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26화 (26/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26화

“그게 사실입니까?”

세베르의 목소리는 과하게 불안정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마치 온갖 감정을 그대로 욱여넣은 듯 위태위태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모습만 봐 온 나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이 세상에 그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는 이가 있을까.

‘설마.’

나는 너무 당연하게 그의 충격이 흑마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 여겼다는 것이고, 그것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이라는 것이었다.

“그럼, 폐하는 깨어나실-.”

“당분간은 어렵다. 가끔 의식이 돌아오긴 하지만 대부분은 잠들어 있으니.”

“…….”

“에스트리아는 지금 누구도 만날 수 없어.”

“깨어날 수는 있는 겁니까?”

“글쎄. 그걸 해결하려고 내가 이곳에 있는 거겠지.”

“…….”

“그래서, 이걸 밖으로 알릴 건가?”

레르하겐의 물음에 세베르가 입매를 굳혔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충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차가운 얼굴 위로 비낀 감정은 이제 그가 천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런 세베르의 얼굴을 보다가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 계획과는 많이 어긋난 상황에 당황스러웠으나 지금은 나설 수가 없었다.

세베르가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저 그것이 그의 기사도 정신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여겼다.

이 또한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흑마법에 당해 의식을 잃었다는 것이, 세베르 켈리어드를 저렇게 동요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만 아니면 모든 것이 납득이 갔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계획이 틀어지긴 했으나 그래도 일단 세베르의 반응을 보니 아예 엉망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을 거듭하고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어마마마의 방을 습격한 이가 있어.”

세베르는 갑자기 울린 내 목소리에 움찔했다. 그가 다시 미간을 좁히고 서늘하게 읊조렸다.

“누굽니까, 그자가.”

“얼마 전에 내 첫째 오빠라고 발표한 이야. 그자가 어마마마의 방을 습격했어. 그리고 그 배후에는, 어마마마를 저렇게 만든 자가 있을 거야.”

“지금, 침입자를-.”

“맞아, 받아들였어. 어마마마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거든. 적이 보낸 미끼랬어. 그걸 어떻게 물지 않겠냐던데.”

“……그런 무모한.”

“어마마마는 원래 무모했어.”

“황녀 전하.”

“무모하지 않았으면, 황제가 되지 못했을 거야. 그건 대공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

역사상 형제자매를 숙청하고 황제가 된 이가 몇이나 되던가.

권력 암투도 없고, 치밀한 계략도 없이 말 그대로 피로 얻어 낸 황좌였다.

그 피의 무게를 나는 견뎌야 했고, 그것이 내가 권력을 갖는 대가였다.

세베르는 내 말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과거 그와 만난 건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 때였고, 그는 예닐곱 살 때의 내 얼굴을 몰라 그가 내 정체까지 꿰뚫어 볼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어마마마가 흑마법에 당했다는 걸 밖에 알려도 좋아. 하지만 그렇게 되면 대공이 사랑하는 이 제국은 순식간에 모두의 공격 대상이 돼.”

“…….”

“어쩌겠어?”

이쯤이면 세베르 켈리어드도 알아들었겠지.

아니나 다를까, 세베르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곧 그가 레르하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제 알현을 받아 주신 이유가 이겁니까. 흑마법을 조사하라고?”

“에스트리아의 계획은 원래 이게 아니었다. 알잖나, 에스트리아가 너를 불신하는 것. 하지만 네가 인형술을 알아챌 줄은 몰랐다.”

“…….”

“자업자득이라 굳이 말은 얹지 않겠다만 그래도 굳이 한마디 하자면, 선택은 네 몫이다.”

레르하겐의 목소리는 묘하게 아까 전과 달라져 있었다.

낮고 웅글진 느낌은 여전했지만, 말투가 묘하게 세베르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세베르는 레르하겐의 말에 침묵했다.

나는 긴장한 얼굴을 했다.

세베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도 몰랐다. 사실 여기서 알겠다고 해도 밖에서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세베르가 입을 열었다.

“흑마법을 조사하겠습니다.”

“어, 어마마마의 신병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폐하의 안위는 중요한 사항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다만…….”

“……?”

“오늘부로 기사단뿐만 아니라 원로원도 복귀할 겁니다.”

세베르의 대답은 생각 이상으로 깔끔했다.

그의 성정에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전 그가 보인 반응이 조금 예상 밖이라 왠지 모르게 속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 어마마마의 신병에 관한 소문이 돈다면 아빠가 절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어투는 유치했으나 적나라한 협박이었다.

그런 내 말에, 세베르가 쓰게 웃었다.

“그전에, 제가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니까.”

그 실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세베르는 흑마법을 조사하겠다고 승낙을 했고, 나는 그 사실에 그나마 한숨 놓았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내가 아닌 걸 알아본 거지?’

단순히 마력의 흐름을 읽은 거라면 레르하겐의 옆에 있는 내 마력의 흐름을 읽어 내가 에스트리아라는 것도 알아야 했다.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고.

‘설사,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물론, 답은 없었다.

* * *

“너무 무모했어요!”

알현을 마친 뒤 세베르는 기사단으로 복귀했다.

그가 나가자마자 레르하겐과 함께 후원으로 간 나는, 바로 그에게 따져 물었다.

“아무리 그가 인형술을 간파했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면 어떡하죠?”

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하시스가 놀란 눈을 하며 내 옆으로 다가와 몸을 낮췄다.

“왜 그래? 뭐 잘못됐냐?”

“세베르 녀석이 내가 흑마법에 당한 걸 알아 버렸어. 물론 내가 아이가 된 게 아니라, 그냥 흑마법에 당해서 정신을 잃었다고 알고 있지만.”

“뭐?”

“그리고 그걸 알린 게 저 드래곤이고.”

그에 하시스가 자연스럽게 내 검지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 끝에 서 있는 레르하겐의 무심한 표정을 보다가, 상황을 파악한 듯 이마를 짚었다.

“스승님.”

“그 상황에서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나.”

레르하겐의 담담한 말에 나는 움찔했다.

결국 나는 입을 꽉 깨물고 칫-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나도 알고 있었다.

레르하겐은 그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생각했던 방법도 그와 별로 다르지는 않았다.

‘흑마법의 공격을 처리하러 자리를 비웠다고 하려고 했는데.’

그러나 기실 이 핑계도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어서 나는 더욱더 화가 났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내 꼬락서니에.

하시스는 그런 내 모습을 보다가 흐음-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내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렇게 후원으로 온 걸 보면 잘 해결되었다는 거 아냐?”

“일단은. 진짜로 잘 해결되었는지는 앞으로 봐야 하지만.”

“그럼 된 거 아니냐. 그 대공이 비밀은 지켜 주겠다고 하든?”

“그래. 하지만 누가 알아, 혹시라도.”

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서 비릿한 향이 퍼졌다.

“……그래, 세베르의 성격상,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이야.”

음험한 성격이었다면 그를 이용해 조사를 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좋다고 레르하겐이 한 모험이 모험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 역시 무모한 도박을 하려고 했기에 결국 푸시식 식고 말았다.

“죄송해요. 짜증 내서.”

내 말에 레르하겐이 눈썹을 까닥였다.

“그게 짜증이었나?”

“아니 근데, 그래도 그렇지. 다음부터는 언질이라도 주세요.”

“생각해 보고.”

“…….”

그래, 거절 안 한 게 어디야. 생각이라도 해 주는 게 어딘가.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일 거다.

다음 생에는 꼭 이종족으로 태어나서 수장이 되어야지.

그런데 다음 생에도 레르하겐은 여전히 저 모습일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시스는 그런 내 표정에 이해한다는 듯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는 드물게 레르하겐의 성정 앞에서 쓸데없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세베르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백성이 공격당했다고 하면 발 벗고 나설 성정이긴 한데, 내가 공격당했다는 말에 그렇게 굴다니.”

“…….”

“나를 인정하지도 않던 녀석인데. 내 일에도 화를 낼 정도로 흑마법을 싫어할 줄이야.”

결국 나는 화제를 돌렸다.

내 물음에 레르하겐은 미미하게 미간을 좁히더니,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어렸을 때 세베르에게 드래곤 목을 갖고 싶다고 한 적이 있나?”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없나?”

내가 미쳤다고 드래곤의 목 따위를 탐내겠는가.

레르하겐의 물음은 언제나 뜬금이 없지만 이번은 유달리 황당했다.

그러나 하시스는 뭔가 눈치챈 듯, 묘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야, 그런데 말이야. 그 대공, 진짜 너와 적인 건 맞냐?”

“당연한걸. 지금이야 황녀가 있다지만, 내가 죽게 되면 황위는 국법에 의해 대공인 세베르에게 갈 거야. 지금 제국에 남아 있는 황실 핏줄이 나밖에 없거든.”

“아니, 내 말은 그 녀석이 진짜로 너를 싫어하냐고.”

“응.”

“정말?”

“응.”

“그럼 너는? 너도 그 녀석을 싫어하냐?”

이번에는 바로 답이 나가지 않았다. 곧, 내가 피식 웃었다.

“당연한 것을.”

하시스는 내 대답에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일단은 세베르의 승낙을 얻어낸 것도 사실이었다.

세베르의 성정에 흑마법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찾을 것이다.

원로원에 복귀한다더니, 그 또한 흑마법 탓이겠지.

내가 습격받았다는 것은 귀족들과 연관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고.

다만.

‘그 녀석이 그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