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28화
“뭔데?”
“‘보면 도와라.’.”
“……?”
“전 차원의 모든 종족들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앞으로 황녀 전하를 발견하게 되면 가급적 길을 내 주고, 위험에 처하면 가급적 도우라고.”
“…….”
“물론, 진짜 가급적 하라는 의미로 알아듣는 이는 없을 겁니다.”
당연하다.
왕이 ‘가급적 하라’는 말도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네 목도 ‘가급적’ 쳐 버리겠다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였다.
하물며 레르하겐은 모든 종족들에게 거의 신이나 마찬가지이니 그의 명령을 그저 ‘흠, 시간이 나면 도와야겠군.’이라고 이해하는 자는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나는 저도 모르게 속이 떨리고 말았다.
“그럼 이 차원의 모든 이들이…….”
“네. 이곳에 존재하는 종족들 중에서, 에슈트 님의 앞을 막을 자는 없습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뒷골을 잡았다.
아니 물론 나를 도우라고 하는 것은 좋았다. 그런데 지금 온 차원이 내게 길을 내어 줄 것이라고?
왜? 대체 왜!
귀찮은 거 싫어한다고 했잖아.
물론 황제가 된 뒤 내 앞을 막아 왔던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 내에서 황제로서의 위엄으로 내가 가는 길이 트여 있는 것과 이렇게 전 차원과 종족들이 내게 길을 내 주는 것은 엄연히 결이 다른 문제였다.
올리프스는 내 충격받은 얼굴에 허허 웃으면서 다시 몸을 돌렸다.
곧 은은한 연두색 빛과 함께 올리프스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어머, 황녀 전하.”
나는 결국 이마를 짚은 채 절망하고 말았다.
‘내 잘못이야. 레르하겐을 부르는 게 아니었어. 그냥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할걸.’
속에서 피눈물이 나왔으나 후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결국 나는 생각 없이 드래곤 로드의 딸인 척하기로 한 내 멍청함을 천 번쯤 욕하고 말았다.
* * *
드래곤 로드가 요정왕에게 딸의 왕관 제작을 명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보면 도와주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놀라지 않을 구석이 없는 소문은 삽시에 차원을 들끓게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은 곳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원로원이었다.
황녀 에슈트의 갑작스러운 등장부터 큰 충격을 맛보고 있던 그들은 에슈트에게 생각 이상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자 슬슬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이 상황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는 다름 아닌 원로원의 귀족이었다.
“델멘 공,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오늘 요정왕이 제국에 다녀갔다고 합니다.”
“들었소. 그야말로 요란하기 그지없었다고 하더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입니까. 겨우 일개 황녀에게, 그것도 정당성도 없이 황위에 오른 치의 딸에게 이런 대우라니.”
“드래곤 로드가 명했다고 하지 않나. 제 딸이니 끔찍하게 여기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아.”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델멘 공작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불쾌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있는 귀족들은 전부 에스트리아를 탐탁잖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이유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정당성’ 때문이다.
애초에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전부 선황이 어떻게 그녀를 대했는지 봐 온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에스트리아는 여전히 언니 오빠들에게 맞고도 찍소리 한번 못하는 멍청한 어린아이였고, 제 외할아버지의 힘을 빌려 황위에 오른 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이 에스트리아를 무서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위에 오른 뒤 선황의 외척 가문이 어찌 숙청됐는지 보았다면, 감히 그녀에게 반기를 들 이는 없을 것이니까.
제 이름 하나 말하지 못해 더듬거리던 어린아이는 어느 순간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그 광경은 이곳에 있는 이들을 공포에 몰아넣음과 동시에 깊은 경멸을 느끼게 했다.
“애초에 그때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로원을 피로 씻어 버린 치를 어찌 황제로.”
“제 아비를 죽이고 형제자매를 죽인 치입니다. 그런 패륜적인 치가 황제가 되더니 이제는 드래곤 로드를 등에 업고…….”
“갑자기 딸이라니, 말이 됩니까? 어찌 제국의 황제가 드래곤과 아이를 낳을 생각을.”
“아니 그전에, 설마 그 황녀를 황제로 올릴 예정은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드래곤 로드를 등에 업은 황녀라니, 끔찍하군요.”
“그것보다도, 혹시라도 드래곤 로드가 황제에게까지 힘을 빌려 주면 어떡합니까.”
“어떡하겠소, 드래곤 로드는 영생을 사는데. 이 제국에서 귀족이 기를 펼 수 있는 날은 다 사라진 것이지.”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도 마십시오.”
“이래서 그런 어수룩한 게 황제가 되는 걸 막았어야 했는데. 방심하고 있다가 제 외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그런 짓을 할 줄이야.”
“그만.”
그때였다.
조용하게 귀족들의 담화를 듣고 있던 델멘 공작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비록 임시 수장이긴 하나, 이 몇 년간 델멘 공작은 엘비어츠 공작가와 켈리어드 대공이 빠진 원로원의 실세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모두가 델멘 공작의 말을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의 침묵이 지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아주 귀족들이 무능한 치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지 그래.”
“크흠.”
“지금 상황에서 논의를 해야 할 것이 과연 그것들인가?”
“하오나 공작 각하, 어쩌시겠습니까. 가만히 내버려 두자니 거슬리고, 그렇다고 손을 쓰자니 견제할 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겨우 권력을 위해 드래곤 로드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목숨이라도 위험해지면 어쩌시겠습니까.”
“방법이 없기는 왜 없나.”
“혹시 무슨 뾰족한 수라도…….”
순간 델멘 공작에게 기대 섞인 시선이 떨어졌다.
델멘 공작은 그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그가 입을 열었다.
* * *
레르하겐의 미친 행위가-물론 본인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불러온 파장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일단 나는 제국을 뛰어넘어 전 차원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그것도 모자라 어딜 가나 주시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 며칠간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황제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관심을 보이던 이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내게 접근을 시도했다.
물론 나는 그런 접근을 전부 다 칼같이 잘라 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의 거짓 섞인 아부까지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차마 자르기가 애매한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종족들이었다.
노골적으로 이득을 취하고자 내게 접근하는 이들과 달리 이종족들의 접근은 다소 결이 달랐다.
일단 그들은 내 궁에 오래 있지도 않았고, 심지어 인간들보다도 더 예법과 격식을 차려 황궁에 방문했다.
게다가 나를 보는 그들의 눈에는 내게서 무엇인가를 얻어 가려는 목적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결국에는 인간과 다른 종족.
성의와 호의로 가득 찼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들이 보내온 선물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곤 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
“셀라, 너한테는 이게 뭐로 보여?”
“새…… 아닐까요?”
“진짜로 새로 보여? 머리가 세 개 있는데?”
“그래도…… 새지요?”
화사한 햇살이 스며드는 온실.
나는 팔짱을 끼고는 다소 미묘한 얼굴로 오늘 아침 내게 배달된 정체불명의 생물을 보았다.
은색의 커다란 조롱과 함께 내게 보내진 황금빛의 새는 다름 아닌 세 개의 머리를 갖고 있었다.
이른 아침 하시스가 가져다준 이것은 다름 아닌 수인족이 보낸 선물이었는데, 제일 처음에는 혹시 이것들이 나를 암살하려고 이러는 게 아닐까 고민했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그나마 내가 마법을 쓰기 전에 하시스가 급히 말해 주지 않았다면, 황실에 들어온 선물을 난도질하는 큰일을 벌일 뻔했다.
나는 살짝 시선을 옮겨 그 옆에 눈이 부실 정도로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았다.
어제 꽃의 정령인지 하는 이들이 보내온 꽃들은 듣기로는 물을 주지 않아도 백 년 동안은 핀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어느 이름 모를 드래곤이 놓고 간 것이다.
- 네가 로드님의 딸이라고? 로드님한테 제발 좀 종족 회의에 한 번만 참석해 달라고 해 줘. 얼굴을 뵌 지가 오백 년이야.
그렇게 말한 그는 호탕한 웃음을 흘리며 갑자기 선물이라며 박제된 마물 표본을 던지고 사라졌다. 황궁에 걸어 두면 액운을 쫓아낸다는 말과 함께.
‘그냥 저 표본이 가장 액운 같은데.’
어쨌든 그렇게 이 며칠 사이에 온실은 그야말로 내게 온 선물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하아. 온실 터지겠네. 이게 다 그놈의 ‘아빠’ 때문이야.”
결국 나는 아이가 된 뒤 가장 아이 같은 말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선물을 받아서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골치가 아팠다.
이 며칠 동안 황실에 찾아온 이종족들이 못해도 스물은 될 것이다.
그들 중 하나만 제국에 와도 그야말로 역사에 기록될 일인데, 거의 줄을 서서 들어왔으니.
‘어른으로 돌아가고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물론 걱정의 말을 내뱉으면서도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분으로 치자면, 약간 묘했다.
그래, 미묘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아무런 이유도 없는 친절에 대한 거부감과 기대감이 섞여서 나는 결국 체념 섞인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래 뭐, 적의보다는 낫겠지. 그게 전부 이종족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이 예상 밖이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셀라에게 말했다.
“그거 정리하고 있어. 새는 튀어나오지 못하게 잘 잠그고.”
“알겠어요.”
“난 먼저 방에 갈래.”
곧 나는 온실에서 나왔다.
눈부신 햇살이 내 얼굴을 따갑게 찔러 댔다.
그에 눈을 찡그리는데, 문득 내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