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5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정원으로 돌아왔다.
자리를 비울 무렵보다 조금 더 북적거리는 것 같은 정원 내부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때, 나를 발견했는지 마그릿이 우아하게, 하지만 조금 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황녀 전하, 어딜 다녀오셨나요? 집사에게 물어보니 황녀 전하를 뵌 적이 없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아. 오빠들이랑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어.”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마그릿의 눈길이 하시스의 팔에 안겨져 있는 인형에 닿았다가 약간 움찔했다.
딱히 이것이 무엇인지 묻지는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내가 자신의 동생을 만났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언급하는 대신,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공자님께서 새로운 짐이 생기신 듯한데, 시녀에게 잠시 맡아 두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그릿의 말에 도리머리를 쳤다.
“아니야. 필요 없어.”
“하지만.”
“오늘 가든파티는 즐거웠어. 영애의 환대는 어마마마께 그대로 말씀드리지. 하니 이제는 나를 신경 쓰지 마. 그저 이렇게 있다가 돌아갈 테니까.”
애초에 애들러 후작가에 온 것은 그들이 흑마법에 연루되지 않았는지, 그 외 수상한 낌새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애초에 내가 잘못 짚었는지 최소한 흑마법에 관한 단서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마그릿과 더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적당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자리를 떠야지.
그리 생각하던 순간, 정원의 안쪽,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낮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마그릿. 어찌 황녀 전하를 접대했기에 일이 이렇게 된 게냐?”
그 순간 흥미를 잃고 시큰둥하게 서 있던 내 눈에 이채가 확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목소리의 주인은 내가 아는 이였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 저택의 주인이자 오늘 가든파티에서 내가 가장 접촉하고 싶었던 인물, 애들러 후작이었다.
‘뭐야. 언제 온 거지? 아까 전 홀에서는 못 봤는데.’
물론 귀족가에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일 리는 없으니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정확히 내가 지루해할 만한 타이밍에 나타났다는 것이, 그의 음험한 속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외출하고 돌아온 것인지 이 더운 날에 겉옷까지 입고 있던 애들러 후작은 여유롭게 장갑을 벗어 집사에게 넘겼다.
곧 내 앞에 선 그가 더없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여유롭게 그 인사를 받았다. 물론 비꼼을 가득 더해서.
“애들러 후작을 오늘 직접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럴 수가.”
“공사가 다망하다 보니 그만 결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본디 제가 맞이해 드려야 했는데, 그만 갑자기 일이 생겨.”
너를 접대하는 것보다 내 일이 더 급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화법은 내가 종종 당해 보던 것이다.
언제? 내가 진짜로 어린아이였고, 그가 젊은 청년이었던 시절에.
나는 번듯하게 금발을 뒤로 넘긴 뒤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애들러 후작을 응시했다.
내 둘째 오빠의 놀이 상대이자 친우였던 그는 나보다는 열일곱 살이 많았다.
그러나 그 많은 나이 차가 무색하게, 나를 괴롭힐 때의 그는 일곱 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치했다.
물론, 그만큼 잔인했고.
원로원에서 꾸준하게 보던 얼굴이긴 하나, 왠지 모르게 아이의 시선으로 보자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이없게도 그는 이제 딸이 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싫어했다.
그의 입장에서야 ‘내 딸’을 싫어하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내게는 다 같았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한 뒤 방긋 웃었다.
“딱히 결례는 아니야. 어쨌든 파티의 주인은 애들러 후작 영애니까. 뭐, 어마마마한테는 후작이 중요한 볼일이 있어 외출했었다고 말해 둘게.”
적나라한 협박질에도 애들러 후작은 여유롭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하긴, 겨우 이런 걸로 당황할 잔챙이는 아니지.
그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본 하시스와 일리안은 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마그릿이 살짝 허리를 굽히며 옆으로 물러섰다. 이내 내 앞으로 온 후작이 입을 열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폐하께서는 영명하시어 이런 것에 화를 내지 않으실 겁니다.”
“과연?”
“황녀 전하의 말마따나, 파티의 주최자는 제 딸이니까요.”
“하면, 내 아버지는?”
“로드께서는 영생을 사시는 분, 겨우 인간사에 관심을 주실 리가 만무합니다. 설사 그것으로 분노하신다 해도, 폐하께서 용납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폐하는 타인이 정무에 개입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실 거니까요. 그것이 설사 자신의 아이의 아버지라도.”
용납할 건데.
대체 왜 이 인간들은 나를 폭군이라고 부르면서 내가 상식적인 행동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물론 그 아이의 아비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르하겐이지 않는가.
이종족의 개입이 내게 힘을 줄 수 있다면 용납할 수 있었다. 그들은 권력 따위에 관심이 없으니까, 내 정치적 질서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니.
그러나 여기서 그것을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더없이 순진무구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화가 나 그냥 죽이면 어마마마도 뭐라고 못 하실 거야.”
“…….”
“오히려 어마마마는 좋아하지 않으실까? 어마마마는 폭군이니까.”
“전하, 그런 말씀은 예법에 어긋나는…….”
“괜찮아. 예법이라는 건 원래 아랫것들이나 지키는 거라고 어마마마가 그랬어. 그리고 나는 아랫것이 아니잖아. 아랫것은 따로 있지.”
순진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내뱉은 말의 파장은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했다.
삽시에 찬물이라도 뿌린 듯 주변이 고요해졌다. 마치 구경이라도 보듯 서 있던 이들은 이제야 상황 파악을 제대로 했는지, 헛숨을 들이쉬는 것이 적나라하게 들렸다.
애들러 후작의 얼굴이 확 굳어 버렸다. 그야말로 섬뜩하고도 모욕적인 언사였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언사는, 그가 한평생 들어 본 적이 없는 유형의 것이리라.
나는 한술 더 떠서 얄밉게 방긋 웃었다.
“아, 후작이 아랫것이라는 건 아니었어.”
“…….”
“뭐, 나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아랫것은 아니잖아.”
물론 이 상황에서 내 말을 사실이라고 믿는 멍청이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아까까지만 해도 유유자적하게 웃고 있던 애들러 후작은 이제 나를 잡아먹을 듯이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그는 후작이었고, 나는 황족이었다. 그것도 황제의 유일한 딸이며, 드래곤 로드의 딸.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그저 이 순식간에 일어난 모욕을 곱씹는 것뿐이리라.
“마그릿.”
긴 침묵이 흐르고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표정을 갈무리한 애들러 후작이 천천히 제 딸을 불렀다.
마그릿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다가 작게 대꾸했다.
“네, 아버님.”
“나는 이만 처리하지 못한 공무가 있어 가봐야 할 것 같다.”
“아……, 네.”
“이곳에 오신 분들께 정중한 대접을 하도록.”
이런, 나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결국 이 긴 침묵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도피였다.
하긴, 자기가 생각해도 여기서 어린 황녀와 말싸움을 이어나가봤자 딱히 얻는 것은 없겠지.
아니, 무엇을 얻기는커녕 그의 자존심과 체면은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져서 내 발아래 너덜너덜하게 있었다.
“어, 후작, 오자마자 가는 거야?”
나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후작을 향해 물었다.
더 있어도 되는데.
내 순진한 눈빛에 애들러 후작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처리하지 못한 업무가 있어…….”
“그래? 그럼 잘 가.”
나는 기어코 마지막까지 얄밉게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애들러 후작은 꽤 빠르게 정원을 빠져나갔다.
아마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델멘 공작이거나 다른 귀족들에게 연락을 취해 난리를 치겠지.
뭐라고 할까?
그 건방진 황녀가 생각 이상으로 영악하다고 소리를 지를까?
어느 쪽이든, 나는 기분이 좋았다.
‘역시. 내가 싫어 죽겠는데 날 두고 어쩌지도 못하는 모습이 제일 재밌어.’
아까 전까지만 해도 지루했는데, 오기를 잘한 것 같다.
흑마법에 관한 건 건지지 못했으나 애들러 후작과 그 무리들에게는 경고를 내렸다.
다시는 이런 개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것과 함께, 나는 질서 따위를 신경 쓰지 않으니 알아서 자중하라는 경고.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는 나를 빤히 응시하는 마그릿을 발견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 위로는, 아까 전 제 아비가 당했던 수모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물론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그럼, 나는 오빠들과 함께 파티를 즐길게, 레이디 마그릿도 즐겁게 놀아, 알겠지?”
퍽이나 즐겁게 놀겠네.
내 말에 마그릿은 어색하게, 누가 봐도 작위적인 미소를 짓다가 다시 아까 전 아름드리나무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녀와 함께하던 소년 소녀들이 그녀를 감싸고 뭐라고 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내 흉을 보는 것이겠지.
그리고 나는 사실 저 정도 흉은 무척 즐기는 편이다.
‘앞에서 욕을 퍼붓지 못하다니, 얼마나 분해 죽을까.’
원래 뒷담화는 약자들의 유일한 분풀이 수단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나를 힐끔거리는 시선을 전부 무시한 채 사람들과 약간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향했다.
누가 봐도 내게 말을 붙이고 싶은 티가 역력했지만, 시비의 말이든, 아부의 말이든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아까 전의 상황을 보건대 아부의 말일 가능성이 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