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38화 (38/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8화

* * *

내 덕분에 가든파티는 개판으로 막을 내렸다.

마그릿은 완전히 얼굴이 하얘져서 파티가 완전히 막을 내리기 전까지 입을 꽉 다문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쯧, 이 상황에서도 빳빳하게 고개를 들어야 재밌는 건데. 너무 충격을 받았나.’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가장 가벼운 처벌이었다.

사과를 하기 싫어서 질질 끈 것은 엄연히 그녀였다.

사과가 뭐라고.

결국 저녁 시간이 다가올 무렵 나는 유유자적하게 후작가에서 나왔다.

마그릿은 적지 않게 놀랐는지 나를 배웅하겠다는 인사치레도 하지 않았다.

결국 집사가 따라 나왔으나 내가 거절했다.

그 뒤로 하시스와 일리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시스는 그저 여상스러운 눈빛을 했고 일리안 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아가씨.”

마차에 다가간 일리안은 다시 내게 손을 내밀어 줬다. 그것을 잡고 마차에 타려는데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황녀 전하.”

도도도도 달려오는 작은 인영은 다름 아닌 이블린이었다.

딱 봐도 무슨 용건인지 쉬이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블린이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알면 됐어.”

내 대답에 일리안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뭘 웃어?

내가 매섭게 그를 보자, 일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이블린은 계속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계속 내 눈치를 보면서 우물쭈물했다.

기껏해야 앞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것이겠지. 이렇게 높은 지위의 황녀가 저를 도와줬으니 나 같아도 이 기회를 잡아 동아줄을 잡고 싶을 것이다.

하나 나는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굳이 더 들어 줄 필요는 없어 고개를 돌리는데, 이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그리고…… 그 인형.”

“……?”

“……싸구려 아니에요. 진짜로 친해지고 싶어서…… 선물로 열심히 고른 거예요.”

“…….”

“호, 혹시나 오해하실까 봐.”

예상과는 조금 다른 말이었다.

이블린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 와중에도 그게 신경 쓰여서 온 거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쨌든 그녀가 이리 온 게 황녀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내가 황녀든 아니든,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 자체가 이 아이에게 커다란 두려움으로 남은 것 같았다.

그것을 깨닫자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살짝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러다 다시 이블린의 오렌지빛 눈동자를 마주 보고는 빙긋 웃었다.

“알아.

내 대답에 이블린이 멍하니 나를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그녀의 인사와 함께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하시스가 인형을 내 옆에 놓아 주었다.

커다란 귀를 가진 인형을 보다가 마차가 움직이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인형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이 이렇게 쉽게 치유된다고 하면 그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나는 앞으로도 어린 시절에 갖지 못했던 것들을 영원히 미워하면서 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형,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별로.”

“머리맡에 두고 자라.”

“너나 안고 자.”

하시스의 말에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하시스가 내 말에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왠지 모를 간질거림에 기분이 미묘해졌다.

* * *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리건과 셀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건에게 집무실로 오라는 눈빛을 보내며 나는 셀라에게 말했다.

“저거, 알아서 잘 놓아 줘.”

셀라는 내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윽고 하시스의 옆구리에 끼어 있는 토끼 인형을 발견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어머나, 귀여운 인형이네요. 선물로 받으셨나요?”

“응.”

“제가 깨끗하게 빨아서 방에 장식해 놓을게요. 아니, 인형 방을 하나 따로 만드는 건 어떨까요? 사실 일전에 들어온 선물 중에도 인형이 많았거든요.”

“필요 없어. 이 나이에 무슨 인형 방이야, 애도 아니고.”

그러나 말을 내뱉던 나는 문득 아차 하는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셀라의 눈치를 보자 셀라가 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황녀 전하는 이제 다 크셨는걸요. 아기가 아니라.”

왜 내 정체를 들키는 것보다 이게 더 기분이 나쁘지?

그러거나 말거나 셀라는 하시스에게서 인형을 받아 들고 자리를 떴다.

나는 왠지 모르게 진짜로 아이 취급을 받은 것 같아 이상해졌다. 그러나 더 따질 길은 없었다.

“왔나?”

그렇게 방으로 돌아가던 나는 내 방 앞 창가에 늘어져 있는 레르하겐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웬일이지? 설마 나를 기다린 건가?’

레르하겐의 성정에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를 기다릴 리가 없었다.

나는 조금 호기심 섞인 얼굴을 했다.

“여기서 뭐 하세요?”

“기다리고 있었다만.”

“진짜요? 무슨 일 있었나요?”

“딱히.”

뭐야. 아무런 일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는데 레르하겐의 시선이 내 손목에 닿았다.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나는 불현듯 깨달은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아, 제가 직접 푼 거예요. 누가 억지로 뺏어간 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걱정 안 하시겠지만.”

레르하겐은 내 말에 흐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애들러 후작가는 어땠지?”

“그냥 그랬어요. 주최자인 장녀가 나와서 맞이했고, 가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중간에 기어 나와서 인사만 하고 사라졌고.”

“얻은 건 있고?”

“딱히요. 흑마법의 기운은커녕 마력조차도 얼마 느껴지지 않았어요. 뭐, 애초에 마법사 가문은 아니니 그럴 법도 하지만.”

“그렇군.”

“흐음.”

“네 얼굴을 보니 딱히 큰일은 없었나 보군.”

“큰일이라고 해 봤자…… 아, 그러고 보니, 로드님의 이름을 좀 팔아먹긴 했어요.”

“내 이름을?”

“시비를 좀 유치하게 걸기에 저도 유치하게 대응을 하느라. 혹시 귀족들이 이상하게 굴어도 그러려니 하세요. 귀찮으시겠지만 저와 계약한 이상 그게 로드님의 숙명이니까요.”

내 말에 레르하겐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러나 그는 이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에 내가 멈칫하는데, 레르하겐이 가볍게 읊조렸다.

“덕분에 별일 없는 것 같기는 하군. 그럼 됐다.”

그에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나를 걱정하는 걸까?

그러나 그 물음을 내뱉기도 전 레르하겐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에 나는 미묘한 표정을 하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뭐야, 이상해.

나는 속으로 읊조리며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케이프를 벗어 던졌다.

‘아, 피곤해.’

딱히 무슨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묘하게 피곤함이 몰려왔다. 침대에 올라가 살짝 눈을 붙이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셀라겠거니 했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목소리는 의외로 다른 이의 것이다.

“아가씨, 있어? 들어가도 될까?”

일리안?

그가 내 방으로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이기에 나는 바로 경계심 어린 눈빛을 했다.

혹시 오늘 애들러 저택에서 뭔가를 발견했나? 나는 바로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들어와.”

내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일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직 옷을 갈아입지는 않았는지, 여전히 그 하얀 예복에 우아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웬일이야? 네가 이렇게 내 방에 다 오고?”

“묻고 싶은 게 생겼거든.”

그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뭐가 있지? 설마 또 외출을 할 수 있냐, 오늘 얌전한 걸 봤으니 나가게 해 달라 그딴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라도 그런 거면 한 대 때려서 정신 차리게 해 주겠노라고 생각하는데, 일리안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묻고 싶은 게 뭔데?”

“우리 아가씨는 사과를 듣고 싶었나?”

“사과?”

“오늘 그 귀족 영애한테 그랬잖아. 그 꼬마 아가씨한테 사과하라고.”

“…….”

“그래서 우리 아가씨는, 사과를 듣고 싶었던 거야? 언니와 오빠한테?”

그제야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아차리고 얼굴을 굳혔다.

그는 지금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내 과거가 어떤지 알려 주었다고 해서 함부로 나를 동정하라는 뜻은 아니었-.”

“나는 받고 싶었어.”

내 서늘한 말이 끝나기도 전 일리안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더니 그리 말했다.

“나는 받고 싶었어. 내 부모를 죽인 그치한테.”

“…….”

“그래서 아가씨도 받고 싶었나 묻는 거야.”

부모를 죽여?

“너, 귀족을 싫어하는 이유가…….”

“말해 줘. 아가씨는 사과를 받고 싶었어?”

일리안은 과할 정도로 사과에 집착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묘하게 공감이 되어 입술을 짓이겼다. 그리고 답했다.

“그럼 뭐 해?”

“…….”

“어차피 다 죽었는데.”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없었으나 일리안은 이미 답을 얻어 낸 것 같았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약간의 기쁨과 동시에 묘한 슬픔이 서렸다.

나는 그에 쯧 혀를 찼다.

참 쓸데없는 걸 물어보네. 이걸 알려 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는 나가라고 입을 떼려는데, 일리안이 갑자기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아비를 죽인 거 아니지?”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마치 찬물이라도 뿌린 듯 급속히 고요해진 방 안, 나는 얼굴을 굳혔다.

“그게 무슨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