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29화
나는 살짝 고개를 젖혀 햇빛을 가로막은 장본인을 보았다.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이 며칠간 나를 ‘골치 아프게’ 만든 장본인, 레르하겐이었다.
“뭐 하는 거지?”
“로드님이야말로 이곳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언제나 후원에 계셨으면서.”
의외의 등장이었다.
하나 레르하겐은 대답 대신 시선을 들어 내가 나온 온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선물받은 온실 속 새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세드리거로군.”
“세드리거?”
“수인족이 보내 준 것인가?”
“혹시 저 머리가 셋 달린 새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맞아요. 아는 새인가요?”
“수인족의 영물이다. 세 머리가 각각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지.”
“오.”
예상 밖의 기능에 나는 눈을 빛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나는 바로 실망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말을 못 한다.”
“……그럼 그 능력이 무슨 쓸모가 있죠?”
“그래서 말하지 않았나. 영물이라고. 진짜로 쓸모가 있으면 영물로 쓸 게 아니라 점치는 데 써먹었겠지.”
이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말을 마친 레르하겐이 느긋하게 온실을 응시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게 다 로드님 때문이에요.”
“또 내 탓인가.”
“그러게 그런 명령은 왜 내리셨어요? 보면 도우라니. 듣자마자 기함했잖아요.”
그나마 일단 올리프스가 건네준 왕관을 보관할 장소를 찾고 이것저것 배치를 하면서 진정을 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면 진즉에 레르하겐에게 찾아가서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레르하겐은 그게 그렇게 큰 문제냐는 듯이 무심한 얼굴을 했다.
“명령은 아니었다.”
“가급적 도우라고 했잖아요.”
“가급적이라고 했다.”
“로드님 같은 존재의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건 그들 몫이겠지.”
진짜 오만해.
나는 피식 웃으면서 일부러 비꼬듯 말했다.
“로드님을 보면 저런 왕은 되면 안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아랫사람을 마구 부려 먹다니.”
“그런 것치고 보좌관 괴롭히는 능력이 일품이던데.”
“그건 리건이니까요. 원래 리건은 갈구라고 있는 존재예요.”
리건이 들었다면 당장에 사직서를 열 장 써서 낼 법한 말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레르하겐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의 투명하리만치 차가운 벽색 눈동자에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왜요?’ 눈으로 묻는데 레르하겐이 흐음 길게 숨을 내쉬더니 입을 뗐다.
“무기 연습은 잘되나? 요즘 후원에 나오지 않던데.”
설마 그것 때문에 온 건가?
레르하겐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근래에 후원에 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갑자기 연습을 게을리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후원은 채찍을 휘두르기에 다소 좁아서, 일부러 따로 연무장에 가서 연습했어요.”
“그런가.”
“왜요, 제가 게으름이라도 피울까 봐요?”
“딱히.”
그렇게 말하고 레르하겐은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바로 사라질 것 같던 그는, 나를 힐끔 보더니 온실을 향해 턱짓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세드리거는 말을 못 한다.”
“……네? 아, 방금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하지만 말을 알아들어.”
“…….”
“알아서 잘 써 봐라.”
말을 마친 레르하겐이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이걸 알려 주려고 온 거야?’
그게 아니면 왜 후원에 오지 않았는지 확인하려고?
어느 쪽이든 그것은 내가 알고 있던 레르하겐과 다소 결이 달라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결국 그저 레르하겐이 우연히 지나가던 길이겠거니, 라는 내가 생각해도 별로 신빙성 없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물론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비록 그의 행동에 뒷골을 잡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에게 도움을 청한 뒤로 의외로 일이 하나하나씩 풀려나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레르하겐과 소통하는 건 좀 어려웠지만.
‘어휴. 조금만 상식적이었으면 내가 흔쾌하게 받아들였을 텐데.’
기실 나는 그렇게까지 타인의 호의를 거절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나는 욕심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그저 헤실거리면서 받아들이기에는 레르하겐의 행동이 나날이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는 내가 1 정도의 충격에 적응해질 무렵 2 정도의 충격을 안겼고, 내가 거기에 익숙해지면 3 정도의 충격을 안겼다.
혹시 일부러 이런 식으로 나를 단련이라도 시키려는 것인가? 이러다가 뒤통수를 치지는 않겠지?
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방 앞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방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리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올 시간이 아닌데?’
일단 황제의 보좌관이니만큼 황녀와 자주 만나는 것도 좋지는 않아 리건은 대개 저녁과 아침 보고만 하곤 했다.
그 외에는 집무실에서 일상적으로 업무를 하거나 했고, 방에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당당하게 왔다는 것은 필시 ‘황녀 에슈트’에게 볼일이 있다는 것.
어차피 이 며칠 동안 끊임없는 선물 세례를 경험해 본 나는 의례 또 뭐가 왔겠거니 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에 리건이 조심스럽게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초대장입니다.”
“초대장?”
리건의 말마따나 그가 쥐여 준 것은 하얀 편지 봉투였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 뒤를 따라온 리건이 문을 닫고 입을 열었다.
“애들러 후작가에서 온 것입니다.”
“애들러라면.”
델멘 공작가를 따르는 가문 아니던가?
나는 리건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색이 서려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초대장 자체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델멘 공작가에서 내놓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리건은 자신의 가문과 연루된 모든 일을 싫어했다.
언제나 헤실거리며 깐족대다가도 가문과 관련된 일에는 제 성질을 하나도 숨기지 못하곤 했다.
나는 사시미로 편지를 찢었다.
안에는 달콤한 딸기향이 나는 카드가 들어 있었다.
애들러 가든파티.
황녀 전하의 왕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그릿 애들러.
“마그릿 애들러?”
나는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얼핏 사교계 데뷔 파티에서 들었던 것 같은 이름이었다.
애들러 후작가의 첫째 딸이었던가.
천재라고 들었는데, 그렇다기에는 딱히 들려오는 소식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그저 또래 애들보다 똑똑한 수준인 듯했다.
“애들러 후작가에서 왜 갑자기 초대장을? 그것도 딸이?”
“아마도 이번 사건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원로원에서 경계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건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콧잔등에 진 주름에 안경이 살짝 들렸다.
나는 쯧 혀를 찼다.
“얼굴 풀어. 무슨 이런 일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그래도.”
“델멘 공작가 일당들이 황실, 아니, 나를 견제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 그런데 갑자기 딸이 나타난 데다가 심지어 드래곤 로드의 관심을 받는 딸이라니. 더 불안했겠지.”
“……하아.”
“드래곤 로드는 거의 영생을 살고, 그 딸이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귀족들은 영원히 황실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진실이 무엇이 되었든 귀족들의 눈에는 드래곤 로드, 신이나 마찬가지인 존재가 갑자기 황실을 비호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존재라면 모를까, 억겁의 시간을 사는 드래곤 로드의 힘은 필시 귀족들을 영원히 맥도 못 추게 할 테니까.
솔직히 이 정도야 레르하겐을 아버지로 만들면서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
물론 그때는 레르하겐이 이 정도 파장을 일으킬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그동안 잠잠하던 귀족들이 갑자기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제 나름대로 이번 왕관 사건으로 내가 모든 종족들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다소 꺼림칙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초대장이라니. 애 하나 불러서 기 싸움이라도 할 기세인 건가? 한심하군.”
“애들러가 영애의 이름으로 왔습니다. 아마 파티 주역은 아이들일 겁니다.”
“애들러 후작가라. 그냥 안 가도 되긴 하겠지만.”
나는 눈알을 데굴 굴렸다.
애들러 후작가는 꽤 중앙에서 입김이 있는 가문이었다.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나는 그들을 잘 알고 있었고,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그들 또한 나를 이렇게 만든 혐의가 있기는 하다는 것이다.
다만 다른 가문과 달리 애들러 후작가는 그 권세에 비해 언제나 조용한 편이었다.
나는 초대장을 빤히 응시했다.
이 초대장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부 아니면 견제.
어느 쪽이든 그들이 초대한 것은 나였고, 나는 현재 황제 에스트리아의 딸이었다.
이런 나를 불러들여 모욕을 줄 만큼 그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잠자코 있을 만큼 착하지도 않았다.
“세베르에게서 보고 온 거 있나?”
“대공 전하께서 기사단으로 복귀하신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며칠 동안 원로원으로의 복귀 때문에 바쁘실 겁니다.”
‘세베르의 보고를 더 기다려 볼까 생각했는데, 그것만 믿고 가만히 있을 순 없겠어.’
게다가 요즘 세베르는 꾸준하게 기사단장으로, 그리고 켈리어드 대공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필요한 보고를 하긴 했지만 흑마법과 관련된 정보를 갖고 오지는 않았다.
물론 이제 겨우 며칠이나 지났다고 바로 결과를 요구하는 것도 웃기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하던데, 의외로 꽤 잠잠했다.
‘혹시 일부러 한동안 잠자코 동태를 살피려는 건가. 하긴, 내 방에 침입자까지 보낸 이를 괜히 자극해서 좋을 건 없지만.’
아, 그러고 보니 일리안.
나는 초대장으로 턱을 톡톡 쳤다.
이걸 어떻게 할까.
물론 이대로 가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오는 도발을 굳이 막을 필요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