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9화
일리안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이 왜 갑자기 나를 찾아와서 이딴 말을 하는지.
그러나 단번에 내 과거의 가장 큰 약점을 찾아내 찔러 대는 그의 행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네가 갑자기 뜬금없이 이딴 헛소리를 할 리는 없고…… 누가 네게 무슨 소리라도 했나? 언제? 아까 애들러 후작저에서?”
“아니.”
“그럼 누구야? 네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일리안은 내 질문에 느긋하게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에게 나를 보낸 그 사람이 나한테 알려 줬어. 아가씨가,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부모까지 죽였다고.”
“……!”
그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하…….”
일리안은 나를 계속해서 빤히 응시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갑자기 내 불우한 과거에 대해서 사사건건 캐묻고 싶어? 내가 부모를 진짜로 죽였는지 죽이지 않았는지 확인하면 무슨 이득이 있는데?”
“그냥.”
“그냥?”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알려 주는 거야.”
“…….”
“그냥.”
말을 마친 일리안이 싱긋 웃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굳이 그를 잡지는 않았다.
탁.
문이 닫히고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누구지? 왜 그딴 걸 녀석에게…… 제 가족을 전부 죽인 악독한 녀석이라고 해서 일리안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려고?’
물론 그런 것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뭐야, 이 찜찜함은.’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 같았다.
* * *
에슈트의 방에서 나온 뒤 일리안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사과해.
일리안은 저도 모르게 오늘 오전 정원에서 단호하게 내뱉던 그 작은 뒷모습을 떠올렸다.
황녀라는 이름을 이용하면 내릴 수 있는 무수한 처벌 중 정작 에슈트가 선택한 것은 가장 약소한 방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치열하게 살아온 황녀가 선택한 처벌.
사과해.
진심으로.
그 뒤에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으나 일리안은 알 수 있었다.
인간사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쯤이야 그도 알고 있었으므로, 솔직히 말하자면 그 또한 제가 당한 것이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과만 하면, 제 죄를 빌면 그래도 용서해 줄 의향이 있었는데.
하면, 그렇게 망쳐 버리진 않았을 텐데.
‘변명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일리안은 쓰게 웃었다.
하긴, 솔직히 말하자면 사과를 해도 그것을 온전히 용서했을지는 모르겠다.
‘사과라는 것을 받아 봤어야 알지.’
그렇게 읊조리며 일리안은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겨우 이런 것 때문에 흔들릴 일은 없다. 어쨌든 그는 원하는 것이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행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단정하기 그지없는 정장, 잿빛 머리카락과 안경,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묘하게 서늘한 호박색 눈동자.
에스트리아에게 보고를 하러 가는 것인지 리건의 품에는 몇 개의 서류가 안겨져 있었다.
일리안은 굳이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스쳐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리건이 읊조렸다.
“당신의 상황이 어떤지 잘 파악하십시오.”
그 순간 일리안이 멈칫했다.
고개를 돌려 리건의 뒷모습을 보던 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곧 피식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한편, 일리안을 스쳐 지나간 리건은 조용하게 에스트리아의 방 앞에 섰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품에 있는 서류 뭉치 맨 위에 놓여 있는 종이에 닿았다.
[네 누이가 곧 갈 거다.]
그것을 보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뜬 그는 쯧- 혀를 차고는 그것을 들어 구겼다.
구긴 종이를 대충 정장 안쪽에 구겨 넣은 그가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조금 밝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똑똑.
“폐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곧 승낙이 떨어지고 문이 열렸다.
“왔어? 안 그래도 해 줄 말이 있어. 내가 아까 들은 건데-.”
그가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는 에슈트를 보며 리건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탁.
곧 문이 닫혔다.
* * *
애들러 후작가의 가든파티 이후, 원로원의 귀족들은 몸을 사리는 듯했다.
하긴, 그렇게 공개적으로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으니 그들도 내가 그리 만만하게 다룰 만한 황녀가 아니라는 것은 깨달았을 것이다.
설사 그 난장판이 없었어도 그날 내게 한 소리를 들은 귀족가의 ‘자제분들’께서는 필시 자택으로 돌아가서 나름대로의 보고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보고의 내용은 절대 귀족들이 좋아할 법한 것이 아니었을 테고.
어쨌든 그 뒤로 애들러 후작을 몇 번 더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몸이 아닌 인형을 통해 그의 안색을 살폈지만, 딱히 이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날 가든파티에서 제 딸이 결례를 저질렀다는 말을 남긴 뒤, 앞으로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것이 다소 의외였다.
자기 첫째 딸을 어떻게 했다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내가 확실하게 겁을 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름대로 귀찮은 일을 덜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내 앞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이블린을 보고 내가 이놈의 귀족들을 너무 만만하게 봤음을 깨달았다.
“황녀 전하.”
“뭐야?”
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이블린이 화들짝 놀랐다.
말랑한 얼굴에 얼마 전에 보았던 불안한 기색이 그대로 실렸다.
그에 나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리건을 보았다.
리건은 내 눈빛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애들러 후작께서, 저번에 황녀 전하께서 레이디 이블린과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 같다며 놀이 상대로 추천하셨습니다.”
이런 망할!
나는 나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구리 같은 자식들이 그 일을 빌미로 내 옆에 사람을 보내?
마그릿을 이용해 나를 견제하려던 애들러 후작이니 자신의 둘째 딸을 도와줬다는 것을 빌미로 가까이 접근하는 게 그리 이상한 처사는 아니었다.
애초에 귀족가에서 자식을 이용해 먹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그러나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그런 아버지의 의도 따위 하나도 모르고 그저 등 떠밀려 왔을 이블린이었다.
차라리 마그릿처럼 의도를 갖고 접근하면 경계라도 하지, 얘가 어떤 말을 어떻게 전할지 모르니까 오히려 더 위험하잖아.
“거절할까요?”
리건의 물음에 이블린의 눈초리가 축 처졌다.
애초에 나와 놀이 상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본인도 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인지 눈가에 선명하게 실리는 실망감은 감추지 못했다.
이걸 어쩌지? 물론 단칼에 거절을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대로 이 아이를 돌려보내면 애들러 후작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쓸모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마그릿이 이블린에게 하는 짓을 방관했던 놈이야.’
물론 이블린이 애들러 후작 부부에게 어떤 식으로 취급을 당하든지 그것은 내 알 바 아니었다.
내게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을 구제할 의무는 없으니까.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어쩌지.’
결국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블린이 긴장된 얼굴을 하고 나를 보았다.
그녀를 힐끗 보던 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말했다.
“얘가 후작한테 가서 내 비밀이라도 발설하면 어떡해?”
비밀이라는 말에 리건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리건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팔짱을 척하니 끼고 이블린을 보았다.
“어쨌든 난 황녀잖아. 나름대로 황궁에 떠도는 비밀 같은 걸 알기도 한단 말이야. 그걸 얘가 애들러 후작한테 가서 다 말하면 어떡해?”
물론 현실적으로 아직 예닐곱 살짜리 황녀가 알고 있는 황궁의 비밀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냐마는, 아이한테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블린이 세차게 도리머리를 치면서 말했다.
“저, 절대 말 안 해요.”
“거짓말.”
“진짜예요. 저는 그저 아버님께서 보내셔서…… 마침 저번에 황녀 전하를 뵙기도 했으니, 그, 그게 기뻐서…….”
“그러니까 네 아버지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니’라고 물어보면 쪼르르 다 말할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고자질할 거면서.”
휴우, 아이 말투는 참 어렵다.
그런데 이거 정말 아이 말투 맞나?
나는 옆에 있는 리건을 힐끔 보았다.
리건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입 모양으로 뻐끔뻐끔 말했다.
‘과합니다.’
‘아, 과했어?’
‘네, 아주.’
하지만 평범한 대화라면 모를까, 어떻게 아이에게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이한테 입을 잘못 놀리면 죽인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블린은 이미 내 말에 당황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래도 마그릿보다는 귀엽네.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진지한 얼굴로 앞으로 다가갔다.
“한 가지 약속해 줘. 그럼 내 놀이 상대가 되어도 좋아.”
“무슨…….”
“이 황궁에서 있은 일, 후작한테 아무것도 알리지 마. 그리고 내가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까지 알리지 마. 그냥 물어보면…… 뭘 하고 놀았는지만 말해.”
이블린은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더 쉽다고 느낀 것일까. 그녀의 눈가에 이채가 돌았다.
“네! 꼭, 꼭 비밀 지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