주고 살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블린의 반짝거리는 눈빛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아예 따로 챙겨 온 돈주머니를 꺼내려는 그녀를 급히 말린 내가, 일리안에게 말했다.

“오빠, 저거 하나만 사 줘.”

애한테 돈을 꺼내게 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당장 저것을 합리적인 가격에 사 오라는 내 눈빛을 알아차린 일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곧 몇 번 가게 주인과 흥정을 하는 듯하다가, 일리안이 반짝거리는 비즈 목걸이 두 개를 사 왔다.

“자, 이건 아가씨 꺼, 이건 이쪽 꼬마 아가씨 꺼.”

“……?”

내건 왜 사 왔지? 지금 날 놀리나?

나는 내 목에 걸린 구슬 목걸이를 보며 눈으로 일리안을 욕했다. 그러나 일리안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다른 색으로 사다 줄까?”

“아니, 됐어.”

너를 목걸이로 꿰 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결국 나는 이블린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축제의 중앙 광장에 도착할 무렵, 나와 그녀의 품에는 솜사탕과 주스, 크레페 등 온갖 먹을 것과 별 쓸모없는 공예품들이 가득했다.

“우아, 맛있어.”

나는 귀족 영애면서 길거리의 음식을 먹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이블린을 힐끔 보았다.

개중에는 딱히 먹고 싶지 않은, 누가 봐도 별로 건강하지 않은 음식들이 있어 진심으로 저지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헤실거리는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그래, 귀족 영애가 인생에 이런 걸 먹으면 몇 번이나 먹는다고.’

나도 어렸을 때 황궁에서 외출을 허가받은 적이 없어서 그렇지, 만약 축제에 올 수 있었다면 저런 먹을거리를 탐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묘하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윽고 중앙 광장에서 자리를 잡은 내가 분수대의 옆에 앉았다.

먼지가 쌓이긴 했지만 어차피 옷이야 씻으면 그만이었기에 상관없었다.

이블린도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며 내 옆에 앉았다.

참고로 그것은 일리안이 내 몫으로 사 온 것이었는데, 이미 하루 종일 먹을 수 있는 당도를 충분히 섭취한 나는 도저히 더 먹고 싶지 않아 이블린에게 주었다.

제일 처음에 거절하던 것치고 이블린은 꽤 맛있게 그것을 먹었다. 그에 내가 진지하게 물었다.

“집에서 디저트 안 줘?”

순수하게 궁금해 물었지만 정작 이블린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녀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내려놓았다.

그에 내가 급히 그녀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뭐라고 하는 거 아니니까 그냥 먹어.”

“집에서는, 잘 먹지 못해요.”

“설마 마그릿이 볼품없게 먹을 것도 빼앗아 먹는 거야?”

“아니에요. 언니는 오히려 몸매를 위해서 디저트를 먹지 않아요.”

“살을 빼려면 운동을 해야지, 왜 안 먹어? 어쩐지 비실비실 해 보이더라니.”

물론 어느 정도 트집인 것도 있었지만, 마그릿이 내 눈에 곱게 보일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빼앗기거나 하는 건 아니란 거네? 그냥 적게 주는 거지?”

“네.”

“그럼 됐어.”

후작가에서 디저트를 적게 주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아이가 좋아한다고 디저트를 무차별적으로 주면 그것이야말로 교육의 부재 아닌가.

이블린은 이번에도 함께 화를 내 줄 줄 알았는지 괜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멀리 있는 인형 가게를 발견하고 두 눈을 반짝 빛냈다.

“황녀 전하. 저 혹시, 저거, 저거.”

그에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인형 가게라니.

또? 나는 기사들의 손에 하나씩 쥐어져 있는 인형을 힐끔 보았다.

“또 사려고?”

“안되나요?”

“나 좀 피곤해.”

“진짜요? 그럼 돌아가요!”

“아니, 내 말은, 너 혼자 다녀오면 안 돼? 나 여기서 뭐 좀 먹고 있을게.”

이블린은 내 말에 조금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인형을 구경하고 싶은 열망이 나와 함께 있고 싶은 열망을 이겨 버렸는지, 그녀가 폴짝 분수대에서 내려갔다.

“그럼 구경하다가 올게요.”

“응. 그래.”

곧 기사들과 함께 이블린이 인형가게로 다가갔다. 이미 거기에는 온갖 아이들이 와글와글했다. 그 주변에는 나처럼 지친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왜 안 가, 아가씨?”

“나더러 저기에 끼라고? 피곤해.”

“이런, 대단한 마법사 아니었나? 전투 실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벌써 피곤하다고?”

“그 체력과 이 체력은 달라. 대체 왜 아이들은 이렇게 잘 뛰어다니는 거야. 입구에서부터 지금까지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사람이 몰려든 곳은 한 번씩 다 기웃거렸는데 왜 안 피곤한 거지?”

“아가씨, 아가씨도 지금 아이의 몸이야.”

“정신력이 낡고 찌든 어른이라서 그래.”

결국 나는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일리안이 옆에서 나지막이 웃었다. 그가 이렇게 웃는 것은 처음이라서 내가 신기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한 것도 처음이긴 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미쳤다고 나를 해치려고 온 사람이랑.’

그러나 새삼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은 또 그런 것치고는 나름대로 꽤 얌전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축제를 노니면서 뭐 수상한 기운이나 사람은 있었어?”

“아?”

“뭐야. 설마 지금까지 태평하게 그냥 축제를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내 물음에 정작 일리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했다.

내가 험악한 표정을 짓자, 그가 그제야 다시 웃음을 지으며 도리머리를 쳤다.

“아니, 없어. 안심해.”

“진짜?”

“응, 진짜. 난 아가씨한테 거짓말을 못 하는 몸이잖아?”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이렇게 이상하지.

“하여튼 말은 잘 해.”

“말을 잘해야 아가씨가 날 죽이지 않을 거 아니야.”

“그래서, 그 사람이 대체 너한테 지시를 한 게 뭐야? 이쯤이면 그냥 알려 줄 때도 되지 않았나?”

“아, 이거, 곤란한 질문이네. 언약 때문에 거짓말하면 죽잖아. 대답 거부해도 돼?”

“날 죽이라고 하는 거였어?”

사실 나는 이미 그의 목적에 대해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언약을 맺기 전이었고, 지금은 언약을 맺은 상태라서 거짓을 말하면 진짜로 언약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었다.

일리안은 내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부드럽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가씨는 죽는 게 두렵지 않나 봐?”

“두렵다기보다는 싫어.”

“그런데 왜 그렇게 담담하게 물어봐?”

“그거야. 죽지 않을 거니까.”

“…….”

“내가 말했지. 내가 어떤 죄를 저질렀고 어떤 잘못을 했든, 나는 뻔뻔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벌하게 되면, 그와 최대한 대항하다가 죽음을 맞이할 거야.”

“…….”

“그러니까 상관없어. 네가 나를 죽이려고 하든 말든. 나는 죽지 않아. 절대.”

그러니까 말해.

내 뜻을 알아들은 것일까.

일리안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맞아.”

“진짜라고?”

“예상했잖아?”

“대체 어떤 새끼가 감히 나를 음해하려고.”

일리안이 내 반응에 피식 웃었다. 내가 그를 흘겼다.

“웃음이 나와? 내가 너를 지금 죽일 수도 있는데?”

물론 나는 일리안을 죽일 생각이 없다. 나는 그를 기왕이면 써먹을 수 있을 데까지 써먹을 예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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