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7화
마그릿은 살짝 자신의 동생을 보았다. 그녀의 서늘한 눈빛에 이블린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하나 나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있는 이상 마그릿이 함부로 소란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감히 황녀가 있는 데서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물론 내가 돌아간 뒤 성질을 낼 가능성이 컸지만, 글쎄, 이렇게 반항하라고 황녀가 편을 들어 주면서 판까지 깔아 줬는데도 이용해 먹지 못하면 그건 이블린 본인의 문제 아닐까.
‘매듭이 풀리지 않으면 잘라야지. 손수. 그것도 못 하면 그냥 당하고 사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짜악.
“……!”
순간 뺨을 가르는 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
그와 동시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손님들이 있는 곳에서 제 동생에게 손찌검을 한 건가?
아무리 자매 사이에 싸우다 보면 머리채 정도는 잡는 게 일상다반사라고 하나 이것은 결이 달랐다.
내 그 빌어먹을 언니 오빠들도 남이 보는 앞에서는 최소한 내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물론 그들은 황족으로서의 체면이 있었고, 내가 황후의 딸이라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우아하고 품격 있는 귀족가의 영애로서 이것은 절대 할 법한 짓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사람들 앞에서 제 동생을 이리 대하는 언니가 어디 있어.
그것을 증명하듯 내 뒤에 있던 하시스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급히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일단 가만히 있어.’
내 눈빛에 하시스가 쯧 혀를 찼다.
그 옆에 있는 일리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묘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
마그릿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렀지? 보는 눈이 두렵지도 않은가?
나는 속으로 읊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더욱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 예상과 달리 사람들이 더없이 평온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대체 평소에 얼마나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준 거지?’
그제야 방금 전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내용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동시에, 이블린이 정원으로 오지 않겠다고 하던 이유도.
그것은 단순히 뒷일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마그릿은 모든 이들의 앞에서 제 동생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였고, 이블린에게 그것만큼 현실적이고 처절한 공포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애들러 후작은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나? 인지하고 있는데 가만히 둔 것인가?
아니면, 마그릿의 성정을 보건대 아마도 제 부모 앞에서는 나름대로 철이 든 언니 역할을 잘 이행했을 수도 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마그릿을 보았다.
강하게 이블린의 뺨을 때린 마그릿이 나를 보더니 다시 방긋 웃었다.
“송구합니다, 황녀 전하. 제 동생이 무지하여 무례를 범했습니다.”
“무례……?”
“이리 바쁜 일정에 후작가에 왕림해 주신 황녀 전하께 이런 결례를 범할 수가. 어쩜 이런 싸구려 인형 따위를 선물이라고 내놓을 수가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거짓말.
네가 때리고 싶은 건 나잖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이블린을 다 때리고 싶겠지.
나는 그녀의 아비를 공개적으로 모욕했고, 그녀의 동생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나는 입매를 비틀었다.
“재밌네. 싸구려라…… 영애는 싸구려도 준비 못 한 것 같은데?”
그러나 마그릿은 내 말에 마치 걸려들었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전하, 본디 예법상 선물을 준비하는 것은 주인의 의무가 아닙…….”
“글쎄, 난 그런 것 몰라. 레이디 마그릿, 다시 말하지만, 나는 예법을 따르지 않거든.”
“…….”
“그리고 나는, 파티가 시작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기어 오는 것도 그리 예법에 맞는지는 모르겠어.”
“기어 오…….”
“물론 예시일 뿐이야. 영애를 지칭하는 건 아니고.”
네 아비를 지칭하는 거지.
이제 마그릿의 얼굴에는 완전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방긋 웃었다. 그러나 아마 내 눈에 딱히 다정함은 없을 것이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뺨을 때리거나 체벌을 하면 속이야 시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쟤는 더 큰일이 나겠지.’
나는 이블린을 힐긋 보았다.
발갛게 부은 뺨을 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게다가 어쨌든 나도 딱히 나보다 어린애를 상대로 그렇게 볼품없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지.’
나는 다시 마그릿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그릿의 얼굴에는 이도 저도 못 하는 분노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 제 무리에서 언제나 왕 노릇을 해 온 그녀에게 있어서 이것은 치욕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들러 후작가보다 권세가 있는 가문에서 마그릿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가 있는 가문은 델멘이 유일한데, 델멘 공작가의 치들은 하나같이 고고해서 마그릿과 어울릴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녀이니 후계자로 염두에 두기도 했을 것이고.’
아마 이블린이 받는 대우는 그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최소한 가족이나 외부 인사 중 누군가는 편을 들었어야 했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겠지.
마치 아무도 내 언니 오빠들을 말리지 못했고, 결국에는 말리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 나는 살짝 시선을 내렸다. 이 상황에서 어떤 벌을 내려야 ‘적절’할까?
잠시 생각하던 나는 서늘하게 웃었다.
“사과해.”
“네?”
“동생에게 사과하면, 오늘의 결례가 어마마마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야.”
그 순간 마그릿의 눈가에 그야말로 충격이 확 번졌다.
사과하라는 말에 이리 구는 것을 보니 대체 얼마나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하, 송구하오나.”
“나한테 말고 동생에게 해. 뺨은 동생이 맞았는데 왜 사과는 나한테 하는 거지?”
“…….”
마그릿은 내 말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렇게 시간이라도 끌 생각인가 싶었지만 나는 누군가를 벌할 때만큼은 인내심이 넘쳐나는 인간이었다.
나는 조용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하, 피곤하게 구네 진짜. 인간들은 그냥 사과하고 끝낼 일을 정말 질질 끄는 재주가 있어.”
갑자기 하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여기서 말을 얹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뒤를 돌아보자 하시스가 시큰둥하게 나를 힐긋 보았다.
그에 내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여유롭게 다시 시선을 마그릿에게 돌렸다.
“내 오빠가 기다리기 지루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영애는?”
“…….”
“참고로 말하자면, 오빠는 성질머리가 더러워서 나도 못 말려.”
“누구 성질머리가 더럽…… 그래, 내가 성질이 더럽긴 하지. 그러니까 그냥 사과나 빨리 해.”
내 말에 발끈하던 하시스는 내가 서늘하게 뒤를 돌아보자 쯧 혀를 차며 말을 돌렸다.
나는 다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영애가 사과를 하지 않겠다면 뭐, 상관없어. 어쩔 수 없지. 나는 오늘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 어마마마와 아버지에게 정원에 들어와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다 알릴 거야.”
“…….”
“저 공자가 어떻게 내 어머니를 입에 올렸는지도.”
그 순간 마그릿의 뒤에 있던 소년 소녀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슬금슬금 서로를 보더니 이내 마그릿을 향해 속삭였다.
“저, 레이디 마그릿, 전하의 말씀대로…….”
“그래요. 아무래도…….”
그들의 말에 마그릿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동안 그녀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이블린을 괴롭혀 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알 필요가 있었다. 권력 위에는 권력이 있고, 사람 위에는 사람이 있다.
힘으로 누군가를 찍어 내리면, 언젠가는 본인이 찍힐 각오도 해야 했다.
내 형제자매들은 그것을 몰랐던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너도 목숨을 잃기 전에 알아서 처신해.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이블린. 언니를 용서해 주겠어?”
마그릿이 진짜로 사과를 할 줄은 몰랐는지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기색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곧 이블린이 나를 보았다.
뭘 봐? 네가 알아서 해. 시큰둥한 눈빛으로 그에 화답하자, 이블린이 고민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것 봐.
정작 맞은 사람은 사과 한마디면 그저 좋아하는데. 저렇게 간단한 걸 하지 않아서.
나는 입을 꼭 다물고 묘하게 기뻐하는 이블린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착잡해지고 말았다.
“황녀 전하.”
이블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그릿이 이제 되었냐는 뉘앙스를 담아 다시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서린 지독한 수치심에 기분이 좋아졌다.
겨우 사과 하나로 이렇게 굴다니.
부녀가 쌍으로 건방진 맛이 있어.
나는 순진하게 웃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앞으로 이블린에게 확인해 볼 거야. 영애가 또 이딴 짓을 벌이지 않는지.”
“…….”
“혹여 오늘 일로 동생에게 복수라도 하면…….”
나는 말꼬리를 살짝 흐렸다. 곧 마그릿의 앞으로 다가간 뒤,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는 마력을 담아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진짜로 큰일 날 거야.]
“……!”
마력을 담아 그녀에게만 속삭인 목소리에 마그릿이 흠칫했다. 그녀의 눈가에 공포가 서렸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나는 황제와 드래곤 로드의 아이잖아. 그 피가 어디로 가겠어, 안 그래?]
사실은 아니지만 위협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어차피 이들이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알기나 하겠나.
애들러 후작에게 가서 일러도 상관없다. 아니, 사실은 이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최소한 다시는 인간과 드래곤 로드의 아이라고 알려져 있는 나를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
“기억해, 알겠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마그릿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것을 보며 나는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마그릿 애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