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41화
기실 나는 황위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결국 그들과 함께 황궁을 피바다로 물들였고, 황제가 되었다.
그렇게 내가 즉위한 지 3년째, 원로원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다시 다져 나가던 엘비어츠 공작은 갑자기 귀농을 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영지로 내려갔다.
그런 그가 다시 수도로 올라온 것이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조금 애매한 얼굴로 누가 봐도 기쁜 표정을 짓고 있는 엘비어츠 공작을 응시했다.
갑자기 정원에 쳐들어와 이미 온갖 ‘무례’를 저지른 주제에 엘비어츠 공작은 제법 정상적인 태도로 내게 예를 취하고 있었다.
“제가 그만 결례를 범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너무 깜찍하고 사랑스럽고 귀여우셔서 그만 제가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
나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엘비어츠 공작을 응시했다.
그의 손을 잡은 뒤 마치 그동안 아바마마의 눈치를 보면서 내게 못 해 준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엘비어츠 공작은 내게 과한 관심과 애정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변화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인간은 원래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이제는 오히려 그가 어떻게 나올지 대충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엘비어츠 공작의 과한 ‘애정’에 익숙해졌다.
물론,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폐하와 똑 닮으실 줄이야.”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세상에, 제 어미를 닮아서 상냥한 데다가 붙임성이 좋기까지! 어떻게 이렇게 저와 똑같은 예쁜 애를 낳았지?”
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냉큼 말을 놓는 엘비어츠 공작에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더 어이없는 것은, 예전부터 일관성 있게 나와 가장 상관이 없는 단어로 나를 묘사하는 그의 기가 막힌 행동이었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나름대로 그의 진심이라는 사실이었다.
‘상냥, 붙임성……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본 거지? 다른 사람이라면 아부겠거니 하겠지만 외할아버지는 그럴 필요가 없잖아.’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내 외할아버지를 응시했다.
비록 일흔을 훨씬 넘긴 나이였으나 젊은 시절 전장에서 구른 것을 증명하듯 여전히 그의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요즘 젊은이들과 달리 이 따뜻한 날에 외투까지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의 외형은 그야말로 아르시스의 노귀족의 품위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겉모습과 달리 엘비어츠 공작은 누가 봐도 기뻐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는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나는 엘비어츠 공작의 어깨 너머로 멀리 서 있는 하시스와 셀라를 힐끔 보았다.
영문도 모른 채 흐뭇하게 서 있는 셀라와 달리 하시스의 표정에는 묘하게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에 괜히 창피해서 나는 다시 엘비어츠 공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엘비어츠 공작을 쫓아내든가 하시스를 쫓아내든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아마 수치스러워서 한동안 하시스를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말을 고르다가 엘비어츠 공작에게 물었다.
“저, 그런데 저를 보러 오신 건가요?”
“아, 아니다. 폐하를 뵈러 왔어. 그런데 이럴 수가, 네가 정원에 있는 게 아니냐. 요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너였더구나.”
젠장!
“저기서부터 오는데 너무 눈이 부셔서 나는 하늘과 땅이 바뀐 줄 알았단다.”
아, 불길해.
“그런데 가까이 와 보니 태양이 아니라 우리 에슈트더구나.”
……살려 줘.
사람이 어떻게, 단 세 구절로 이렇게 나를 소름 돋게 만들 수 있지?
그 와중에 엘비어츠 공작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한 점의 부끄러움이나 수치스러움이 없었다.
당연히 그가 느껴야 할 소름까지 고스란히 떠안게 된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리고 곧, 나는 참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 안 하시면 안 되나요? 너무 부끄러워요.”
“하지만 이 할아비는 진심인걸.”
“네, 진심인 걸 알아서 더 부끄러워요.”
“이 할아비는 우리 에슈트가 진짜로 세상에서 가장 귀엽다. 원래는 폐하가 가장 귀여웠는데, 지금은 네가 가장 귀엽다.”
그렇게 말하며 엘비어츠 공작이 허허 웃었다.
나는 그의 주름진 눈가를 보며 떨떠름하게 웃었다.
기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의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부를 들으면 혐오스러움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엘비어츠 공작이지 않은가, 그는 이 세상에서 나와 피가 이어진 유일한 존재였고, 동시에 지금까지 내 뒤에 있어 준 유일한 핏줄이었다.
그 사실이 다른 이들에게는 별거 아니라도 나한테는 꽤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을 했다.
그때,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서 살았다고?”
“네. 제 이복오빠들과 함께 아빠의 레어에서 살았어요.”
이제는 이 정도의 거짓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
그에 엘비어츠 공작이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끄덕했다.
“역시 에스트리아다. 훌륭한 선택을 했군.”
“그런가요?”
“그래, 네 어미는 언제나 홀로 이 황궁에서 싸워 왔지. 너를 바로 황궁으로 데려왔다가는 어떤 위험에 처할지 모르니 그런 선택을 한 것 같군.”
“…….”
“원래라면 내가 도와줘야 하는데, 몇 년 전부터 나도 건강이 악화되다 보니.”
그렇게 말한 엘비어츠 공작이 난감하게 웃었다.
건강 악화?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그동안 엘비어츠 공작의 병세에 대해서 딱히 전언도 보고도 없었는데. 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디 편찮으신가요?”
“이럴 수가, 우리 에슈트가 이 할아비를 걱정해 주는 것이냐?”
“아니, 당연히…….”
“괜찮다, 괜찮아. 이렇게 건강하게 우리 에슈트를 만나러 오지 않았느냐. 그저 늙은이가 나이를 먹으니 자연스레 이렇게 된 것이지. 네 어미한테는 비밀이다.”
이미 알았는데.
“네 어미가 알면 걱정한다. 그리고 진짜로 별것 아니야.”
나는 조금 착잡한 얼굴을 했다.
그가 영지로 내려간 뒤 몇 년 동안 그의 신병을 내가 살피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한데 건강이 안 좋았다니.
은근히 걱정하는 나를 눈치챈 걸까, 엘비어츠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아, 이런. 에스트리아가 기다리겠군. 우리 에슈트, 이 할아비와 나눈 비밀을 잘 지킬 수 있지?”
“하. 알겠어요.”
어차피 에스트리아가 나고 내가 에스트리아인 상황에서 그의 비밀은 이미 드러났지만. 나는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착하기도 하지.”
말을 마친 엘비어츠 공작이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그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내 새끼, 이렇게 처음 만났는데 이 할아비가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구나.”
선물이라는 말에 조금이나마 그를 걱정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다시 그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할까 하는 불안감에 바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선물! 필요 없어요!”
나는 드물게 한 자 한 자 강조하며 그에게 어필했다.
누가 보면 어른의 호의를 이렇게 무시할 이유가 있나 싶기도 하겠지만, 그가 그동안 ‘에스트리아’에게 무슨 선물을 했는지 알면 이런 내 반응이 이상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는 내 얼굴을 본떠 금으로 만든 조각상 같은 거 받기 싫어!’
보자마자 바로 마력으로 가루로 만들었던 조각상을 상기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놀랍게도 내가 즉위한 뒤 처음으로 받았던 그 선물은 그렇게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심지어 처음 만난 손주니 어떤 짓을 할지 몰라. 인형 같은 거면 그나마 낫지. 또 조각상 같은 걸 만들어 오는 거 아니야?’
나는 누구보다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께서 다 잘해 주세요!”
“그래도, 이 할아비가 주는 선물은 다르지 않느냐.”
“아니에요! 저는 다 있어요! 아주 이상한 것도 있어요! 진짜 필요 없어요!”
“우리 에슈트, 그것이 걱정이었더냐? 이 할아비가 이상한 선물을 해 올까 봐? 어미에게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 할아비를 너무 믿지 못하는구나. 내가 설마하니 그런 선물을 할까.”
아니, 할 거 같은데.
엘비어츠 공작의 기준이 보통 사람과 너무 다르잖아!
“그래도 싫어요! 혹시라도, 혹시라도 이상한 거 하시면.”
나는 진지하게 어떻게 해야 엘비어츠 공작의 손을 묶을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러다 큰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평생 외증조할아버지를 보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아세요!”
“크윽, 이, 이럴 수가……!”
그 순간 엘비어츠 공작이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과장된 행동에 나는 내 공격이 먹혔음을 깨달았다.
겨우 이런 공격이 먹힌다는 사실이 다소 어이없긴 하지만 어쨌든 먹힌 것은 사실.
결국 선물을 갖고 오기만 하면 어마마마한테 비밀을 폭로해 버릴 거라고 엄포를 놓는 나로 인해, 엘비어츠 공작은 힘없이 손을 흔들며 정원에서 사라졌다.
“이야. 한 편의 연극이 따로 없-.”
“닥쳐,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입을 다물어. 나도 수치스러우니까.”
“난 수치스럽다는 말은 안 했어. 네가 말한 거다?”
엘비어츠 공작이 정원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하시스가 내게 다가왔다.
셀라는 나를 위해 준비한 우유가 식었다면서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내 옆으로 다가온 하시스를 향해 나는 아까 전의 광경을 발설할 시 바로 너를 죽여 버리겠다는 얼굴을 했다.
물론 하시스는 전혀 내 말을 듣는 얼굴이 아니었다.
“외할아버지와 사이가 좋은 줄은 예상 못 했네.”
“안 좋을 이유가 없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좋았냐?”
“딱히. 어렸을 때는 거의 본 적이 없어. 황위에 오르려고 손을 잡은 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야.”
“손을 잡았다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내게 남은 유일한 혈연이니까.”
물론 그 ‘유일함’을 만든 사람도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