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6화
‘그나저나 목이 카알카알한데.’
그에 테이블 위에 있는 레몬주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중앙의 트레이에 놓여 있어 발뒤꿈치를 자연스럽게 드는데 갑자기 익숙한 팔이 쑥 나를 스쳐 지나가더니 자연스럽게 레몬주스를 들어 내게 넘겼다.
“자.”
“아.”
나는 하시스의 손에서 레몬주스를 받아 들고 꿀꺽꿀꺽 삼켰다.
일리안이 은은한 미소를 담고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뭘 그렇게 봐?”
“우리 아가씨는 참 특이하단 말이야.”
“그놈의 아가씨.”
“아까 그 후작이랑 사이가 안 좋아?”
일리안의 물음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사람은 없었으나 그래도 혹시라도 듣는 귀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또 둘만 있는데 어마마마니 뭐니 하는 피곤한 헛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가볍게 우리 주변의 소리를 차단시키고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귀족들 전체와 사이가 안 좋아.”
“흐음. 황제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즉위할 때부터 귀족들과 나는 사이가 안 좋았어. 저 인간들은 내가 형제자매를 다 도륙하고 황위에 오른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거든.”
굳이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해 줘야 하나 싶지만, 어차피 황궁에 있다 보면 들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고, 황녀의 이복 오빠가 이를 아예 모르는 것도 말이 안 되기에 답해 주었다.
게다가 내 입이 아닌 다른 사람 입으로 들으면 어떻게 이야기가 와전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시스는 내 말이 조금 의외인 듯싶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입을 열었다.
“형제자매를 다 도륙하다니. 네가?”
“왜, 내가 못 했을 거 같아?”
“무슨 이유라도 있냐? 혹시 적통이 아니었어?”
“그럴 리가, 난 황후의 딸이야. 그것도 황실의 유일한 적통 황녀.”
“적통 황녀가 굳이 숙청을 감행한다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황위가 네 것이 되지 않나?”
“아니. 내 것일 리가 없어. 내 아바마마는 나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까.”
“……왜?”
“내가, 멍청했거든. 마력도 없고, 말도 똑바로 못하고, 그냥 멍청했어. 괴롭히기 딱 좋은 존재였지.”
“……너.”
“딱히 창피하지는 않아. 결국 나는 황제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괴롭힘당할 만큼 약했어. 이후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열일곱이었고, 손에 피가 흐르고 있었지.”
그런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단순한 이야기였다.
그저 멍청한 황녀가 당연하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어느 순간 복수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하나 그 복수가 과해서 결국 황녀는 폭군이 되었고, 어쩌면 그 벌의 일환으로 지금 이 꼴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목이 카알카알해졌다. 나는 주스를 비우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귀족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 그들은 내가 어렸을 때 얼마나 멍청했는지 봐 왔었고, 실제로 나를 무시했거든. 그런데 그런 황녀가 자기가 추대했던 황자와 황녀를 죽이고, 그 어미의 가문들까지 숙청했으니 곱게 보이겠어?”
“…….”
“어쨌든 가든파티에 온 이상 앞으로 황실에서도 귀족들이랑 엮일 수 있으니 미리 알아 두라는 거야. 애들러 후작뿐만 아니라 나는 그냥 귀족 자체와 사이가 안 좋아. 그리고 아마도 그래서, 그 딸이라고 알려진 나한테도 별로 좋은 얼굴은 안 보일 거야.”
말이 끝난 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딱히 하시스와 일리안의 표정은 살피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하시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깔끔하게 말해서, 너는 한 대 맞고 한 백 대 정도로 돌려줬다는 거군?”
“……음?”
“참 너다운 처사다.”
이건 무슨 이상한 비유지?
나는 고개를 홱 들었다.
하시스가 팔짱을 낀 채 시큰둥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이게 저런 표정을 하면서 들을 만큼 가벼운 이야기는 아닐 텐데?
내가 속으로 생각하는데, 하시스가 눈썹을 까닥였다.
“왜 그렇게 보냐? 내 말이 틀렸어? 너는 그냥 죽임을 당하기 전에 죽인 거 아니었냐? 잘한 건 아니다만, 한 대 맞고 때린 거랑 맞기 직전에 맞지 않으려고 때린 거랑 그냥 때린 거랑은 좀 다르지.”
물론 하시스의 말이 맞았다.
어마마마가 살아 계실 때는 그렇다 쳐도, 그녀가 죽은 뒤 나는 주기적으로 내 장성한 형제자매들과 그들의 가문이 보내온 살수와 독을 견뎌야 했다.
가끔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였고 가끔은 그저 운이 좋게 스쳤다. 가끔은 오장육부가 녹아들 정도로 독한 독이었고 가끔은 그저 피를 몇 번 쏟다가 말았다.
별 볼 일 없었던 어린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내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갇혔을 때도 매번 누군가가…….
‘어?’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얼굴을 찡그렸다. 어쩐지 며칠 전에 비슷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털었다.
“왜 그래?”
“아냐. 이게 다 네가 이상한 말을 해서잖아.”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을 했냐?”
하시스는 시큰둥하게 내 손에서 빈 잔을 가져갔다. 그 순간 본의 아니게 고개를 들자 일리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묘하게 가라앉은 표정에 내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아, 혹시 내가 아까 전에 말한 것 때문에 그러나?
내가 숙청을 했다고 해서 평민들이 연루됐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나 귀족가의 숙청은 대부분 혈연에 한한다.
내가 미쳤다고 평민들까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일리안이 입을 뗐다.
“그럼 아버지와…….”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정원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람들의 이목이 한쪽으로 집중되었다.
일리안은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소란의 근원은 아름드리나무 아래인 것 같았는데, 마그릿이 무슨 일이라도 낸 것인가?
안 그래도 눈빛이 걸렸는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우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귀족이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저거, 애들러 후작가의 막내딸 아니야?”
“마그릿 동생? 쟤가 왜 여기에 있어?”
“세상에. 또 큰일 나겠네.”
귀족들의 웅성거림에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블린이 왔다고?’
나는 흐음-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왔군.’
그럼 돌아가기 전에 한번 볼까?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하시스와 일리안을 힐긋 보고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내 표정을 보더니 곧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하나 곧 별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자연스럽게 우리를 위해 길을 비켜 주는 이들 덕분에 딱히 걸리적거리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소란의 근원지로 도착한 나는 내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속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과연, 내 예상대로 거기에는 아까 전 내가 바닥에 던졌던 리본을 꼭 쥔 채 두려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블린과 누가 봐도 서늘한, 하지만 미소를 담고 있는 마그릿이 있었다.
“그래서, 무슨 리본을 말하는 거니?”
마그릿의 물음에 이블린은 바짝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서 나는 일부러 입을 다물었다.
뒤에서 리본의 정체를 알아본 하시스가 나를 툭툭 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대신, 일부러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그게…… 황, 황녀 전하께서, 리본을…….”
“어머나. 황녀 전하께서 리본을 두고 가셨다고? 네게?”
“바닥에 떨구고 가셔서…….”
“그래서?”
“그래서, 돌려주려고.”
“하.”
마그릿은 이블린의 말에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 속에 잠겨 있는 명백한 조롱에 이블린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그릿이 그런 동생을 향해 다정하게 읊조렸다.
“이블린, 아무리 가든파티에 참석하고 싶어도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왜 언니를 자꾸만 속상하게 만드니?”
“거짓말이 아니야. 나는 그냥.”
“언니가 말했잖아.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언제나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부모님께 꾸중을 듣고도, 또 거짓말을 하니? 심지어 황녀 전하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그렇게 말하던 마그릿이 살짝 몸을 낮춰 동생의 어깨를 잡았다.
그에 이블린이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입을 꼭 다물었다.
그것을 보던 나는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그 리본, 내 거 맞는데?”
“황녀 전하.”
“내가 좀 칠칠맞지 못한 면이 있거든. 손목에 묶는 리본이 어디 갔는가 했더니 거기에 있었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이블린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블린은 내가 자신을 도와줄 줄 몰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그러나 애초에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나였다.
일부러 리본을 풀어 바닥에 던진 것은 그것을 보고 올지 말지 결정하라는 의미였다.
사실 이블린의 성격이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유를 굳이 묻자면 나도 모르겠다.
그저 그 순간에는 왠지 모르게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쨌든 제 발로 왔잖아? 자기 선택이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마그릿과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나설 줄은 몰랐는지, 마그릿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러나 곧 그녀가 묘하게 서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입꼬리만 들어 올린 채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황녀 전하, 리본을 잃어버리셨으면 저한테 말씀을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마그릿은 이블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탁.
가볍게, 하지만 확실히 힘이 들어간 손길이 리본을 강하게 뺏어 내게 넘겨주었다.
“혹시 아까 제 동생이 결례를 범하지는 않았겠지요?”
“별로. 사실 저 인형도 이블린이 준 거야. 선물이라고 하던데?”
나는 일부러 이블린의 이름으로 부르며 활짝 웃었다. 그와 동시에 마그릿 못지않게 거친 손길로 리본을 가져왔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마그릿의 눈빛이 더욱더 서늘하게 빛났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녀의 얼굴에 비낀 미소는 더욱더 화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