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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48화 (48/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48화

나는 일리안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계속 나를 응시했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가씨는 정말 잔인하네.”

“네가 잔인한 거지. 대체 누굴 살리고 싶은 거야?”

“글쎄. 비밀.”

사실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네 복수는 네가 그 왕국의 모든 귀족들을 죽이는 순간 끝났어. 너는 그로 인해 더 많은 죽음을 등에 업었고.”

“하지만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걸.”

“그래, 그걸 알면서도 감행한 거 아니야? 아니, 애초에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죽인 거겠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괜히 쓸데없이 이게 무슨 시간 낭비람.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고, 너한테 온 용건이나 말할게. 내일 감사절 축제가 열릴 예정인데, 이블린과 함께 나가기로 했어. 물론 기사들을 몇 데리고 나갈 거지만, 너도 나와.”

“이런, 웬일이야, 그런 데에 나를 끼워 주고?”

“놀라고 데려 나오는 거 아니야. 이 며칠 동안 별로 좋지 않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어, 조사차 나가는 거고, 너는 도구로 써먹을 거니까 알아서 해.”

“하시스도 가나?”

“……아니. 하시스는 데려가지 않을 거야. 원래는 데려가려고 했는데, 계획이 바뀌었어.”

“이런, 내가 같이 나갔다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면 어쩌려고?”

“무슨 일을 저지르면, 내가 당할 줄 알고?”

나는 입술 끝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일리안이 흐음-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곧, 그가 평소와 다름없이 화사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기꺼이 내가 어린 아가씨들을 에스코트하지.”

“넉살 좋기는.”

물론 저 뒤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나는 쯧 혀를 차며 방을 나갔다.

* * *

탁.

문이 닫히자마자 일리안의 얼굴 위로 거짓말같이 미소가 걷혔다. 그는 거칠게 대충 묶었던 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너무 오만한데.’

그가 작게 속으로 읊조렸다. 그러나 얼마나 지났을까.

‘뭐, 나도 마찬가지니까.’

일리안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담겼다.

* * *

이튿날 아침.

환복을 마친 뒤 이제는 셀라의 시중이 익숙해진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곧 빗과 리본 머리 끈을 들고 온 셀라는 한쪽으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나 싶어 거울 너머로 보자, 셀라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혹시 황녀 전하 스스로 머리카락을 다듬으신 적 있으세요?”

“아니. 그럴 리가.”

“아, 머리 길이가 딱히 변한 것 같지 않아서요. 이쯤 되면 앞머리를 손질해야 하는데, 계속 그 기장인 듯해서요.”

“어?”

그러고 보니 아이가 된 뒤 머리카락을 잘라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리 머리카락이나 옷 따위에 신경을 쓰는 성정은 아니라 딱히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셀라가 그리 말하니 확실히 나는 근래에 앞머리를 다듬은 적이 없었다.

‘흑마법의 영향인가?’

그러나 무슨 흑마법이 앞머리까지 관여를 한단 말인가.

“모르겠어. 내가 머리카락이 늦게 자라나 보지.”

“하긴, 그럴 수도 있지요. 아, 오늘은 머리를 다 땋아서 올려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셀라는 다시 내 머리를 다듬는 데에 집중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응시했다.

얼마 전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은데, 갑자기 이상함을 발견해서 그런 것일까, 머릿속으로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만약 흑마법을 풀지 못하면, 나는 어른으로 크게 되나?’

그러나 의문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바로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 버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야.

“어머, 황녀 전하, 조금만 참으세요. 마지막 마무리만 하면…… 아, 됐다.”

내가 머리를 털자 급히 머리 끈을 찾던 셀라가 뿌듯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나는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올린 내 모습을 보다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이제는 이런 꼴도 슬슬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안 돼, 여기에 익숙해지면 어떡해?’

말도 안 돼, 이딴 데에 익숙해지면 그때야말로 끝인 거다.

“놀이방에서 책 볼 거니까 방해하지 마.”

“네, 황녀 전하. 혹시 간식 같은 건 필요하세요?”

“아니. 필요 없어. 배 안 고파.”

그렇게 말하고 나는 방을 나갔다.

곧 얼마나 지났을까, 놀이방의 문을 열자, 익숙한 광경과 함께 하시스의 시큰둥한 얼굴이 비꼈다.

“야, 내가 네 시종이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게?‘

어제 일리안의 방에 다녀온 뒤 나는 하시스에게 전언을 보냈다. 오늘 아침 일찍 놀이방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내가 직접 가도 무방하나, 아무래도 대화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함부로 정원에서 나누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이미 와 놓고는?”

“네가 거절의 기회를 줬냐?”

“그냥 온 김에 투덜거리지 않으면 오죽이나 좋아. 꼭 저렇게 기분 나쁘게 만든다니까.”

“그래서 무슨 일인데?”

기분 나쁘다는 말에 하시스가 쯧 혀를 찼다.

나는 문을 완전히 닫고는 소파로 다가갔다.

하시스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 맞은편에 앉은 뒤, 내가 입을 열었다.

“어제 일리안과 대화를 하면서 이상한 말을 들었어.”

“무슨 이상한 말?”

“아무래도 그 문제의 놈이, 일리안에게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한 것 같아.”

그 순간 하시스의 얼굴에서 짜증이 사라졌다.

그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야. 누군가가, 일리안에게 죽은 사람을 살려 주는 것을 대가로 뭔가를 사주한 것 같아.”

“뭘 사주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기껏해야 나를 죽이라거나, 하는 그런 시답잖은 것이겠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쩌면 이런 식으로 일리안처럼 사주 당한 이가 한둘이 아닐 수도 있단 거야.”

나야 죽은 사람에게 미련이 없고, 설사 미련이 있다고 해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다 쳐도, 사실 죽은 이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것은 평범한 인간에게 꽤나 큰 유혹거리였다.

특히나 그것이 부모나, 형제나, 친우나, 애인이나,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된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을 쉬이 뿌리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지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말이 되게 만드는 게 바로 흑마법이야.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다른 생명을 부활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

“상당히 이기적이잖아?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죽여서, 내가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구하는 거. 그게 바로 흑마법의 후안무치함이지.”

“그래서, 나더러 뭘 하라고?”

“너, 진실을 보는 눈.”

“응.”

“어린아이가 된 내 본질을 볼 수 있으면, 이미 죽었으나 살아있는 것처럼 구는 것도 볼 수 있지 않나?”

“글쎄,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아, 설마.”

“이 며칠 동안, 황궁을 중심으로 혹시 그런 유형의 ‘존재’가 없는지 확인해 줘.”

“야, 설마. 그리고 죽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으면 애초에 내가 아니더라도 다 알아챌 수 있겠지. 우리가 눈이 없냐?”

“내가 마법으로 인형을 만들어 냈는데, 과연 흑마법사들은 그 비슷한 걸 못할까?

하시스는 내 물음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확실히, 다소 끔찍한 일이긴 하나 그로서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하지 못했다.

“황궁만 돌아보면 안 될 텐데.”

“일단, 황궁을 중심으로, 축제가 열리는 곳을 하나하나 살펴. 무조건 잡으라는 것은 아니야. 다만, 혹시라도, 정말 만에 하나 그런 존재가 섞여서 수도에 들어오면.”

“소름 끼치게 끔찍하군.”

“이 세상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하나하나 부활시키면 어마어마한 전력이 될 거야. 난 솔직히 그게 가장 무서워. 그 치들이 노리는 게, 그걸까 봐.”

그리고 다시 살아온 죽은 인간을 대상으로, 과연 사람들이 싸울 수 있을까? 그중에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상상할수록 괴랄하네.’

나는 결국 머리를 털어 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난 그저 정적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어.”

“글쎄. 정적의 소행일 수도 있지. 목적은 제국의 안녕을 파괴해서, 너를 황위로부터 끌어내리는 것?”

“그럼 검을 들도 황궁으로 쳐들어와서 나를 죽이면 되잖아!”

“아니, 왜 죽고 싶다는 말로 들리냐, 이거?”

“그러니까, 무고한 사람들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고.”

죽여도 내가 죽이고, 살려도 내가 살린다. 어떻게 감히 내 땅에서 내 사람을 죽여 나를 칠 생각을 하지? 그럼 내가 더 분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나?

그러나 그런 내 생각과 달리 하시스의 얼굴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그가 살짝 고개를 까닥이며 읊조렸다.

“어쩌면 이런 너를 잘 알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무슨 소리야?”

“아니다. 아무튼 이 며칠 동안 황궁과 수도를 둘러보라는 거지? 하여튼 뭘 시켜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걸 시키는 건지.”

그러면서도 하시스의 얼굴에는 딱히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방을 나가려던 그는,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려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스승님 뵌 적 있냐?”

“어…… 아니?”

그날의 대화 이후로 레르하겐은 거의 황궁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하시스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홀로 중얼거렸다.

“어딜 가신 거지. 여쭐 게 있는데.”

“뭘 여쭐 건데?”

“있어. 그런 게. 넌 몰라도 된다, 꼬맹아. 아, 그리고 축제 잘 놀다 와라.”

“너나 제대로 해, 꼬맹이 같은 게.”

하시스가 그에 피식 웃으면서 방에서 나갔다.

‘그럼 일단 내가 없는 사이 하시스에게 황궁의 안전은 맡긴 셈이고.’

그럼, 나는 어디 한번 ‘축제’나 즐겨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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