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0화
“흑마법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건 알 수 없어. 하지만 설사 흑마법과 관련이 없이 단순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한번 가 볼 필요는 있지 않아?”
리건은 내 말에는 동의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 서린 탐탁잖음은 꽤 노골적이었다.
“얼굴 풀어. 겨우 초대장 하나야.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기 싸움해서 이기고 오면 좋잖아. 혹시 알아? 운이 좋으면, 더 좋은 걸 건질 수도 있고.”
“더 좋은 거라니.”
“뭐, 나를 떠보는 거든 아니면 나를 견제하는 거든, 어느 쪽이든 내가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지.”
이것은 진심이었다.
나는 손에 들린 초대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답장해, 가겠다고. 대신 홀로는 안 가.”
“누굴…… 저는 안 됩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폐하의 보좌관인데.”
“알아. 그리고 애초에 네가 올 수 있어도 너 안 데려가. 애들러 후작가는 델멘 공작가와 막역한 사이야. 그런 집안에서 너를 어떻게 볼지 내가 빤히 아는데 어떻게 널 데려가?”
“그럼 누굴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리건의 얼굴에 의문이 비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답했다.
“글쎄…….”
“…….”
“내 별 쓸모없는 오빠들?”
* * *
“미쳤냐? 우리가 거기를 왜 가?”
“이런, 가든파티라. 꼭 가야 돼?”
하시스와 일리안은 꽤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시스의 앙칼진 반항이야 이미 예상을 했던 상황이지만 일리안마저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왜, 못 갈 이유라도 있어?”
“흠. 가든파티면…… 아무래도 전부 귀족들이지?’
“그런데?”
“죽일 것 같아서.”
“…….”
죽인다는 말을 꺼낸 것은 본인이면서 정작 일리안은 세상에서 더없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하시스가 입을 딱 벌렸다.
‘이 자식 정상 아니지?’
나는 그렇게 말하는 하시스의 눈빛을 무시하고 다정하게 일리안을 향해 웃어 주었다.
“안 가면 과연 아무도 죽지 않을까?”
안 가면 네가 죽는다는 말이었다.
화사한 미소와 반대로 음산한 내 목소리에 일리안이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미소 위로 설핏 흘러가는 약간의 동요에 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하시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들러 후작가가 왜 나를 초대했는지는 몰라. 정치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고, 사실 나도 그게 제일 크다고 봐.”
“그럼 너 혼자 가면 되잖아.”
“하지만 애들러 후작가는 고위 귀족 중에서 델멘 공작가와 꽤 친한 가문이야. 그리고 델멘 공작가는 나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아.”
“좋지 않다고? 네 보좌관이 그 가문 소속 아니었나?”
“그렇긴 한데, 내놓은 자식이야.”
“왜. 성에 안 차나?”
“아니, 그 반대.”
하시스는 누가 봐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어차피 그를 이해시킬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애들러 후작가도 나를 이 꼴로 만든 범인일 가능성을 고려해야 해. 이 시점에서 초대장을 보내온 의도가 무엇인지 멋대로 확정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리고 이 녀석은 바로 그 범인과 접촉을 해 봤으니까. 그리고 만약 애들러 후작가에 그 범인이 있다면, 이 녀석은 알아볼 거야, 그렇지?”
“아. 뭐, 얼굴을 확실히 아는 건 아니라서 어렵긴 하지만 전혀 불가능 하지는 않지.”
일리안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발견하게 되면 반드시 아가씨한테 보고해야 하는 거고.”
“봐, 들었지? 그래서 그러는 거야. 얘가 쓸모가 있거든.”
“그래서, 나더러 이 녀석 감시를 맡으라고?”
“눈치는 빠르네. 맞아. 진짜로 흑마법과 연관이 있든 없든 어쨌든 나는 그 사람들을 상대해야 해. 그런데 얘까지 감시할 여력이 어디 있어?”
“하아.”
하시스는 입을 꽉 다물고 이마를 짚었다.
그의 성정에 가든파티까지 헤벌레해서 따라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마 일리안은 겉으로나마 친화력이 좋아 보였지만, 사실 이 둘 모두 다른 의미로 그리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손에 들린 초대장을 까닥이며 고개를 삐뚜름하게 옆으로 젖혔다.
그 삐딱한 표정과 자세에는 오늘 내 요청을 거절하면 인생에서 거절당하게 해 주겠다는 뉘앙스가 다분했다.
결국 하시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뭐, 가긴 해 줄게.”
“선심 쓰듯 말하지 마. 넌 무조건 가야 돼.”
“하지만 가서 귀찮은 일은 없다고 약속해.”
“그걸 내가 약속해 준다고 뭐가 달라지나?”
“야.”
“하지만 애들러 후작가에서 초대한 건 나고, 사실 너희 둘은 공식적으로 레르하겐의 아들이니까 별로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문제는 나지.”
“너도 공식적으로 스승님의 딸이다.”
“하지만 더 공식적으로 황제의 외동딸이지. 뭐, 황제도 나고 딸도 나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 내가 황제와 드래곤 로드가 낳은 딸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거야.”
“왜?”
“골치 아프니까. 지금까지 인간들과 이종족들은 거의 간섭을 하지 않고 살았어. 그런데 이번에 그 룰이 깨졌어. 인간이 컨트롤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들어온 거야.”
“그럼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나?”
“원래라면 그래야 하겠지만, 문제라면 로드님이 너무 일을 크게 벌여서…… 되레 경계심을 부추겼어. 그러니까 뭐든 적당해야 하는데.”
괜히 억울해졌다.
애초에 내가 그를 소환한 것도 귀족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던 것인데, 정작 그가 이렇게 난리를 쳐 귀족들이 더 달라붙을 줄은 몰랐지.
‘뭐, 물론 덕분에 자연스럽게 귀족들에게 접근할 구실은 생겼지만.’
전화위복이라 치자.
이제 나는 정신 승리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아까 전부터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일리안이 묘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아가씨.”
“정말이지 그 아가씨 소리.”
“황제잖아.”
“……그래서?”
“황제면, 귀족들 우두머리 아닌가? 왜 그렇게 귀족들과 기 싸움을 하려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악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일말의 악의도 없는 얼굴이 되레 내 심기를 강하게 건드렸다.
나는 약간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게나 말이야. 어쩌겠어. 그들이 자꾸만 시비를 걸어오는데.”
“폭군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러니까. 폭군이 뭔지 자기들끼리 말해 놓고도 모르는 거야.”
일리안은 내 대답에 미묘한 얼굴을 했다.
굳이 내가 어린 시절 어떤 취급을 받았고, 그래서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어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어쨌든 사흘 뒤야. 준비는 셀라에게 하라고 할 테니 너희들은 시간만 비워 둬.”
“하아. 귀찮아.”
“그런데 진짜로 내가 가서 귀족들을 죽이면 어떡하지, 아가씨? 그럼 큰일 나겠지?”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너는 내 손에 큰일이 나겠지.”
나는 일리안의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귀족이랑 원수라도 졌나, 귀족 상해로 죽음의 협곡에 들어갔다고 하는 게 아주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하지만 그것은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바로 관심을 껐다.
* * *
내가 애들러 후작가의 초대를 받았다는 소식과 그래서 하시스를 좀 빌려 쓰겠다는 말에 레르하겐은 마음대로 하라는 말만 남겼다.
애초에 레르하겐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은 예상하지도 않았는지 하시스는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을 했다.
“애들러 후작가는 어디에 있지?”
“제국의 남동쪽에 있어요. 워프로 그 부근까지 갔다가 마차로 이동할 거예요.”
“굳이?”
“아무리 황가의 사람이라도 다른 귀족의 영지에 바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실례니까요. 황제라면 이 땅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황녀는 그러면 안 돼요.”
“인간은 귀찮군.”
“인간이 귀찮은 게 아니라 귀족이 귀찮은 거죠.”
다리의 존재 이유가 그저 키 커 보이기 위한 것쯤으로 보이는 레르하겐에게는 확실히 그렇게 느껴질 법했다.
“일단은 일리안을 좀 써먹을 예정이에요. 최소한 한 번은 본 사람이니 눈치는 채겠죠. 어쩌면 저쪽에서 눈치를 챌 수도 있고.”
물론 일리안을 다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약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고, 설사 일리안이 교묘하게 피해 간다고 해도 하시스가 눈치를 챌 것이다.
‘저번에 보니까 흑마법 정도는 상대할 수 있던데. 역시 드래곤 로드의 제자라는 건가.’
어쨌든 사흘 뒤 가든파티 당일, 나는 준비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다.
아이가 된 뒤 처음으로 하는 외출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돼.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 앞으로 다가온 셀라가 손에 든 회색 케이프를 내 몸에 둘러 주었다.
“나중에 더우면 벗으세요. ……제가 따라가야 했는데.”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오빠들도 올 거고, 가든파티에는 따로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있어.”
당연했다.
셀라가 있으면 아무래도 더욱더 활동이 불편할 것이다.
그나마 근래에는 그녀가 내 시중을 드는 것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하나 괜히 내 옆에 딱 붙어 있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셀라는 마지막으로 내 머리를 만져 주었다.
위로 높게 묶은 뒤 달아 놓은 검은색 리본이 팔랑거렸다.
그 아래로 무릎을 조금 넘는 하얀색 외출복에 옅은 회색의 케이프.
검은 에나멜 구두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다가 나는 새삼스럽게 셀라가 내 취향에 맞추는 것에 능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오라버니들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벌써?”
나는 어젯밤 예복을 가져다줄 때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하시스와 묘한 표정의 일리안을 상기했다.
누가 저더러 사교 활동을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따라오라고 했을 뿐인데, 출발 전날까지 그러니 사실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의외네. 끝까지 안 가겠다고 난리를 칠 줄 알았더니.’
나는 속으로 읊조리며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