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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40화 (40/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40화

이블린은 어른들의 복잡한 이익 관계는 아예 모르고 그저 순진하게 아버지가 친구를 마련해 주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겠지.

다만.

‘뭐, 내게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귀족가와 아예 연을 끊고 살 것도 아니고, 이 정도 어린 스파이 정도야 곁에 두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게다가 혹시 아는가, 역으로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지.

어차피 귀족가의 놀이 상대는 오는 시간이 다 정해져 있었고, 그때만 대화를 조심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과하게 좋아하는 이블린을 보며 웃었다.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 * *

그 뒤로 이블린은 주기적으로 황궁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의문을 품던 하시스는, 이블린이 내 놀이 상대가 된 경위를 전해 듣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아이가 진짜로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다고 봐?”

“아니. 진짜로 아비가 물어보면 당연히 황녀와의 약속이고 뭐고 다 불겠지. 무슨 비밀을 지키겠어?”

“그런데 그런 애를 놀이 상대로 받아들였냐?”

“그거야 그쪽에서 쓸모가 있는 것만큼, 나한테도 쓸모가 있으니까.”

“진짜 그게 다야?”

“무슨 소리야?”

“그냥 걔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니냐고, 친구로서.”

“미쳤어?”

하시스의 말에 오랜만에 후원에서 마력 무기를 컨트롤하는 훈련을 하다 얼굴을 팍 찡그렸다.

나는 채찍을 그대로 거둬들이고 하시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하시스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리고 내게 물었다.

“왜, 아니냐?”

“걔 일곱 살이랬어.”

“그래서? 친구가 되는 데 나이 차이가 크게 문제가 되나? 그리고 어차피 너도 별반 다를 바 없어.”

“하, 오늘따라 왜 이렇게 건방지지? 마침 로드님도 없는데, 한 번 붙어 볼래?”

“스승님이 있을 때는 뭐, 자제했었냐?”

“됐고, 검 뽑아. 실력 좀 보게.”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채찍을 꺼냈다.

하시스가 자신의 검에 손을 댔다.

곧 투명한 검신이 공기 속에 드러났다. 홀릴 듯이 아름다운 검신을 보던 내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이 검은 어디서 난 거야?”

“스승님이 주신 거다.”

“어쩐지, 인간의 솜씨로 만들 만한 것이 아닌데. 생각보다 로드님이 꽤 무기를 많이 만드시나 봐?”

“아니. 스승님은 무기에 별로 관심이 없어. 애초에 너무 강해서 무기라는 것을 쓰실 분이 아니다.”

“그럼 내 채찍은…….”

“그러니까 신기하다는 거지. 나야 제자니까 그렇다 쳐도 너한테 본인의 마력을 집중시켜서 만든 채찍을 넘기다니, 나도 놀랐어. 심지어 내 무기도 그분의 마력을 담은 건 아니야.”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지 않나? 로드님은 마력이 많으시잖아.”

“하지만 무한대는 아니지. 그저 무한에 가까운 것일 뿐.”

“…….”

“스승님은 너한테 본인의 마력을 떼어 주신 거다.”

하시스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사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직접적으로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내 손에 이 채찍을 쥐여 주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그가 그만큼의 마력을 떼어 내게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실력에 이 정도 마력을 사라진다고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혹시 로드님이 왜 내 소환에 응했는지 알아?”

결국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목소리를 깔았다. 하시스가 흐음- 길게 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나도 물어봤는데,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 애초에 말이 많은 분이 아니니까.”

“그래?”

“하지만 아주 예전에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어.”

“비슷한 상황?”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하니 또 누군가가 어린아이가 되었고 그래서 레르하겐을 소환한 적이 있다고?

이런 황당한 시나리오를 겪은 인간이 또 있어?

그렇게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는데, 하시스가 말했다.

“스승님은 누군가의 요구나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야. 다른 말로 하자면, 스승님이 누군가를 제자로 들이는 과정의 모든 결정권은 스승님께 있어. 나도 그랬고.”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하지만 유일하게 딱 한 사람만은, 스승님이 먼저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들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계약을 통해서라고 들었지.”

“그게 누군데?”

“스승님의 첫 번째 제자.”

“…….”

“나도 얼추 드래곤 레어에 있을 때 전해 들은 거라서 정확하지는 않아.”

나는 조금 신기한 얼굴을 했다. 드래곤 로드의 첫 번째 제자라.

못해도 몇만 년, 몇천 년은 되었을 것 같은데. 과연 어떤 내막이 있을까?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

“없어.”

“…….”

“내가 언제 상관있다고 했냐? 그냥 비슷하다고만 했지.”

나는 하시스의 말에 방긋 웃었다. 그리고 바로 채찍을 소환해 낸 뒤, 가볍게 휘둘렀다.

철썩-!

이제는 마력과의 융합도 잘되어 그런지 컨트롤이 상당히 쉬웠다.

갑자기 날아온 채찍 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하시스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잘 받아. 오늘 너와 결판을 내고 말 테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바로 마력을 채찍으로 흘려보냈다. 곧 하시스와 치열한 교전을 벌이려는데.

“황녀 전하!”

갑자기 멀리서 들려오는 셀라의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멈췄다.

그에 내 공격을 막으려 검을 휘두르던 하시스가 급히 자신의 검을 거둬들였다.

“아니 너는 좀 예고를 하고…….”

“무슨 일이야?”

나는 하시스의 외침을 가볍게 무시하고 셀라를 향해 물었다.

하나 셀라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 갑자기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에슈트! 내 새끼!”

그와 동시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익숙하고도 난리 법석인 등장을 나는 알았다.

어디 알고 있다 뿐인가, 심지어 익숙하기도 했다.

나는 후원을 가로질러 오는 진중한, 정확히는 겉보기에만 더없이 진중한 모습을 하고 있는 노인을 보고 어색한 얼굴을 했다.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정말이지 내 외손녀와 똑 닮았구나! 똑 닮았어!”

로벤 엘비어츠, 내 외할아버지이자 엘비어츠 공작가의 가주였다.

하, 피곤해지겠네.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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