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43화
“미안. 그래도 안 돼. 이번 감사절에는 어마마마와 보내기로 했어.”
이블린은 내 말에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 위로 걸린 실망의 기색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내 계획을 접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감사절이 지나면 한 번쯤 외출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내가 말을 덧붙이자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배시시 웃었다.
“네!”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하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것은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재밌는 것인가.
그날 오후, 나는 보고를 하러 온 리건이 가져온 소식에 머리를 싸맸다.
“뭐라고? 이번 감사절에 모든 마법사들이 출근할 거라고? 심지어 그동안 타지에 있었던 마법사까지?”
“네, 저희 황실뿐만 아니라 타 왕실에도 다 알림이 왔습니다. 덕분에 저희 황실에 파견되어 있던 몇몇 마법사들도 어제 마탑으로 복귀했고요. 심지어 그 복귀 승낙서에 직접 사인도 해 주시지 않으셨잖습니까.”
“마탑에서 소환한다기에 그냥 걔네들만 그런 줄 알았지. 게다가 감사절이잖아. 그때 근무를 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하긴, 마법사들은 평일에도 출근을 안 하기로 유명한 족속들이니.”
“아니 그런데 망할. 왜 하필 이번 감사절이야!”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인형이랑 마탑으로 가려고 했다고. 평소에는 마법사들이 드글드글하니까 이번 감사절을 노린 건데.”
“아, 그런 거라면 그냥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공식적으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번 마탑에서 비상사태에 돌입해서 애초에 외부의 손님도 맞이할 여력이 없다고 합니다.”
“비상사태?”
나는 머리를 쥐어뜯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리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이거……안 그래도 이따가 보고를 드리려고 했는데, 카르트리에르 숲에서 마물로 추정되는 생명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확실하게 마물인지, 어떤 종류의 마물인지 확인되지 않아 숨기고 있지만 말이죠.”
“잠깐, 카르트리에르 숲이면 아르시스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
“네. 덕분에 카르트리에르 숲이 있는 벨로엠 왕국도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왕실에서는 어떻게든 덮으려고 쉬쉬하고 있지만, 아시잖습니까, 벨로엠 왕국에 보낸 이들이 암암리에 보고가 왔습니다.”
아마도 내가 즉위를 하고 왕실에 보낸 첩자들이 알렸겠지. 인접국의 안위는 아르시스에도 큰 영향을 미치니까.
“어쩐지 마탑이 갑자기 추가 근무를 하게 된 것도 이것과 상관이 있을 것 같은데.”
“마물이라. 북쪽에 있는 죽음의 울타리 너머에서만 살던 마물들이, 왜 갑자기 북쪽 지역도 아니고 대륙의 중앙에서 발견된 것이지?”
“그거야 저도 모르죠.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만약 그게 진짜로 마물이라면.”
“아르시스도 위험하겠네.”
다시 진정을 되찾은 내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카르트리에르 숲은 아르시스와 완전히 인접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꽤 가까운 편이었다.
아직은 아르시스 국경 내에서 발견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발견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흑마법의 출몰에 이어서 마물이라. 연관을 짓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되는군.’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벨로엠 왕국으로 쳐들어가서 조사를 하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마탑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그들로서도 분명 이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는 뜻이고.
“비올레에게 연락해야겠어.”
“마탑주께요? 이미 충분히 정신이 없을 텐데.”
“정신이 없으면 뭐, 내가 그런 배려까지 해 줘야 하나?”
어차피 비올레가 마탑주가 된 것도 내 추천이 있어서였다.
그녀의 오늘을 만들어 준 것은 나였고, 그 사실을 비올레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웬만해서 내 말을 거역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건방지게 반항하는 시늉은 좀 했지만 내가 어디 그런 걸 신경 쓰던가.
“마탑으로 안 가는 것만으로도 내 배려야.”
“하지만, 지금 이 모습으로 어떻게 연락을 취하신단 말입니까.”
“인형이 있잖아. 비올레가 천재인 건 맞지만 통신 마법을 통해서까지 인형을 알아볼 정도는 아니야. 그것도 레르하겐의 힘을 빌리면.”
“이쯤 되면 레르하겐 님은 그냥 폐하께 이용당하시려고 소환당한 느낌인데요.”
“당연하지. 이용하지도 못할 거 내가 왜 소환해?”
“역시 폐하이십니다.”
나는 리건의 말에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감사절 기간에 내가 일거리를 만들기를 누구보다도 고대한다는 말로 들리네. 그러기를 바라?”
“아니요. 이번 감사절에는 델멘 공작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리건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일부러 평소에도 수도에 따로 타운하우스를 구해 사는 녀석이 어쩌다가 집에?
내가 생각하는데, 리건이 대수롭지 않은 듯 안경을 쓱 올리며 읊조렸다.
“누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아이리스가? 델멘 공작가와 파스트 상회 간의 분쟁으로 플로리스로 가지 않았나? 벌써 해결했어?”
“누님이야, 언제나 그랬으니까요. 우수한 후계자였죠.”
그렇게 말하는 리건의 눈빛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너도 천재잖아.”
“아버님이 탐탁지 않아 하는 방향으로 말이죠.”
“델멘 공작이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중요한 건, 너는 천재이고, 내 보좌관이라는 거야.”
오만한 내 말에 리건이 눈썹을 까닥였다. 그러나 곧, 그가 펼친 서류철을 닫으며 말했다.
“마탑에 소식을 취하겠습니다.”
“그래. 내일 중으로 연락을 할 테니, 받지 않으면 마탑을 폭발시켜 버린다고 말해. 알겠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허리를 숙이고 방을 나가려던 리건은 내 말에 멈칫했다.
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감사절에 외출을 할 거야.”
“갑자기 외출을 하신다고요? 누구와?”
“이블린 애들러와. 물론 둘만 나갈 건 아니니 걱정 마.”
“애들러 후작 영애와 함께 외출을 하신다고요? 폐하께서?”
“그럼 어떡해? 축제에 가고 싶다잖아.”
리건은 내 말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그가 태연자약하게,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은은한 미소가 배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 새삼 생각하는데, 그냥 아이로 계셔도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닥쳐. 내가 어른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너까지 아이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리건은 내 성정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얌전하게 입을 닫고 나갔다.
탁.
곧 나는 굳게 닫힌 문을 힐긋 보고 다시 내 손에 들린 서류를 보았다.
‘마물이 나왔다라.’
비록 리건에게는 알리지 않았지만, 사실 내가 갑자기 축제일에 나가 보기로 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축제일이 곧 다가오는데 아르시스의 인접국에서 마물이 나타나다니, 왠지 모르게 경고 같다는 느낌이 들어.’
기왕이면 내 억측이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죽음의 협곡, 벨로엠의 숲, 그다음 순서는-.
‘아르시스 제국이 될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야.’
애초에 제국 또한 축제일 기간에는 변방의 경계를 강화하거나, 특별히 황실 기사단에게 황궁 밖의 경비를 맡기는 등 안전에 유난히 신경을 쓰곤 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는 번잡하기 마련이었고, 그런 장소일수록 일을 벌이기에 적당하니까.
‘어차피 이블린을 데리고 나가기로 했으니까, 이 기회에 한 번 수도의 분위기를 돌아보는 것도 상관은 없겠지.’
그저 내 우려였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펜을 들었다.
* * *
이튿날, 나는 마탑에서 온 답장을 받고 레르하겐을 찾아갔다.
“오늘 오후 두 시에 마탑주와 통신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인형 좀 만들어 주세요.”
“…….”
그에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누워있던 레르하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탑주?”
“네. 원래 이번 축제일에 마탑을 방문하려고 했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연락이라도 하려고요.”
“카르트리에르 숲에서 발견된 마물 때문에 그러나?”
“어? 알고 있었어요?”
엄격히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부분은 간단히 생략한 채 내가 놀라운 얼굴을 했다.
“이 며칠 동안 황궁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않은 듯한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알게 된다.”
레르하겐의 성의 따위 없는 대답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여튼!’
“어쨌든 인형, 만들어 주실 거죠?”
“그래.”
레르하겐의 승낙이 떨어지자 내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쨌든 쓸모 있는 건 알차게 써먹어야 하는 게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하며 정원을 나가려는데, 갑자기 드물게 레르하겐이 나를 불러세웠다.
“마탑에 연락해서 뭘 하려는 거지?”
“죽음의 협곡에 관련된 소식도 묻고, 근래에 마물이 나온 일도 물어보려고요.”
“죽음의 협곡에 가려고 그러나?”
“말도 안 돼요.”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나는 죽음의 협곡에 단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라면, 그곳은 한때 마족의 근거지였던 것만큼 개방된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저 마법 실력 하나만 믿고 접근을 하기에는 위험한 곳이었다.
“제가 직접 갈 거였으면 애초에 마탑 쪽에 정보를 캐지도 않았겠죠.”
“그렇군.”
“왜요, 제가 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시나요?”
나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물론 나는 그것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진짜 아빠도 아닌데 뭐 걱정을 해.’
심지어 내 진짜 아빠도 안 할 걱정이었다.
내 아마마마는 내가 죽음의 협곡으로 가겠다고 하면 잘 죽으라고 마차까지 붙여 줄 인간이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그런 내 생각과 달리 레르하겐의 벽안이 천천히 나를 향하더니, 이내 정원에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