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0화
세베르는 생각과 다른 대답에 얼굴을 굳혔다. 비록 레르하겐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는 레르하겐의 강함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강합니까?”
“아니. 내가 약해진 거다.”
“…….”
“에스트리아에게는 함구하라. 안 그래도 알게 모르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굳이 이런 사실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알겠습니다.”
애초에 세베르의 성정상 에스트리아를 불안하게 만들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레르하겐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렸다.
“알겠나?”
비올레는 갑자기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물음에 움찔했다.
“어, 그…….”
‘우리가 있는 걸 알고는 있었던 거야?’
비올레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중하고,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답을 얻은 레르하겐이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세베르는 그 자리를 보다가, 비올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처리한 마물의 전투 기록이 있나?”
“있습니다.”
“대공가로 보내.”
“네? 아 잠…….”
그러나 비올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베르가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가 모습을 감추자, 뒤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저, 마탑주님, 괜찮으십…….”
“망할, 권력의 개가 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대체 어떻게 된 게 저런 것들이 이 세상에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어? 아, 에스트리아까지 더하면 셋이네!”
마법사들은 드래곤 로드와 세베르에게 무언의 협박이나 마찬가지인 명령질을 받고도 무사한 마탑주의 건강한 정신 상태에 안도했다.
“그나저나 저 둘은 왜 저러는 거야.”
어쨌든 누가 봐도 두 사람의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비올레는 저 두 남자를 동시에 옆에 두고 있는 에스트리아의 통제 능력과 강인한 정신력에 진심으로 존경을 보냈다.
* * *
가을이 다가와서 그런가, 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어두워졌다.
“황녀 전하.”
나는 그야말로 얼굴에 기대와 기쁨을 잔뜩 써 붙이고 달려오는 이블린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넘어져.”
그에 이블린이 발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곧 내 앞에 도착한 이블린이 활짝 웃으면서 물었다.
축제라고 특별히 달았는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내가 선물해 준 리본이 반짝거렸다.
“오늘 축제에 나갈 수 있어서 너무너무 기뻐요!”
“그래?”
“네. 아, 그리고 이거, 호박 사탕인데. 감사절에 드시는 거래요. 저희 저택의 파티시에 분들이 드시는 걸 조금 받아왔어요. 이건 황녀 전하 몫이에요.”
감사절에 확실히 호박 사탕을 먹기는 했다만은, 어디까지나 평민들의 관습이었다.
귀족들은 대부분 고기류로 자신의 식탁을 채웠다.
하지만 솔직히 일곱 살 아이한테는 비싸게 구워진 고기보다는 사탕류가 낫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나 단 거 싫어하는데.’
나는 이블린의 반짝반짝하는 눈동자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응, 고마워.”
그녀의 손에서 사탕을 하나 받아 포장을 까고 입에 넣자, 이블린이 배시시 웃었다.
입안에서 퍼지는 달짝지근한 향에 나는 입을 우물거렸다.
옆을 힐끔 보자, 셀라가 내가 준비한 망토를 두 개 들고 우리를 보며 웃고 있었다.
“황녀 전하, 분부하신 망토를 가져왔습니다.”
“아, 그 검은 건 얘한테 줘. 난 하얀 거 쓸 거야. 괜찮지, 이블린?”
“네. 저는 다 괜찮아요. 그런데 이건 왜 쓰는 거예요?”
“그냥, 원래 나갈 때는 귀족이나 황족이나 다 이런 걸 써서 신분을 가려야 안전한 거야.”
물론 헛소리였다.
축제일에는 대부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보통이었고, 물론 그 속에서도 귀족들은 눈에 띌 수는 있었으나 그렇다고 너무 고급스러운 옷을 입었는지 경계를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이블린에게는 축제이지만 내게는 어느 정도 정보 탐색의 의미도 있었다.
겸사겸사, 혹시 수도에 이상은 없는지, 한번 돌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물론 가장 좋은 경우는 아무런 일도 없이 이대로 얌전하게 황궁에 돌아오는 거지만.’
나는 이블린의 몸에 씌워진 망토를 힐긋 보았다. 이 망토는 원래 내, 그러니까 황제의 창고에 있던 것으로서, 외부에서 오는 대부분의 마력을 차단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반대로 내 망토는.
‘내 모든 마력을 추적하지 못하게 해 주는 것이지.’
참고로 이것은 내가 예전에 북쪽 경계에서 마물들을 처리하다가 얻은 전리품이었다.
“그나저나 일리안……오빠는 왜 아직도…… 아, 저기 오네.”
나는 만나기로 한 시간을 조금 넘겼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일리안을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하시스가 옆에 없다고 막 늦게 나오네?
“빠르게 다녀 좀, 무슨 지각이야.”
“아, 이런 미안해, 아가씨. 내가 시간을 잘못 봐서 말이야. 아, 애들러 가의 꼬마 아가씨도 있네?”
그러나 일리안의 상냥한 언사에도 이블린은 주춤거리다가 내 뒤에 숨었다.
왜 이러는 거지. 저번에 딱히 이블린과 접촉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블린이 작게 읊조렸다.
“안녕하세요.”
“응, 꼬마 아가씨. 그런데 내가 뭘 잘못 했어?”
“아, 아니요. 그, 그냥, 오빠는 처, 처음이라서요.”
오빠가 처음인 게 아니라 그냥 상냥한 손위 형제의 존재가 처음이겠지.
저번 가든 파티에 참석을 한 일리안 또한 대충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구나. 오늘 잘 부탁할게.”
‘뭐야, 생각보다 친절하잖아?’
비록 아이긴 하나 어쨌든 이블린도 귀족이었으므로, 나는 일리안의 다정함에 조금 놀랐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일리안이 입 모양으로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 친구잖아.’
말은 잘해요.
‘누가 친구야?’
곧 그의 말에 반박한 내가 궁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블린이 내 팔을 꼭 안고 나와 발걸음을 함께 했다.
마차에 올라탄 뒤 내가 긴장한 얼굴을 했다. 왠지 모르게 오늘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으면 그건 그냥 억측인 걸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덜컹거리는 마차가 멈춰 서고 이내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 전하, 이곳입니다. 축제장의 입구가. 이곳에서 내리시겠습니까?”
“안쪽은 마차를 타고 가는 게 불가능한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만.”
왠지 모르게 시끌시끌한 목소리에 벌써 피곤해지는 것 같아 내가 물었다.
그러나 마부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 커튼의 틈새를 통해 밖을 힐끔 본 이블린이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황녀 전하, 저희, 저희 걸어가요. 네?”
아니 언제 이렇게 적극적이었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일리안이 갑자기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아가씨, 축제의 장은 엄청나게 북적이는 거 알지? 평민들의 축제를 망치는 황녀가 되고 싶은 거야?”
이게 정말.
결국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내가 승낙을 하자마자 마차의 문이 열리고-
“여기 좀 보고 가세요!”
“갓 구운 따끈따끈한 구름빵! 구름빵 다섯 개에 2로트!”
“감사일을 맞이해 마력석을 선물해 드려요!”
나는 내 눈을 강하게 찔러오는 불빛에 눈을 찡그리다가,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거 뭐야.’
“황녀 전하, 어서 가요!”
곧 이블린이 방긋 웃으면서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잔뜩 상기된 그녀의 표정과 손길에 결국 끌려가고 말았다.
* * *
축제의 열기와 달리 황궁의 분위기는 한없이 고요했다.
간간이 멀리서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오곤 했지만, 황궁은 마치 그것과 완전히 절연을 한 듯, 냉막했다.
하시스는 그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사이에서 조용하게 걷고 있던 그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러나 에슈트의 명령을 잊지 않은 듯, 그는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 꼬맹이가 정말 귀찮은 걸 시키고 있어.’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딱히 진심으로 되는 귀찮음이 없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그럴 거였으면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그는 비록 모난 성격을 갖게 되었으나, 그것과 별개로 어린것이라 생각되는 것에는 다소 약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확히 에슈트가 그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기준으로 어른과 아이의 극명한 경계는, 결국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미숙할수록 자기가 어른이라고 우기는 것이지.’
물론 그는 요즘 에슈트의 날이 많이 누그러졌음을 눈치챘다.
제일 처음 만났을 때의 땍땍거리던 어린아이가 이제 조금 여유를 가진 듯했다.
‘뭐, 그래 봤자 그 성미가 어디 가겠느냐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걷던 하시스가 흐음 길게 숨을 내쉬었다.
‘황궁의 절반 이상을 둘러봤는데, 딱히 이상한 조짐은 없어. 혹시나 해서 구석구석 다 살펴보았는데, 역시 이상한 기운은 없고.“
레르하겐에 의해 마검사로 훈련되어 키워진 그는, 그 진실을 보는 눈 덕분에 인간의 존재에 더욱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런 그가 만약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황궁은 안전하다는 건가.’
뭐, 더 돌아봐야 알겠지만.
그렇게 하시스는 계속해서 앞을 걸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난 익숙한 존재에 멈칫했다.
“스승님?”
“뭐 하는 거지?‘
레르하겐은 자신의 제자를 향해 무심하게 물었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을 향해 하시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며칠 동안 어디 가신 겁니까? 코빼기도 안 보이시고.”
“바빴다.”
“무슨 일 있습니까?”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것이지? 이곳은 에스트리아의 궁이 아닌데.”
“아. 그 꼬맹이가 저한테 뭘 좀 살펴보라고 해서 돌아보는 중입니다.”
“뭘 살펴보라고 했지?”
“죽은 자.”
“…….”
“부활을 한 죽은 자가 황궁에 없는지, 살펴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