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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33화 (33/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3화

유치했으나 악질적이다.

예닐곱 살짜리에게 그런 행동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굳이 시비를 건다면 ‘황녀 전하께서 저희의 대화가 재미없으신 듯해요’라고 하면 끝이다.

사실 내가 그들이라면 바로 레르하겐에게 가서 쪼르르 이를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 또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이렇게 구는 것을 보면, ‘아무리 드래곤 로드라도 겨우 이런 일에 그렇게 비상식적으로 굴겠어? 우리가 잘 대꾸하면 되지.’라는 생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괘씸은 했으나 그렇다고 싸워서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녀 전하? 어디로 가시는 것인지. 혹시 저희 대화가 지루하셨나요?”

“응.”

“어머, 죄송해요. 저희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만 평소처럼 대화가 나와서.”

“평소에 이렇게 재미없는 말만 해? 정말 불쌍하네.”

“……한데 어디로 가시려는 것인지.”

“물을 너무 많이 마셨더니, 실례할게.”

“제가…….”

“아니야. 집사에게 안내를 부탁하면 돼. 영애는 따라오지 말고 즐겁게 놀아.”

겸사겸사 내 뒷담화도 하고, 집에 가서 어떻게 부모한테 보고해야 하는지 발 동동 구르면서 고민도 해 보고.

말을 마친 내가 하시스와 일리안에게 눈짓했다.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애초에 이 자리가 지루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은 바로 나와 함께 자리를 떴다.

정원을 빠져나오자마자 하시스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사는 어디 있냐?”

“어디 있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혼자 돌아다닐 건데.”

“그래도 되냐?”

“안 되지. 하지만 상관없어. 아까 보니까 시종과 시녀 대부분은 정원에 있던데, 설사 마주친다고 해도 그냥 길을 잃었다고 하면 돼. 황녀를 상대로 꾸중이라도 하려고?”

그렇게 말한 나는 저택으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잠깐 실례하겠다는 말에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애초에 이 저택에 황녀의 출입을 막을 이가 없으니, 이 점은 꽤 편했다.

곧 저택으로 들어간 나는 생각보다 비어 있는 복도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와 함께 들어온 하시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택에서 뭘 조사하려고 하는 거냐?”

“일리안, 이곳에 수상한 냄새는 없어?”

곧바로 던져진 내 질문에 일리안이 흐음-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없어. 최소한 아까 전 정원에서 보았던 사람들 중에는.”

“그럼 저택에 특별히 죽음의 협곡에서 느껴졌던 기운이나 마력 흐름이나, 아무튼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건 없고?”

“글쎄, 그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저택 자체에 딱히 불쾌한 느낌이 없어. 아주 평범해.”

“진짜?”

“진짜.”

일리안은 안심하라는 듯이 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가볍게 쉬었다.

뭐, 애초에 마그릿이 나와서 나를 맞이할 때부터 애들러 후작의 목적은 그저 나를 적당히 견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진짜로 나를 이렇게 만든 범인이거나 그 범인과 결탁이라도 했다면 그렇게 시시껄렁한 기 싸움의 현장 따위 만들지 않았겠지.

어느 정도 예상, 아니, 사실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던 추측이지만 그럼에도 괜히 맥이 빠졌다.

그래도 기왕 온 김에 한번 쭉 둘러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손끝에 마력을 집중시킨 뒤, 웬만하면 거의 눈치를 못 챌 정도로 그것을 흘려보냈다.

술식을 짜지는 않아 마법이 발현되지는 않았다.

대신 레르하겐이 준 반지는 내 마력을 감지했는지 고요하던 아까 전과 달리 보석 부분이 금색으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마법은 아무리 꽁꽁 숨겨도 흔적이 남는다.

만약 이 사이에 흑마법을 쓰는 자가 있다면 이 반지에 약간의 반응이라도 올 것이다.

물론 이 반지도 어디까지나 내게 직접 가해지는 힘만 감지를 할 수 있으니 반응이 올 때는 이미 피하기에 늦었겠지만, 그래도 단서라도 찾을 수 있지 않겠나.

나는 두 사람에게 따라오라는 눈빛을 하고는 천천히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혹시 누군가가 올 것을 대비해 가급적 평범하게, 앞만 보면서 걷는데 일리안이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애들러 후작가는 꽤 권세가 있는 가문인가?”

“그렇지. 원로원에서 여섯 번째 위치야. 제일 위부터 켈리어드 대공가, 엘비어츠 공작가, 델멘 공작가, 샤트 공작가, 아네로제 후작가 그다음이 애들러 후작가고, 심지어 지금은 대공가와 엘비어츠가 공석이라서 네 번째로 권세가 크다고 봐도 무방해.”

그렇다고 해도 켈리어드 대공가나 엘비어츠 공작가, 델멘 공작가와는 발언권이나 권세를 놓고 볼 때 크게 차이가 벌어지긴 했다.

하지만 그것이 애들러 후작가가 꽤나 명망이 있는 가문임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일리안은 내 답에 호오- 하고 의미 모를 감탄을 내뱉었다.

“어쩐지. 저택이 화려하더라니.”

“줄곧 황궁에 있었으면서 지금 일개 후작가의 권세에 감탄하는 거야?”

“황궁이 화려하다고 이곳이 화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부러워? 내가 어른으로 돌아가면 작위라도 하나 내려 줘?”

물론 이것은 우스갯소리였다.

내가 미쳤다고 일리안의 손에 작위를 쥐여 주겠나. 처형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 최대의 자비였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일리안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나는 그렇게 역겨운 자리는 별로.”

그 순간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일리안을 보자,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나를 보고 있었다.

살짝 휘어진 눈매가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여유로웠다.

그러나 나는 정작 그의 눈빛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쉬이 읽었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녹안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은 경멸 그 자체였다.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재밌네.”

“흐음?”

“너, 귀족이 싫어?”

“귀족 상해죄를 저지른 이가 귀족이 좋을 리가 없겠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사람을 죽인다고 그 계층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아.”

“귀족이 싫어?”

일리안에 대한 조사는 이미 그가 내 방에 온 날에 리건을 통해 끝났다.

2년 전 사라진 발체터 왕국 출신의 연금술사.

한때 국왕이 아끼던 연금술사였으나 갑자기 어느 날 한 귀족가의 씨를 말린 죄로 죽음의 협곡에 감금.

단순한 귀족 살해죄였다면 죽음의 협곡에 갇힐 일은 없었다.

왕국의 율법에 따라 처벌하면 되니까.

일리안이 마탑의 재판부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받게 된 진짜 이유는 그가 마력석을 이용해 ‘마력 중독’ 현상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연금술사, 그중에서도 실력이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만이 일으킬 수 있는 ‘마력 중독’은 결론적으로 마력을 이용해 사람을 잠식해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술식이었다.

다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마치 독에 당한 것처럼 죽음을 맞이하기에 ‘마력 중독’이라고 일컬어졌고, 현재는 마탑에 의해 완전히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이 사건은 나도 몇 년 전 얼핏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뒤로 안 그래도 각종 부패와 사치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발체터 왕국은 왕실의 주축과 귀족들을 잃어 완전한 파멸에 이르렀다.

물론 일리안의 행위가 아니었더라도 이미 썩어 빠져 망할 왕실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에게 무슨 크게 당한 거라도 있어?”

“글쎄. 크게 당했다라. 딱히.”

누가 봐도 ‘딱히’라고 얼버무릴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애초에 대답을 하고 싶지 않은지, 일리안은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뒤편에 남긴 채 차분하게 말했다.

“뭐, 그렇다면 됐고. 하지만.”

“…….”

“네 원망이 어쨌든, 내 앞을 막는 건 절대 용납 못 해.”

말을 마친 나는 완전히 시선을 앞으로 한 뒤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일리안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표정이 어떤지 보지 않고도 알 거 같아 나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확실히 귀족에게 원한이 있어.

그렇게 속으로 읊조리며 가던 나는, 복도의 끝과 함께 아까 전 내가 들어왔던 홀이 보이자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2층으로 올라갈까?”

“그건 좀 문제 있지 않냐? 1층이면 모를까 2층까지는? 예법에 심각하게 어긋나는 거 아닌가?”

우리 중에서 가장 예법 따위를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하시스가 그리 말했을 정도로 확실히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지금은 긴 복도로 통하는 옆문으로 들어온 데다가 시종들이 대부분 정원에 가 있지만, 2층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들어온 이상 한번 올라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지금 기분으로는 온 김에 저택을 아예 뒤집어 조사하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하시스가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너무 욕심부리지 마. 괜히 책잡혔다가는…….”

말을 잇던 하시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나 또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누가 있어?’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잠잠하던 주위에서 묘하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을 증명하듯 나와 하시스가 입을 다물기가 무섭게 일리안이 중얼거렸다.

“이런, 엿듣는 쥐새끼가 있네.”

“히익!”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크게 헛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엿듣는 실력이 별로인가 보군.

‘누구지?’

나는 입을 다물고 천천히 인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대리석에 구두 부딪치는 소리가 홀을 울렸다.

기척을 숨기는 법도 모르고, 꽤 허술한 것 같았으나 그래도 만에 하나 바로 입을 틀어막을 생각으로 마력을 모았다.

곧 천천히 기둥으로 다가가다 그대로 성큼 내디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법을 발현하려던 나는, 정작 내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 멈칫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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