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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44화 (44/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44화

그의 벽안은 햇빛 아래서 더욱더 투명해 보였다.

그것은 한 점 흐림 없이 맑은 하늘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끝이 보일 정도로 맑은 호수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눈을 볼 때마다 묘하게 그 눈빛이 얼음장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하나 레르하겐은 엄연히 말하자면 잔인하거나 냉혹한 존재보다는, 그저 무심한 존재였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헤집어 보아도 레르하겐이 척살을 감행했다는 기록은 없었고, 심지어 놀랍게도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와 적이었던 존재는 오직 마족뿐이었다.

분명, 그로서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가 미물 같을 게 분명함에도.

레르하겐은 누가 봐도 강한 존재였고, 아마도 레르하겐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까지 생명을 경시했던 적이 없는 존재 같았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나를 걱정한다고 말한다.

물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애초에 내게 소환당한 순간부터 모든 것은 내게나 큰일이었지 그에게는 그저 작은 일부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걱정해요, 로드님이?”

나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레르하겐을 향해 물었다.

레르하겐은 내 물음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레르하겐이 고개를 돌렸다.

“글쎄.”

그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왜-라는 질문에 그가 내놓는 대답은 언제나 애매한 것이었다.

그때는 그저 그의 여흥거리겠거니, 그저 이득만 취하면 나와 상관없는 문제겠거니 했는데.

“혹시나 해서 묻는데, 예전에 저를 보신 적 있으세요? 그러니까, 제 말은 처음 만난 날 그전에요.”

“없다.”

“진짜 없으세요?”

“없어.”

이번에 들려오는 대답은 꽤나 단호했다.

나는 더더욱 미궁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그가 내게 채찍을 주던 날 그가 했던 대답을 상기했다.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제가 로드님이 아는 분과 꽤 닮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그랬나?”

“기억 안 나는 척하지 마시고요. 무심하신 거지 멍청하신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건가.”

“혹시, 그 아는 분이라는 게, 로드님의 제자 중 한 명인가요?”

나는 며칠 전 하시스와 나눈 대화를 상기했다.

레르하겐의 첫 번째 제자 또한 나처럼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것이 나와 딱히 상관은 없다고 했지만, 혹시 아는가, 나와 그 첫 번째 제자가 나름대로 닮았다거나 하는 이유일지.

레르하겐은 내 물음에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답했다.

“글쎄.”

“……이것도 대답을 해 주시지 않을 건가요?”

“인간은 원래 다르면서도 비슷한 법이지.”

“…….”

“별 의미 없다.”

그렇게 말한 뒤 레르하겐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명백히 나와의 대화를 피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뭐지.’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 보았자 답은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정원을 나갔다.

* * *

정원에서 사라진 레르하겐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다름 아닌 그의 레어였다.

생명의 흔적 하나 보이지 않는 그곳은 웅위하고 아름다우나 딱히 따뜻하지 못했고,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컸으나 정작 그 속에 서 있는 것은 그 혼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집거하여 삶을 이루는 인간이나 타 종족들과 달리 드래곤들은 대부분 제멋대로 혼자만의 장소를 골라 거주했다.

동족 의식 없이 몇백 년에 한 번 만나 누가 죽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전부인 그들의 무심함은, 굳이 말하자면 어느 정도 레르하겐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것은 마족들의 지독한 자기애와는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신이 창조한 첫 번째 종족,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창조된 레르하겐은 그래서 어찌 보면 신과 가장 닮았으면서, 동시에 신과 명백히 구분되는 다른 성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였을까,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신이라고 칭송하나 정작 레르하겐은 제가 그렇게 만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기실 만능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기는 했다.

하나 결국 그것마저도 거짓이고, 기만이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그의 앞에 죽은 이가 있었다.

- 제가 죽으면…….

- …….

- ……슬퍼하지 마세요.

- …….

- 저도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요.

레르하겐은 긴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한때 이곳에 웃음소리가 있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작은 걸음으로 빠르게 가로질러 가던 인영이 언뜻거리던 때가 있었다.

재잘거리면서 심술을 부리던 아이가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에는 과거의 일이었고, 남은 것이라곤 그저 황량한 차가운 바람뿐이었다.

레르하겐은 문득 제 앞에 서 있던 작은 아이를 상기했다.

화려한 금발이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리고, 팔랑거리는 나비 리본이 하느작거린다. 동글동글한 눈매에 고집스럽게 닫힌 입매.

화사한 햇빛 아래서 반짝이던 보랏빛 눈동자. 그 위로 언뜻 겹쳐 보이는 얼굴에 레르하겐이 미간을 모았다.

인간이라는 것은 그렇게나 신기하다. 그 짧은 세월을 사는 대가로, 무한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새롭게 얻은 삶은 다시 시작되고, 또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이…….

“의미 없군.”

그렇게 중얼거린 레르하겐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하기 그지없던 레어에 기척이 들리더니, 이내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금빛 매가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로드시여.]

매의 부름에 레르하겐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고아한 흰색의 장식물 사이로, 청명한 하늘이 비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지.”

[남서 방향, 카르트리에르 숲과 바트리샤 호수가 이어지는 곳. 그곳에 마왕의 수하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이 다섯 죽었고, 그중 흑마법사가 한 명입니다. 요정족에 알려 처리하도록 할까요.]

이어지는 물음에 레르하겐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니. 그건 내가 직접 간다. 그리고 일족에게 알려라. 이틀 사이로 대륙의 북쪽 경계를 넘어오는 모든 마물을 처리하라고.”

[존명.]

그와 동시에 푸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매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서늘한 얼굴의 레르하겐은 레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갑자기 사라져 혹시 내 부탁을 잊은 건 아닐까 하는 우려와 달리 레르하겐은 꽤 빠르게 내 방에 인형을 ‘가져다주었다.’

“황녀 전하, 폐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응. 알고 있어.”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인형의 찻잔에 차를 붓고 있는 셀라를 한번 보고는 그 옆에서 우아하게 앉아 있는 인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인형의 옆으로 다가간 뒤 내 마력을 약간 흘려 넣어 의식을 조종한 ‘내’가 입을 열었다.

>이만 나가 봐도 좋아. 나는 내 딸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에 셀라가 환하게 웃더니 살짝 예를 취하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문은 물론이요 아무도 이 방에 접근을 하지 못하게 차단막을 펼친 뒤 마력으로 소환진을 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잠잠하던 허공에 환한 빛과 함께, 거울을 연상케 하는 흰색의 둥그런 빛무리가 허공에 모이더니 몇 초 뒤, 고요하기 그지없던 빛무리에 갑자기 낯선 풍경이 그대로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아니 진짜 뭐예요! 바빠 죽겠는데 꼭 이렇게 연락을 해야겠어요? 제가 아무리 한때 아르시스 제국 소속이라고 해도 지금은 마탑주인데!”

>아주 배가 불렀구나. 마탑 건물을 새롭게 건축해준 게 누군지 잊은 모양이지?>

“역시 폐하는 만백성을 굽어살피는 태양이십니다. 공무가 바쁘실 텐데 이리 연락까지 해 주시고. 무슨 일이십니까.”

연결이 되자마자 앙칼지게 외치는 여자는 다름 아닌 마탑의 주인인 비올레였다.

내가 즉위한 뒤 아카데미 마법부에서 높은 월급으로 데려온 그녀는, 동시에 내 추천서를 받고 선대 마탑주의 제자로 들어간 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마법사 중에서도 드물게 권력과 재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녀가 그 많은 연륜 있는 마법사를 제치고 최연소 마탑주가 된 이유였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천재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현재의 그녀를 만든 것은 내 공로도 있었기 때문에 비올레는 내 말이라면 본능적으로 굽신거리곤 했다.

물론, 가끔가다가 저렇게 좀 건방지게 굴 때도 있지만.

나는 마력구 너머에 로브를 쓰고 있는 비올레를 보았다. 확실히 바쁘다는 것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녀의 주변으로 마법사들이 빠르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연락했다.>

“대체 무슨……, 어머, 그런데 옆에 계신 꼬마 아가씨는 역시 그 소문의 황녀 전하신가요? 어머, 귀여워라. 어쩜 역시 폐하를 닮아서 너무 품위 넘치시네요.”

그렇게 말하는 비올레의 얼굴에는 누가 봐도 황녀에게 아부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라리 노골적인 그녀의 아부는, 귀족들의 그 마뜩잖은 경계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쁘다고 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저번에 죽음의 협곡에서 폭발이 일어난 뒤로 혹시 그곳으로 가 본 적이 있나?>

‘내’ 말이 끝나자마자 비올레는 깨달았다는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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