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4화
“……너.”
“……죄, 죄송해요.”
“……?”
“죄송해요! 너무 궁금해서 그, 그랬어요!”
“…….”
“황녀 전하께서 오셨다구, 그래서, 구, 궁금해서 보구 있었는데, 흑, 죄송해요! 엿들은 거 아니었어요! 그냥, 그냥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기둥 뒤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겉보기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였다.
화사한 구불구불한 금발 위에는 파란색 리본이 팔랑거리고, 작달막한 체구에 하얀색 프릴이 가득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어 마치 인형 같았다.
생긴 건 꽤 똘망똘망하게 생겼다.
다만 몽실몽실한 뺨은 경악으로 잔뜩 하얘져 있었고, 커다란 오렌지빛 눈동자는 물기로 진득해져 있었다.
심지어 아이는 품에 제 상체만 한 토끼 인형을 들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아까 전 기둥 뒤에서 언뜻언뜻 보였던 그 귀의 정체임을 알아차렸다.
애착 인형이라도 되나? 예닐곱 살은 되어 보이는 귀족가의 아이가 대낮에 손님들이 가득한 저택에서 이렇게 인형을 들고 다닌다고? 유모는 교육을 안 하나? 가정교사는 없나? 왜 이러고 기둥 뒤에 있지?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촤르륵 펼쳐졌다.
그에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데, 갑자기 아이가 자신이 안고 있는 인형을 불쑥 내밀었다.
“이건 선물이에요!”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마저도 흠칫하고 말았다.
어, 어쩌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때, 어느새 내 옆으로 온 하시스와 일리안이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해, 동생아. 선물이라잖아. 받아.”
“그래, 우리 아가씨. 우리 아가씨가 안고 있으면 딱이겠는 걸?”
이 자식들이.
그래도 뭔가 거절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일단 떨떠름하게 토끼 인형을 품에 안았다.
폭신한 인형은, 이제 보니 애착 인형 같은 것치고는 새것이다.
나는 일단 내 앞에 있는 아이를 자세하게 탐색했다.
마그릿과 꽤 닮은 눈매는 아이가 확실히 애들러 후작가의 막내딸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사실을 확신하자 나는 조금 경계 섞인 얼굴을 했다.
왜 파티 주최 측의 아가씨가 이런 곳에서 홀로 있단 말인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내 물음에 아이는 우물쭈물했다.
곧, 아이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난 그 말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그, 그것도 죄송해요.”
“…….”
그 순간 묘한 불쾌감이 팍 일었다.
내가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익숙한 모습에 대한 본능적인 불쾌함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자꾸만 죄송하다고 하지 마. 사람들이 얕보니까.”
순간 저도 모르게 싸늘한 목소리가 나갔다.
옆에 서 있던 하시스와 일리안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이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다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을 열었다.
“죄송…….”
“흠.”
“그, 그게 아니라……. 저는 이블린 애들러예요, 황녀 전하.”
“응.”
“저…… 황녀 전하께서 오신다고 하셔서, 구, 궁금해서…… 보다가 그만, 이렇게 되었어요.”
“나를 보고 싶으면 정원으로 나오면 되잖아.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애들러 후작가에서 연 가든파티인데?”
“그, 그게…… 아버님이…….”
“…….”
“아버님이, 나오지 말라구, 하셔서…….”
……호오.
이블린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가볍게 탄식했다.
애들러 후작이 왜 자기의 막내딸을 못 나오게 했는지 그 속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아이의 모습을 보건대 어쩐지 그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티에 나와서 괜히 나와 친해지려고 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인가?’
마그릿 같은 나이대의 소녀야 몇 마디 말만 해 주면 척하니 알아들을 나이이니 그렇다 쳐도, 겨우 이 정도 나이대의 아이는 아무리 주의를 줘도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
물론 그 외의 이유도 있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애들러 후작은 이 아이가 내 앞에 서는 것을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슬슬 호기심을 갖고 아이, 이블린을 응시했다.
다행히도 먹다 찌부러진 크림빵처럼 생긴 애들러 후작과 닮은 것은 오직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색인 듯 상당히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다만 권세가 있는 가문의 딸답지 않게 다소 위축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조금 걸리긴 했다.
나는 내 품에 안긴 인형을 힐끔 보았다. 지금쯤이면 내 침대의 한구석에 얌전히 있을 인형들이 조만간 새로운 친구를 맞이하겠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물었다.
“이 인형은 뭔데?”
“아,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제가 안고 자는 인형이 있는데, 굉장히 포근해요! 그래서 황녀 전하께 선물하려고 같은 걸로 샀어요! 리본 색깔만 달라요. 그래도 이것도 예뻐요!”
“어. 그, 그래.”
인형 이야기가 나오자 언제 침울했냐는 듯이 이블린이 다시 두 눈을 빛냈다.
그에 되레 나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차라리 마그릿처럼 교묘하게 상대방을 따돌리려고 하거나 아니면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이는 쉽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사람만 상대를 해 왔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제 속을 다 까발리면서 오는 이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차라리 어른이면 무시라도 하겠는데, 아이라서 괜히 무시하면 안 될 거 같았다.
‘흐음. 애들러 후작이 왜 못 나오게 했는지는 알겠군.’
확실히 치밀하게 머리를 써 어른들이 짜 놓은 말을 그대로 따를 만한 성정은 아니었다.
이것은 나이의 문제보다는 성정의 문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난다면 재미없지.’
애들러 후작이 기어코 그리 굴겠다면, 반대로 해 보는 것도 좋지 않나?
어차피 내가 억지로 끌고 왔다고 하면 후작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까 전 이 기둥 쪽을 보던 마그릿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그 서늘한 눈빛, 절대 제 동생을 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한없이 익숙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물었다.
“정원에 안 갈래?”
“네?”
“가든파티, 참석하고 싶지 않아?”
솔직히 이블린을 데려간다고 뭐 큰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파티의 일을 전해 들은 애들러 후작이 뒤통수를 잡고 한숨을 쉬는 것 정도의 작용이나 할 것이다.
거기에 그 재수 없는 마그릿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데 일조하는 정도겠다.
그러나 내 성격에 그저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은 그들의 무례에 대한 최대한의 자비였다.
게다가 나를 만나고 싶어서 기껏 나온 애를 홀에 덩그러니 놓고 가는 것도 뭔가 할 짓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굳이 인형까지 준비해 놓고 홀에서 서 있을 정도면, 자기도 나름 가든파티에 참석하고 싶은 거 아닌가?’
과거의 내가 그랬으니까.
그러나 내 말에 누구보다도 기쁘게 따라올 것 같았던 이블린은 정작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왜 그러지?
내가 빤히 보자 이블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그냥 방으로 돌아갈래요.”
“아버지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상관없어. 어차피 가든파티잖아. 너도 참가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언니가, 싫어해요.”
“언니? 마그릿 애들러?”
“언니가, 제가 가든파티에 참석하는 걸 싫어해요. 제가 참석하면, 언니가 창피해하거든요.”
“창피?”
“…….”
“왜 창피한데?”
“……제, 제가 총명하지 못해서, 그…… 언니랑은 달라서.”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언니의 눈치를 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그저 단순히 언니에게 혼날까 봐 걱정하는 것 그 이상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이것은 그저 평소에 언니와 다투는 것 정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 상황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지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물론 황녀라는 신분을 이용해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것 따위야 일도 아니었지만, 굳이 내가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런 건 원래 혼자 극복하는 거다.
원래 약한 것은 쉽게 당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입매를 살짝 틀었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 알겠어.”
본인이 싫다는데 강제하는 취미는 없었다.
하나 생각과 달리 나는 내 손목에 묶인 장식용 리본을 풀어 바닥에 던졌다.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더 시간 낭비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이블린을 홀에서 만난 이상 2층으로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했고, 이곳에서 계속 서성거리는 것도 의미는 없으니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다 한들 뭔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때, 나를 따라오던 하시스가 작게 물었다.
“야,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냐? 너 만나러 온 애를?”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는지라 시큰둥하게 말했다.
“본인이 싫다는데.”
“그래도. 눈빛은 그게 아닌데?”
“본인이 싫다고 했어. 그러면 끝인 거야. 내가 억지로 끌고 갈 필요가 있나? 싫다잖아.”
하시스는 내 말에도 다소 석연찮은지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아가씨는 참 냉정하네.”
일리안이 그리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나는 웃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원래 다 그래. 멍청하고 약한 사람을 구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있다면, 오직 자신뿐이겠지.
나는 너무 멍청했고, 너무 약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끝낸 것은, 결국 내가 검을 든 순간이었다.
나는 드물게 싸늘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눈치챘을까, 하시스와 일리안은 의외로 내 말에 더 토를 달지 않았다.
* * *
저택에서 나온 뒤 나는 바로 하시스에게 인형을 넘겼다.
‘이걸 왜 나한테?’라는 얼굴을 하던 하시스는 내 표정을 보더니 그냥 귀찮은 얼굴로 그것을 받아 옆구리에 끼워 넣었다.
이윽고 정원으로 가는 내내 그는 내게 무슨 말을 걸고 싶은 표정을 했다.
그러나 결국 입 다물기를 선택했는지, 정원으로 향하는 시간은 오직 침묵으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