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1화
“아. 나오셨네.”
“이제야 끝났냐?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그와 동시에 일리안과 하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오래 기다렸는지, 아니면 내게 반항하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인지 두 사람은 각각 그리 단정치 못한 자세로 벽과 창문에 기대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서 있는 하시스를 보았다.
십 대 후반치고는 꽤 큰 키에 검을 잡아 단단한 체격을 가진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 안에는 흰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아무런 장식도 없는 정장과 반대로 수가 놓여 있어 상당히 우아했다.
목 부근에서 팔랑거리는 얇은 검은색 리본이 다소 이질적으로 보였으나 애초에 맨날 얼굴을 구기고 다녀 그렇지 상당히 잘생긴 데다가 분위기도 있어 얼핏 보면 귀공자 같았다.
흠. 내가 창피할 일은 없겠군.
물론 하시스가 거지꼴로 나타난다고 해도 올해 유행하는 스타일이라고 당당하게 우길 자신은 있지만 그래도 보기 좋은 게 좋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창밖을 보고 있는 일리안을 힐끔 보았다.
평소와 달리 긴 백금발을 땋아 늘어뜨린 그는 하얀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위로 청록색과 금색의 수가 자잘하게 놓여 있어 하시스와 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일리안이 시선을 돌리며 빙그레 웃었다.
“예쁘네.”
“아부 떨지 마.”
“들켰어?”
“너무 노골적이었어.”
“이런.”
“오늘 둘 다 제대로 행동해. 아니, 그냥 행동 자체를 하지 마. 그냥 내 뒤에 있다가 이상한 점이 있으면 말해. 알겠지?”
“알았어.”
하시스는 쯧 혀를 차더니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곧 리건이 다가왔다. 그는 하시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리안을 노골적으로 마뜩잖은 시선으로 보았다.
리건이 누군가를 이렇게 싫어하는 티를 내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으나, 일리안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닌지 그저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알았어. 가자.”
원래라면 기사들을 거느려야 했으나 내가 거절한 터라 일행은 꽤 단출했다.
그나마 워프하는 데까지는 기사들을 데리고 가겠지만, 실질적으로 후작가에 가는 것은 우리 셋뿐이었다.
어차피 실력 있는 기사들은 황제 직속 중앙 기사단에 있었고, 그 기사들이 아닌 이상 데려가도 나 혼자 싸우는 것보다 효과가 덜할 게 뻔했다.
오히려 그들이 보고 있으면 위험에 부딪칠 때 마음 놓고 싸우기도 애매하고.
그렇게 마차에 오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약간의 이동이 있은 뒤 마차는 바로 애들러 영지로 향했다.
“그런데 진짜로 워프를 쓸 거면 왜 마차에 앉냐?”
“인간들의 세상은 원래 그렇게 허례허식으로 넘쳐나는 거야. 그리고 말했잖아. 정해진 지점까지 워프한 뒤 마차로 이동한다고. 함부로 남의 영지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돼.”
“예법 때문에?”
“그렇지.”
“귀족들은 정말 불편하게 사는군.”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그때, 옆에서 보고 있던 일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귀족만큼 편하게 사는 이들도 없지.”
“뭐라고?”
“아니야. 그냥 해 본 말일 뿐이야.”
일리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마차 밖이 환해졌다. 그 순간,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호오-’ 길게 감탄했다.
애들러 후작령은 기실 수도와는 꽤 거리가 먼 곳에 있었다.
물론 원로원 귀족들은 대부분 수도에 자신의 저택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파티를 열거나 할 때는 자신의 영지에 있는 본저택으로 초대했다.
마차는 꽤 빨리 후작저 앞에 도착했다.
의외로 꽤 규모가 큰 가든파티인지 마차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황실 마차가 등장하자마자 귀족들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후작저의 대문이 열리고, 저택 앞에 멈추자 문이 열렸다.
먼저 마차에서 나간 것은 하시스였다.
그 뒤를 일리안이 능숙하게 따라 나가고 이내 내가 마지막으로 나가려고 하자 일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아가씨, 조심해?”
그의 달콤한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시녀들이 얼굴을 붉혔다.
하긴, 당장 초상화로 박제한 뒤 팔면 수입이 괜찮을 것 같은 얼굴이긴 하지.
옆에서 하시스가 문을 잡아 줬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옆으로 밀려난 마부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오라버니들과 사이가 좋으시군요.”
그때였다.
꽤 달콤하면서도 가녀린 음성이 귀에 들어왔다.
아무리 초대장에 영애의 이름을 썼다고 해도 당연히 애들러 후작 부부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목소리의 주인은 의외로 다른 이였다.
“마그릿 애들러입니다, 전하. 이리 왕림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마그릿 애들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있었다.
하시스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으니 열여덟 정도 되었을까.
소녀와 여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화려한 금발을 절반 묶고, 리본이 자잘하게 달린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예쁘장한 인형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등장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그것은 마그릿의 문제보다는, 이 상황에 그녀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던 것이다.
‘아무리 황녀라도 그렇지, 가주 부부가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고?’
물론 가든파티의 초대장을 보낸 건 마그릿이었으나 처음으로 황녀를 맞이하는 자리에 그녀만 얼굴을 들이민다는 것은, 과한 결례는 아니었지만 그리 예법에 들어맞는 상황도 아니었다.
시작부터.
나는 속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내 어린 시절을 봐 왔던 귀족들이 나를 어찌 취급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내 힘에 눌려서 꼼짝 못 하지만, 어쨌든 나를 업신여겼던 과거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후작 부부가 마중 나오지 않다는 것은 기선제압이겠군. 굳이 따지자면 그리 예법에 어긋나지도 않고, 그저 성의 문제니 꼬투리를 잡기도 힘들고.’
아무리 내가 황녀라고 해도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였고, 이런 자잘한 예법을 내가 신경 쓸 리가 없다.
-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으나, 아쉽게도 틀려먹었다.
“후작 부부는? 후작 부부는 어디 있어?”
내 약간 앳된 티가 나는 물음에 당한 전적이 있는 일리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 보였다.
마그릿은 내 물음에 노련하게 답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공사가 다망하셔서, 조금 있다가 귀가를 하실 예정입니다.”
“후작은 뭐가 그렇게 바빠서 내가 오는 걸 알면서 집에 없어? 우리 어마마마보다 더 바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우리 어마마마도 내가 오면 마중하러 나오시는데, 아니면 드래곤 로드인 우리 아빠보다 더 바빠?”
물론 이 세상에 레르하겐보다 안 바쁜 사람은 웬만해서 찾기 힘들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마그릿은 내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던 듯했다.
그러나 원래 순진무구하면서도 직설적인 언사는 아이의 특권이었고, 나는 그 특권을 써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마그릿이 우아하게 웃으며 답했다.
“결례를 용서해 주세요. 아버님께 전하겠-.”
“됐어. 그럴 필요 없어. 그래서, 가든파티는 어디서 열려?”
“전하.”
“됐다니까. 겨우 그런 걸로 화 안 내. 그리고 나도 후작 같은 못생긴 아저씨보다는 예쁜 언니가 좋아.”
이건 좀 진심이었다.
솔직히 여기서 애들러 후작을 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다만 마그릿에게 이 말을 전하면 후작에게도 들어갈 것이고, 뭐, 그 뒤의 생각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겠지.
마그릿은 내 말에 받아쳐 봤자 자신에게 이득이 없음을 깨달았는지 그저 입을 꼭 다물었다.
그녀의 눈빛에 약간의 마뜩잖음이 깃들었다.
물론 다시 노련하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하. 두 귀공자님들께서도 이쪽입니다.”
곧 나는 일부러 발랄하게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우리를 따라오던 하시스가 살짝 허리를 굽혀 내 귀에 속삭였다.
“날을 너무 세우는데?”
“쟤네가 갈아 준 날이야. 당연히 쟤네들한테 세워야지.”
하시스는 내 말에 미묘한 얼굴을 했다.
이윽고 우리는 함께 애들러 저택으로 들어갔다. 시녀와 시종들이 도열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예법은 다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가장 짜증 나게 만들었다
귀족들의 수작질은 언제나 이러했다. 그들은 언제나 예법의 테두리 안에서 적당하게 선을 타며 상대를 무시하곤 했다.
그리고 기분이 나쁜 티를 내면, 상대를 예법도 모르는 무식한 이로 몰아갔다.
그나마 지금은 내가 황제의 딸이고, 황권이 강해 대놓고 배척하지 못할 뿐.
이래서 사람이 권력이 있어야 한다니까.
속으로 읊조리며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저택 홀의 끝 기둥 뒤에서 언뜻거리는 인영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저건 뭐야?’
비록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둥 뒤에 있는 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것은 어른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기둥 뒤에서 삐쭉 튀어나온 몽실몽실한 토끼 귀를 빤히 보았다.
‘애들러 후작가에 딸이 더 있었나?’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실례인 상황이었다. 차라리 방에 있었다면 모를까, 황녀가 직접 온 상황에서 저렇게 모습도 안 드러내고 숨다니. 결례가 따로 없었다.
“황녀 전하?”
마그릿은 내가 움직이지 않자 작게 나를 불렀다.
흐음, 나는 기둥 뒤에 있는 자그마한 인영을 보다가 입을 뗐다.
“동생이 있어?”
마그릿은 내 물음에 그제야 눈치를 챈 듯했다. 그녀가 멈칫하더니 이내 조금 석연찮은 얼굴로 답했다.
“아…… 그렇습니다.”
“저 기둥 뒤에서 뭘 하는 거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기둥 뒤에 있던 인영이 움찔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마그릿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