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32화 (32/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2화

마그릿의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난감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했다.

‘흐음.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나온 건가.’

이유야 모르겠지만 나는 굳이 여기서 더 시간 낭비를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어린아이들과 싸워 봤자 의미도 없으니까.

나는 다시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마그릿이 기둥을 힐긋 보고는, 다시 앞장섰다.

* * *

정원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이 와 있었다.

애초에 마그릿을 내세운 상황에서 볼품없이 어른들이 와글와글 모여 나 하나를 가운데 놓고 몰아세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그릿과 비슷한 나이대의 영애나 영식들이 주를 이룰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가든파티에는 의외로 내 또래의 아이들도 꽤 모여 있었다.

“에슈트 황녀 전하와 오라버니분들께서 오셨습니다.”

마그릿의 달콤한 목소리에 모두가 하던 것을 멈추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공자님들을 뵙습니다.”

나는 그들을 쭉 훑었다. 다소 앳된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새삼스럽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동안은 원로원의 이들을 견제하느라 그들의 아이들에게는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기껏해야 후계자들에 한정되었을 뿐.

‘어린 귀족들의 수준은 원로원의 미래를 반영하지.’

언젠가는 이곳에 있는 이들이 귀족가의 중심이 될 것이다.

빠르면 십 년, 늦으면 이삼십 년.

그렇게 생각한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처음으로 영애와 영식들과 함께하는 자리라, 이렇게 함께할 수 있어서 내가 더 영광이다.”

“황녀 전하, 이쪽으로 드십시오. 전하의 왕림을 위해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어.”

물론 나를 신경 쓰게 될 것이지만.

말을 마친 나는 마그릿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정원에 들어갔다.

뒤에서 하시스와 일리안이 잘 따라오는지 힐긋 보자, 무심코 눈을 마주친 일리안이 안심하라는 듯이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물론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마그릿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정원의 한쪽에 자리 잡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였다.

시원하게 그늘이 진 나무 아래에는 우아한 드레스와 정장을 맞춰 입은 영식과 영애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마그릿과 비슷한 나이거나 마그릿보다 조금 어렸다.

물론 형제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들도 있기는 했다.

“전하, 이곳은 원로원 소속 가문의 자제들입니다. 오늘 황녀 전하를 뵙기 위해 특별히 모였답니다.”

“내가 이자들을 보기 위해 특별히 온 것이겠지. 영애, 말은 그리하는 것이 아니야.”

정원에 들어오기 전 일부러 꾸몄던 미숙한 말투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 특히나 말투와 발음, 목소리 때문에 당한 게 많은 나로서는 그리 굴 수밖에 없었다.

마그릿은 내 말에 다소 당황한 듯싶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실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가 결례를 범한 것은 맞았다.

그러자 그때, 갑자기 무리 중에서 한 소년이 입을 열었다.

나이는 대략 십 대 후반, 누군지 내가 모르는 걸 보니 일단 장남이나 후계자는 아니었다.

“과연 황녀 전하십니다. 이리 예법에 통달하시다니, 어린 나이에.”

“그런가?”

“아버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폐하와 꼭 닮으셨다고 했는데, 폐하께서도 그리 영특하셨다고요.”

“…….”

“역시, 아버님께서 그리 전하를 칭찬하실 만합니다.”

그 순간 속이 싸해졌다.

현재 황제가 어린 시절 어떤 취급을 받았고, 어찌 평가를 받았는지 이 제국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애초에 그렇지 않았으면 그리 숙청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

그런데 굳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는다고?

내가 나였으니 망정이지, 진짜로 어린애가 이런 말을 들었으면 어땠을지 상상하니 확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일곱 살 꼬마면 이해할 수 있으나 귀족이 저 나이에 저런 짓을 하면 그건 백 프로 고의다.

나는 내 옆에 있는 마그릿을 힐끔, 그리고 그 소년의 주변에 있는 귀족들을 힐끔 보았다.

이 망할 귀족놈들이 진짜로 제 자식을 앞세워 나와 기 싸움을 하려는 것이구나. 그것도 이렇게 치졸한 어법으로.

하긴, 황녀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이들이 예닐곱 살짜리를 눈앞에 두고 비꼬는 것도 그들의 품위상 그리 보기 좋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잘못을 황제가 벌하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겨우 이런 일 때문에 황제가 어린 귀족 자제들을 벌한다?

물론 나는 뻔뻔하므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것을 빌미로 또 안 좋은 여론을 퍼뜨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언제 여론 따위를 신경 썼냐마는, 어쨌든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레르하겐이 두렵지 않나? 그쪽은 상식이 안 통할 텐데. 아니면 자기들이 레르하겐을 상대로 말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레르하겐은 말이 안 통하는데.’

하지만 뭐가 되었든 이들의 행동이 굉장히 멍청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멍청한 건 참아도 남이 멍청한 건 못 참는다.

“진짜로 그대의 아비가…… 그런데 그쪽이 어느 가문이라고?”

내 물음에 말을 꺼낸 소년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웃으면서 답했다.

“켈튼 백작입니다.”

“아, 그래, 켈튼 백작 영식. 그래서, 켈튼 백작이 진짜로 그리 말했어?”

“네, 폐하를 누구보다도 존경한다고, 꼭 앞으로 폐하의 옆에서 폐하를 성심성의껏 보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영식은 후계자가 아니니까. 어마마마는 후계자가 아닌 치들에게 관심이 없으셔. 하도 공사가 다망하셔서 쓸데없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으시거든.”

“쓸데없-.”

“아무튼 백작께서 그리 말하다니, 너무 놀라워. 어린 시절 켈튼 백작의 만행은 나도 들어 보았는데.”

“……어떤.”

“글쎄, 기억이 안 나. 그냥 별로였다는 것만 들었어.”

만행이라는 단어는 써도 되겠지? 괜히 아이처럼 보이려고 쉬운 단어만 쓰고 싶지는 않은데.

속으로 괜히 고민해 보다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켈튼 영식은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듯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애초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 또한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누가 봐도 황녀를 난감하게 만들어라, 정도의 명령을 듣고 나온 게 분명한 이들을 쭉 훑어보며 나는 마그릿을 보았다.

마그릿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으나, 묘하게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런데 레이디 마그릿, 이리 나를 세워 두나? 다리 아픈데. 내 오라비들도 힘든 것 같고.”

“송구하옵니다, 전하. 이쪽으로.”

“송구할 게 뭐가 있겠어. 그럴 수도 있지. 오빠, 앉아.”

“……됐어.”

“나도 괜찮아. 우리 아가씨가 앉아.”

발랄하게 하시스와 일리안을 향해 말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떨떠름했다.

내 방금 말에 뭐가 문제라도 있나 싶었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까 전의 대화 때문인지 나무 아래의 분위기는 묘해졌다.

분위기를 파탄 내 버렸지만 애초에 내가 원한 것이 이거였으므로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로만 하면 집에 가서 그 황녀가 만만한 성격이 아닌 것 같으니 건드리지 말라고 잘 말하겠지.’

애초에 스무 살이나 넘게 먹은 내가 겨우 열댓 살 넘은 이들과 말싸움을 하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내 상대는 이들이 부모들이지 이들이 아니다.

원로원에 올라와서 나와 맞먹는다면, 그때 다시 밟으면 될 것을 굳이 새싹을 쳐 버릴 이유가 있나 싶었다.

물론, 아이를 상대로 시비를 건 이들의 수준을 보건대 앞으로도 딱히 나와 맞먹을 일은 없어 보였지만.

어쨌든 아까 전의 대화 때문인지 더 이상의 도발은 없었다.

가든파티에 어울리게 각종 가십거리가 오갔고, 그 사이에서 아이들은 열심히 먹을 것을 먹고 있었다.

간간이 학문적인 토론-그래 봤자 겨우 학술원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지만-이 오갔으나 그 또한 지루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재미있는 게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마그릿의 태도였다.

“어머나, 마셸 자작 영애, 그 브로치는 어디서 주문하셨나요. 정말 아름다워요.”

“제 생일을 맞이해 특별히 보석 공예에 관심을 갖고 있던 어머님께서 직접 만들어 선물해 주셨어요. 아름답지요?”

“부러워요. 저도 그런 모양의 브로치를 갖고 싶었는데.”

“……아.”

“보석상에게 같은 것을 주문 넣고 싶은데, 잠시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마셸 자작 영애라고 불린 영애의 얼굴에 난감함이 깃들었다.

생일을 맞이해 어머니가 직접 맞춤 제작한 브로치를 굳이 보석상에게 넣어 똑같이 맞추겠다니?

누가 봐도 빌려주기 싫은 얼굴이 역력했으나, 그럼에도 마셸 자작 영애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브로치를 떼 넘겼다.

“물론이에요, 애들러 후작 영애.”

“어머, 고마워요. 꼭, 돌려 드릴게요.”

안 돌려줄 거 같은데.

내 경험상 저렇게 가져간 건 무조건 돌려주지 않는다.

이딴 걸 경험으로 터득했다니, 어이없기도 했는데 실제로 나는 어렸을 때 종종 저런 방법으로 아멜리 언니에게 자잘한 장신구를 빼앗겼다.

그리고 애초에 저 브로치는 굳이 빌려 가 똑같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지도 않았다.

귀족 가문의 부인이 취미 삼아 만든 것을 굳이?

나는 입술 끝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하, 재미없어.’

애초에 이곳으로 온 것도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 속에 끼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 목적은 나를 이곳에 초대한 의중을 알아보는 것이었는데 그 목적은 이미 아까 전의 대화로 터득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들은 지금 대화 과정에도 의식적으로 나를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말을 걸면 또 답을 해 줄 것이고, 그 답이 끝나면 아마 저들끼리 다른 주제를 떠벌릴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