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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42화 (42/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42화

나와 핏줄이 이어진 대부분 이들이 내 손에 죽었으니, 어찌 보면 다소 가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핏줄로 이어진 애정과 황위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글쎄, 모르겠다.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황위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내가 맞다 확신하는 것과 별개로, 섣불리 하나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때, 하시스가 입을 열었다.

“혈연이라는 건 참 신기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나 스승님한테 살쾡이처럼 달려들던 너를 이렇게 얌전히 만들어 놓다니.”

“살쾡이?”

나는 그의 미친 비유에 입을 딱 벌렸다. 감히 아르시스 제국의 황제를 살쾡이에 비유하다니.

“로드님 앞에서 살쾡이 취급은 그렇다 쳐도 너한테 그렇게 보일 이유는 없어.”

“본인에 대한 평가가 너무 후한 거 아닌가? 스승님 앞에서 너는 살쾡이보다는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다.”

“그러는 넌 뭐가 다른 줄 알아? 내가 어른으로 돌아가는 즉시 너는 내게 경배하게 될 거야.”

“흐음. 과연?”

그래, 어른인 내가 참자.

내가 왜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아이의 도발에 휘말려 들지? 나는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니잖아,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발을 들어 하시스의 발등을 콱 찍었다.

“으윽, 스읍, 야 너!”

“살쾡이한테 밟힌 소감이 어때?”

나는 그리 말하며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온 힘을 다해 밟은 터라 하시스는 진짜로 아픈 듯했다.

“아, 진짜. 저 성질머리 진짜!”

“그러게 알면서 왜 자꾸 건드려? 내 자비는 여기까지야. 더 건방지게 굴면 죽여 버리겠어.”

물론 내가 미쳤다고 로드의 제자를 죽이겠냐마는, 그리고 내가 겨우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일 일이 있겠냐마는 어쨌든 진심은 진심이었다.

곧 나는 발을 부여잡고 뛰고 있는 하시스를 힐끔 보다가 다시 엘비어츠 공작이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건강 악화라니. 갑자기 무슨 일이지?’

물론 세월의 흐름에 인간이 늙고 병드는 것이야 이상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내 친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속이 상했다.

나는 입매를 살짝 굳혔다.

‘한 번 자세하게 검진을 받아 보라고 하는 것이 좋겠어.’

나는 엘비어츠 공작이 내 옆은 아니더라도 오래오래 이 땅의 어느 곳에서 살아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 * *

필요 없다고 쐐기를 박은 것이 무색하게 이튿날 엘비어츠 공작은 한 무더기 선물을 보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라면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선물은 대부분 ‘정상적’이라는 것이었다.

“우아, 예뻐요.”

때마침 내 놀이 상대라는 명목으로 애들러 후작을 따라 황궁으로 들어온 이블린은, 내 앞에 즐비하게 늘어놓은 온갖 장신구와 인형을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녀의 시선이 중앙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검은색 리본 장식에 머물다가, 다시 그 옆에 있는 인형에 닿았다.

“너무너무 근사해요. 엘비어츠 공작께서 진짜로 황녀 전하를 엄청 엄청 사랑하시나 봐요.”

“너는 후작 영애면서 대체 왜 이렇게 식견이 좁은 티를 내? 이런 보석은 집에 굴러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제가 아직 어려서……, 부모님께서 사 주지 않으세요.”

“거짓말. 마그릿이 빼앗아 간 거지?”

그래도 몇 번 딸을 데리러 올 때의 태도를 보건대 애들러 후작은 비록 첫째 딸을 더 편애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둘째 딸을 학대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블린도 종종 지나가듯이 애들러 후작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할 때 나누던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나 정도 취급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이블린이 입고 있는 옷이나 구두는 누가 봐도 상당히 고급품이었다.

그렇다면, 이블린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역시 마그릿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부모의 책임이 없다고는 하지 못하나, 어쨌든 마그릿의 입장에서 그녀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것은 언니의 직접적인 행동이었다.

“언니가 맨날 빼앗지? 옷이랑 구두는 사이즈가 안 맞아서 못 빼앗지만, 이런 장신구는 빼앗아서 쓸 수 있으니까.”

내 추측이 맞았는지, 이블린이 움찔하다가 살짝 어깨를 움츠러들었다.

그에 내가 마뜩잖은 얼굴을 했다.

이블린이 작게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최근에는 안 그래요.”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겁을 줬는데, 심지어 동생이 황녀의 놀이 상대가 되었다.

아버지가 동생의 가치를 어떻게든 알아보았다는 것을 의미하니, 마그릿으로서는 당분간 몸을 사리고 싶을 것이다.

곧 나는 내 앞에 있는 장신구 중 하얀색 레이스가 겹겹이 달린 꽃 모양의 리본 장식을 들어 이블린에게 내밀었다.

이블린이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저, 저 필요 없어요.”

“답례야. 저번에 나한테 인형 준 답례.”

“하지만 이건 너무 귀한데요!”

“그 인형이 싸구려가 아니라고 한 건 너였어. 왜, 아니야? 역시 싸구려지?”

“그럴 리가요! 다만, 이렇게 비싼 보석이 달린 거랑은 비교를 할 수가 없는데.”

이블린은 고개를 세차게 젓더니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리본을 억지로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냥 주는 거 아니야. 이제 마그릿이 이걸 빼앗으려고 하면, 한동안 리본 같은 거 못 달게 걔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뽑아버려.”

“네, 네?”

“괜찮아. 우리는 어리니까 별로 안 혼날 거야. 오히려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는 건 마그릿일걸?”

왠지 모르게 아이한테 나쁜 걸 가르치는 느낌이지만 원래 내 새끼가 때릴지언정 맞고 다니는 걸 원치 않은 것은 부모 마음 아니던가.

물론 나는 이블린의 부모는 아니지만, 어른으로서 그녀에게 최소한의 방어를 가르쳐야 했다.

이블린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세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봤자 딱히 저 성정에 그런 짓을 할 거 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셀라를 불러 이것들을 전부 정리하라고 명했다.

셀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시녀 몇몇과 함께 선물들을 들고 나갔다.

곧 온실에는 나와 이블린만 남았다.

어차피 놀이 상대라고 해도 이블린은 그리 활발하게 뛰어노는 성정이 아니고, 나 또한 딱히 활발한 모습을 꾸며낼 생각은 없었기에 온실은 바로 정적으로 가득 찼다.

이블린은 내가 테이블 앞에 앉자 덩달아 내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나저나.”

곧 천천히 찻잔을 든 내가 입을 뗐다.

“애들러 후작은 요즘 뭐해?”

이블린은 내 물음에 눈을 깜박거렸다.

너무 티가 나는 물음이었나 싶었다가, 생각해 보니 애들러 후작도 어차피 이블린에게 같은 걸 물어볼 것 같아 나는 그냥 천역덕스럽게 눈을 깜박거렸다.

다행히도 이블린은 딱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녀는 황녀라는 지위를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것으로 생각해 마치 내가 바로 국정에 관여라도 하는 듯 나를 우러러보곤 했다.

“아버님은 요즘 많이 바쁘세요.”

아주 그냥 온 세상의 공무는 다 자기가 하지.

이블린의 앞에서 아버지의 흉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곧 내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나를 빤히 보던 이블린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나를 향해 물었다.

“저…… 그런데, 황녀 전하.”

“왜?”

“이제 곧 감사절인데, 황궁에서는 파티를 열지 않나요? 시내에서는 감사절 사흘 동안 축제가 열린다고 하던데요.”

아, 그러고 보니 곧 감사절인가. 여름도 이제 다 가고 곧 가을이었다. 수확의 계절에 감사절이 열리는 것쯤이야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아니. 나…… 어마마마는 시답잖은 축제로 파티 같은 거 열지 않아. 돈 아깝다고.”

이것은 진심이었다. 심지어 황실의 공식적인 파티는 대체로 국세로 진행이 된다.

무슨 미친 짓을 해도 세금으로 귀족들 입에 빵 한 쪼가리 넣어 주는 짓을 할 수는 없지.

“감사절에는 그냥 가족들끼리 보내는 게 관례야. 나도 그럴 예정이고. 귀족들에게도 그리 전할 거야, 어마마마가.”

물론 우리가 진짜로 오순도순 앉아서 식사를 할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러나 이블린은 무슨 일인지 내 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누가 봐도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래?”

“아니에요.”

“생각이 있으면 바로 말하는 게 예의야. 왜 그래?”

이블린은 내 질문에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나는 찻잔 너머로 그녀를 힐긋 보고는 차분히 답을 기다렸다.

“혹시, 축제에 나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순간 나는 그녀가 할 말을 바로 눈치채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블린이 기대 섞인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혹시 저와 함께 축제에 나가 보지 않으시겠어요?”

그럼 그렇지.

어쩐지 갑자기 감사절 이야기를 꺼낸다 했다.

그런 이블린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번 감사절은 물론이요 예전에도 나는 감사절에 별 관심이 없었다.

‘가족들과 단란하게 모여 앉아 있는 축제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굳이 내가 보내야 하는 날이 있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귀환일 따위가 아닐까.

“미안하지만 난 축제에 별로 관심 없어. 그리고 말했잖아, 가족들과 보낼 거라고.”

“축제는 사흘 동안 열려요!”

내 눈치를 봤던 주제에 이블린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만큼 나가 보고 싶다는 것일까.

귀족가의 고귀한 영애께서 무슨 평민들의 축제를 즐기나 싶지만, 이블린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기는 했다.

‘감사절 기간에는 마탑에 잠시 다녀오려고 했는데.’

비록 흑마법이 사라진 지 오래전이라지만, 어쨌든 마탑은 마법사들의 온상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평소에는 실력 좋은 마법사들이 북적거려 만에 하나의 상황 때문에 접근을 꺼렸지만, 감사절이라면 대부분 마법사들은 집으로 돌아가거나 마탑으로 출근을 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마탑에 있는 자료를 뒤져 보려고 했는데.’

이블린의 표정을 다소 애처로웠지만 나는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이 딱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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