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27화
나는 세베르의 떨리는 눈가를 상기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그런 얼굴도 할 줄 아는 녀석이었던가.
그 녀석도 인간 같은 얼굴을 할 때가 있구나.
그게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후원의 고요함을 깨뜨리고 레르하겐이 입을 열었다.
“왕관이 완성됐군.”
“정말 뜬금없는 주제지만 이제는 적응하도록 할게요. 왕관이 완성되었다고요?”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왕관에 대해 까먹었다. 하긴,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서 왕관 따위가 대수인가.
어쨌든 완성이 되었다니, 나는 복잡한 문제는 일단 머리 한구석으로 치워 버리고 입을 열었다.
“어디 있는데요?”
“곧 가져올 거다.”
“누가요?”
“올리프스.”
올리프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말을 마친 레르하겐은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올리프스가 누구지? 들어 본 것 같은데, 드래곤인가?”
결국 나는 내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하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시야에 들어온 하시스의 경악과 어이없음이 가득한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올리프스가 누군데?”
“너, 큰일 났다.”
“무슨 소리야? 똑바로 말해.”
“요정왕이야.”
“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이어서 들려오는 그의 말은,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요정왕이라고, 요정족 중에서 최고령 장로지. 스승님을 제외하고 타 종족에게 가장 존경을 받는 존재다.”
“…….”
“스승님께서 그분께 네 왕관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도 모자라, 귀찮으니 직접 가져오라고 한 모양이군.”
“…….”
“황궁에 소란이 좀 일겠는걸? 아, 황궁이 아니라 세상이 난리 날 것 같군.”
그렇게 말한 하시스가 힘내라는 듯이 내 머리를 톡톡 치고 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후원 한가운데에서-.
“미친 거 아니야?”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그렇게 외치고 말았다.
사실 내게 있어 이종족은 그리 생소한 편이 아니었다.
물론 살면서 인간 외의 종족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이 꽤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아르시스는 이종족과의 교류가 꽤 활발했고, 나 또한 즉위 이후 나름대로 대부분의 이종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유일하게 요정족만큼은 예외였다.
태생적으로 자연을 신앙하는 그들은 자신만의 영역 의식이 강했다.
드래곤 다음으로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존재해 온 이들로서 요정족들은 인간을 경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드래곤과는 또 다른 오만함이었는데, 그래서였을까, 인간들은 종종 요정족들에 묘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로드님, 진정해 보세요. 우리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요. 인간적으로 요정왕이 제 왕관을 들고 직접 온다는 게 말이 되나요?”
“왜 안 되지?”
“일개 황녀의 왕관일 뿐이에요.”
“일개라.”
“아, 물론 저는 보통의 황녀와 다르지만, 일단 대외적으로 황제도 아니고 황녀의 왕관을 그렇게 특별하게 만든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나는 열변을 토하며 레르하겐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레르하겐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는지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별로.”
“…….”
“꽤 합리적이라고 본다.”
그에 나는 되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게 어떻게 합리적이지?
내가 알기로 현존하는 요정왕은 팔백 살이 넘는, 이종족들도 존경하는 장로급이었다.
팔백 살이라는 게 어떤 의미냐면, 왕립 아카데미 역사책의 고대사 부분에 등장한다는 의미였다.
참고로 레르하겐은 제1장 ‘차원의 창조’에서 겔라와 나란히 나온다.
아무튼 이건 절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내 말에도 레르하겐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이틀 뒤, 나는 인간 최초로 요정왕을 눈앞에 무릎 꿇리게 되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건 절대 내 의지가 아니다.
“위대한 드래곤 로드의 따님을 이 비천한 왕이 뵙습니다. 부디 자연과 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내 앞에 있는 요정왕, 올리프스를 응시했다.
긴 세월을 살아왔음을 증명하듯 주름진 얼굴에는 그야말로 자애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온몸을 감싼 하얀 로브에 하얗게 바랜 백발은 뒤로 넘기고, 잎사귀를 닮은 은은한 연두색 눈동자는 신비롭기 그지없었는데, 조금 뾰족한 귀 때문일까, 누가 봐도 인간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는 그가 마치 자연의 헌신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을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도 경건한 그 모습이 나뿐만 아니라, 소문을 듣고 온 황궁의 식솔들조차 경악시켰다.
“지금 비천한이라고…….”
“쉿. 황녀 전하시잖나.”
“그래도 어떻게 요정왕이 무릎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훑었다.
그 순간, 황제일 적 하던 눈빛을 보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내가 황녀라 그랬을까 다들 삽시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일단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곧, 입을 열었다.
“이리 찾아와 주어 나 또한 영광이야.”
사실 원래대로였다면 일국의 황제로서 당연히 그에게 동등한 경의를 바쳤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국의 황녀라 해도 그에게 반말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현재 레르하겐의 딸로 이곳에 서 있었다.
물론 말을 마친 뒤 올리프스의 안색을 한번 살피긴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였다.
“왔군.”
언제 왔는지 코트 자락이 펄럭거리며 만들어 낸 작은 바람과 함께 레르하겐이 내 뒤에서 나타났다.
나는 이 상황의 모든 원흉인 주제에 태평하기 그지없는 그를 탐탁잖게 힐긋 보았다.
그러나 내 옆에 선 그는 아예 내 말을 무시한 채 입을 뗐다.
“왕관은?”
“완성되었습니다.”
레르하겐은 살짝 턱짓했다.
올리프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두 손을 뻗었다.
그의 양손 사이에 하얀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반짝이는 왕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
왕관은 과하지 않고 딱 예쁠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졌으나, 그 화려함은 여타 왕관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실력으로는 만들지 못할 만큼 정교했다.
투명하고 작은 다이아몬드로 이뤄진 가는 백금 줄은 마치 장미 덩굴처럼 화려하게 뻗어 제각각의 유려한 곡선을 만들고 있었다.
그사이에는 저번에 레르하겐이 주워 왔다는 보석들이 마치 꽃처럼 세공되어 박혀 있었다.
여러 가지 색깔로 빛나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왕관에 어우러져 매혹적이기 그지없었다.
하나 그것보다도 더욱 이목을 끄는 것은, 다름 아닌 왕관의 정중앙에 박힌 새빨간 보석이었다.
‘저건 뭐지? 저런 건 본 적 없는 거 같은데.’
나는 저도 모르게 왕관에 홀린 듯 보다가 의문에 빠졌다.
요정족들이 세공 과정에 추가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조용하게 왕관을 보고 있던 레르하겐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어?”
레르하겐은 느긋하게 올리프스의 손에서 왕관을 들었다.
왕관을 살펴보던 레르하겐이 갑자기 그것을 내 머리 위로 턱 얹었다.
“이게 뭐 하는…….”
“잘 어울리는군. 그냥 쓰고 있어라.”
레르하겐의 말에 나는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이렇게 화려한 왕관을 이렇게 대충 얹어 놓고는 기껏 한다는 말이 어울린다고?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과한 행동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지?
진짜로 레르하겐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에게는 이게 아무것도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왕관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주인을 그대로 찾아간 듯, 왕관은 흔들림 없이 머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잘 어울리는군요.”
“고마워. 수고했어.”
내 버릇없는 말투에도 올리프스는 허허 웃었다.
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다들 이미 경악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나는 체념하듯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임시 황녀 노릇을 하는 것뿐인데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존재를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지금으로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벌어진 일.
인사치레라도 하는 것이 좋을 성싶어 나는 입을 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귀한 손님을 이리 보낼 수는 없지. 어마마마께서도 보시면 기뻐하실 거야.”
“아닙니다. 제 임무는 왕관을 드리는 것. 초대받지 않은 곳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괜찮을 텐데.”
이것은 진심이었다.
비록 그를 맞이하는 것은 인형이겠지만, 요정왕을 문전 박대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올리프스는 생각 이상으로 완강했다.
그저 자신의 임무는 딱 왕관을 전달하는 것뿐임을 강조하듯, 내 머리 위에 있는 왕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요정족들은 자신의 영역에 타인을 들이지 않는 것만큼 타인의 영역에도 발을 들이지 않습니다.”
“어.”
“물론 오늘은 레르하겐 님의 특별한 명령에 이리 왔지만, 저희는 본디 자연과 어우러져야 하는 요정들. 이리 오랜 시간 동안 저희 땅을 버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에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사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요정족들은 그야말로 영역 의식이 모든 이종족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이리 와 주다니.
설마 레르하겐이 힘으로 억지로 끌어낸 건가?
그런 짓은 나만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레르하겐도 잘 쓰는 건가, 따위의 쓸모없는 생각을 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젠가 정식으로 초대하도록 할게.”
“영광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레르하겐은 그대로 사라졌다. 그야말로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진 행보에 나는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을 했다.
일단 황녀로서 나라도 올리프스를 배웅하는 성의를 보여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그 자리에서 올리프스가 떠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천천히 몸을 돌리던 올리프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로드님께서 명하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