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49화
* * *
쿵!
우지끈!
땅을 뒤흔드는 듯한 굉음과 함께 마물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휘두른 검이 어마어마한 섬광과 함께 마물의 몸을 두 동강 냈다.
서걱.
탁.
누가 봐도 깔끔한 마무리와 함께 사내가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손에 들린 검을 옆으로 털어 내자, 새빨간 핏물이 은빛 검신을 타고 흐를 새도 없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세베르는 평온한 눈길로 제 앞에 있는 마물의 잔해를 응시했다. 석양빛을 머금은 은은한 금안 위로 속눈썹이 드리워졌다.
마치 오만한 신이 한낱 미물을 굽어보듯 그의 눈길에는 일말의 자비도, 주저함도 없었다. 조각상처럼 차갑고 매혹적이다.
꿈틀거리는 목울대 아래 살짝 옆으로 삐뚤어진 크라바트와 피로 물든 하얀색 장갑만이 그가 마물과 교전을 벌였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 모든 것을 눈에 넣던 마탑주, 비올레는 입을 딱 버렸다.
눈앞의 마물은 이렇게 딱 두 방에 죽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한데 전언을 듣자마자 나타난 이 고귀한 대공은 마치 장난이라도 되는 듯 딱 두 번 검을 휘둘러 마물을 처리했다.
그 일련의 과정에 두려움도, 마물을 본 인간 특유의 역겨움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 어떤 감정도 없이 그저 철저히 죽여야 하는 것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경외하게 만들었다.
‘역시 드래곤 슬레이어.’
비올레는 며칠 전 제게 온 연락을 상기했다.
에스트리아와 금방 통신을 끝낸 그녀는, 이번에는 켈리어드 대공이 연락이 왔다는 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 아니 이놈의 망할 아르시스 놈들은 마탑이 무슨 자기네 고용인들인 줄 알아.
물론 그렇다고 해도 비올레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르시스 출신인 그녀는 켈리어드 대공가는 에스트리아와 다른 의미로 꽤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어머나, 켈리어드 대공 전하. 무슨 일로 이리 귀한 발걸음을…….
- 마물이 나타났다고 들었다.
- 네? 아, 네…….
- 켈리어드가의 전력을 빌려주지. 대신, 조건이 있다.
- 그게 무슨.
- 마물을 찾거든, 나를 불러.
서걱.
비올레는 마지막 마물을 그대로 베어 내는 세베르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마탑주님, 저 마물이 생각보다 약했던 것일까요?”
“장난해? 나 혼자 겨우 상대를 했는데.”
“아니 그럼 대체.”
“드래곤 슬레이어잖아. 뭐, 저 정도 마물이야 바퀴벌레 죽이는 거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꽤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올레가 비록 역대로 가장 강한 마법사도 아니고, 애초에 뛰어난 실력 때문에 마탑주가 된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는 마탑 내부에서도 꽤 상위 마법사였다.
‘으으. 나 또 기분 나빠지려고 해.’
자칭 천재나 엘리트를 보면 배가 아픈 병, 흔히들 말하는 질투를 느끼며 비올레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마지막으로 이런 감정을 느껴 본 것은 다름 아닌 에스트리아의 마법을 봤을 때였다.
‘그쪽은 그나마 타고난 거 없는 습득력과 노력의 산물이라면, 이건 뭐 그냥 천재네. 더 재수 없어. 기사라도 재수 없어.’
그러나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비올레는 더없이 화사한 얼굴을 하며 세베르를 향해 다가갔다.
“정말이지 너무 대단하세요. 어떻게 이렇게 단숨에! 역시 드래곤 슬레이어, 아르시스의 희망다워요.”
뒤에서 내 상사의 필사적인 사회생활을 보고 있는 마법사들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분위기가 서렸으나 비올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마탑이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기관이라고 하나, 어쨌든 그 많은 마법 도구들은 땅을 판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올레의 그런 태도에도 세베르의 시선은 자신이 쓰러뜨린 마물에게 꽂혀 있었다.
그는 두 동강이 난 끔찍한 형체의 마물을 보다가, 뭔가 발견한 듯이 입을 열었다.
“이거, 무슨 종류의 마물이지?”
세베르의 물음에 비올레의 얼굴에 약간의 비웃음이 걸렸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모든 마물의 종류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대답했다.
“크롤프라는 마물입니다, 전하. 북쪽 경계에서 작은 마물을 잡아먹는-.”
“아닌 듯한데.”
“무시무시……네?”
세베르는 피 묻은 장갑을 벗어 자신의 보좌관에게 넘겼다. 곧, 새로운 장갑을 바꿘 낀 그가, 서늘하게 말했다.
“트롤프의 피는, 적금빛이 아닌가?”
“어?”
“이건 그냥 평범한 붉은 색이잖나.”
비올레는 그제야 찬찬히 마물의 잔해를 관찰했다.
확실히 그녀가 알고 있던 트롤프의 잔해와는 조금 달랐다. 게다가 아까 전 공격 패턴도 트롤프라고 하기에는 과할 정도로 민첩했고.
“하지만 이렇게 생긴 마물은 트롤프 외에는 없습니다.”
“개조를 했을 가능성은?”
그 순간 비올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가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 마물을 개조할 수 있는 마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흑마법의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나?”
“……지금 무슨 말씀을.”
비올레는 이미 머리를 감싸 쥐고 포효하고 싶은 생각에 휩싸였다.
‘아니 대체 이 인간들은 어떻게 흑마법을 이렇게 쉽게 입에 올리지? 왜 놀라지도 않는 것이지? 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야?’
“전하, 일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물은 가끔 생장 지역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기도……제 말 듣고 계신가요?”
하나 그때였다.
조용하게 마물을 보고 있던 세베르가 갑자기 시선을 들었다. 그에 비올레가 입을 다물고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시야에 안겨 온 인영에,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저, 저건 누구야?’
우거진 숲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는 엄청난 장신이었다. 그의 어깨에 걸쳐진 코트가 미풍에 하느작거리고 있었고, 길게 석양빛에 드리워진 그림자마저도 이곳에 있는 이들을 전부 와그작 씹어먹을 것 같았다.
조각 같은 얼굴 위에는 무심함 뿐이고, 살짝 흐트러진 은발은 석양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기묘하게 금빛이 섞인 벽안이, 느긋하게 그들을 보고 있었다.
“한발 빨랐군. 켈리어드.”
“당신이 늦은 겁니다.”
세베르는 담담하게 레르하겐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에 뚝뚝 떨어지는 냉랭함은 더욱더 심해져, 본의 아니게 주변에 있던 이들만 고통을 받고 있었다.
비올레는 빠르게 두 사람 사이에서 시선을 옮겼다.
그 켈리어드 대공이 존대를 한다. 누구지?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비올레가 눈을 크게 떴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고, 주신 겔라가 태어났다. 모든 이들의 위에서 군림하사 손길 아래 최초의 생명이 태어났고, 그것은 은빛의 갑주로 온몸을 뒤덮고 혼돈의 색을 뒤덮은 파란 눈동자를 갖고 있는 신물이었다.
‘아카데미 역사책 제1장 제1단!’
“드, 드래곤 로드시여?”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비올레가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외침에 마법사들도 눈치를 챘는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세베르와 레르하겐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세베르는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손에 들린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레르하겐의 시선이 바닥에 두 동강 난 마물에게 닿았다.
“트롤프군.”
“개조당한 겁니다.”
“그건 나도 안다.”
“알면서, 가만히 내버려 두셨습니까?”
“그러는 너는, 알면서 에스트리아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나?”
엄연히 말하자면 알리지 않은 것은 레르하겐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어떻게 에슈트가 알게 되었는지 리건에게서 들은 세베르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글쎄, 내가 꼭 에스트리아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나?”
“그녀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그 신뢰에 내가 무조건 부응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애초에 내 임무는 내 딸을 보호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레르하겐은 그 말을 삼켰다.
“페하께서 들으시면 좋아하시겠습니다.”
누가 봐도 점점 싸늘해지는 분위기에 비올레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뒤에 있는 마법사들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마탑의 마법사들이 최정예라고 하나 눈앞의 이 중 하나는 드래곤 로드였고 하나는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드래곤 슬레이어였다.
두 존재가 서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옆에서 관객이 되는 것은 거절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레르하겐을 앞에 두고 저 대공은 하나도 안 밀리네.“
애초에 영생을 살아온 레르하겐의 분위기야 당연히 압도적일 게 뻔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베르는 그 앞에서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체격적으로나, 분위기적으로나 용호상박인 상황에서, 비올레와 마법사들만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결국 비올레는 마탑의 주인으로서 이 사이에서 약간의 자신의 위엄을 찾기 위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그때, 레르하겐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마물을 만들어서 풀어놓고 있다.”
“압니다. 문제라면 그것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흑마법사겠지. 그것도, 아르시스를 노리고 있는.”
“단서가 있습니까?”
“없다. 아직까지는.”
“그럼.”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
“…….”
“나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
그렇게 말하는 레르하겐의 얼굴에는 거짓도, 농담도,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는 그 여유로움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로 하여금 이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강하게 보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