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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23화 (23/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23화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레르하겐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 그날 오후부터, 갑자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시스에게 물어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 넌 스승님이 어딜 갈 때 우리에게 알려 주고 가는 배려심 넘치는 성격 같냐?

- 아니.

물론 레르하겐이 무조건적으로 황궁에 붙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다만 이틀 뒤면 세베르 켈리어드를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 기왕이면 그의 힘을 좀 빌려 쓰고 싶었던 나는 계획을 고쳐야 했다.

‘이래서 도움을 청한다는 게 귀찮아. 상대에게 뭘 요구할 수 없잖아.’

차라리 레르하겐이 뭔가 대가라도 정당하게 받아 갔다면 이렇게 굴지 않았을 텐데.

이래서 약한 게 싫다니까. 굽히고 들어가야 하잖아.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빵을 조금 더 크게 베어 물었다. 옆에서 셀라가 천천히 드셔야지요, 라고 하는 것이 들려왔으나 못 들은 체하며.

그리고 그날 오후.

내 생각을 눈치챘을까.

나는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정확히 말하자면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내 앞으로 뭔가를 던진 레르하겐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써 봐라.”

“……?”

“손에 익은지.”

레르하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상 위에 무엇인가가 놓여 있었다.

길쭉한 막대기 같기도 하고 레이피어 같기도 한 그것은 한쪽 끝에 화려한 백금 세공이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이게 뭐죠?”

레르하겐이 내게 위험한 물건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의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내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내 주변이 일그러지더니 어느새 나와 레르하겐은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 위에 있었다.

나는 내 뺨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눈을 깜박거렸다.

“워프? 갑자기요?”

“집무실은 무기를 휘두르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지.”

나는 그제야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마도 레르하겐이 내게 무기를 주려고 한 듯한데.

‘그럼 그냥 말로 하면 되지, 굳이 워프까지……. 귀찮은 성정인 거 맞아?’

그러나 어쨌든 내게 실이 될 것은 없다.

나는 바로 손을 뻗어 무기를 잡았다.

‘어?’

휘릭-!

그 순간, 아까까지만 해도 내 팔 한쪽 정도 길이에 불과하던 막대기가 마치 줄처럼 늘어났다.

본능적으로 팔을 뒤로 빼자 늘어난 줄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화려하고 커다란 원을 수십 개 그리며 허공을 수놓았다.

“이건 설마, 채찍?”

익숙한 감각에 나는 무기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내가 쓰던 것과는 조금 달랐으나, 반투명한 빛을 내는 가느다란 줄은 확실히 채찍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손을 들어 채찍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콰콰콰쾅-!

고막을 찌르는 굉음과 함께 바닥이 갈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그 위력에 놀라고 말았다.

게다가.

‘뭐가 이렇게 가볍지?’

아무리 가늘다고 해도 이 정도 길이라면 꽤 많은 마력을 압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위력을 가진 무기의 무게가 겨우 펜 하나 정도 된다고?

조금 놀란 얼굴을 하는데, 레르하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쓸 만한가?”

“이거…… 로드님께서 만드신 건가요? 로드님 마력으로?”

“그래.”

그렇게 말하는 레르하겐의 얼굴에는 뻐기는 듯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인간 기준으로는 박물관에 고이 모셔 두어야 할 정도로 대단한 무기였음에도.

“하.”

나는 어이없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일부러 웃음 섞인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 정말 재수 없어.”

“도와줘도 문제인가.”

“내 열등감과 상대적 박탈감 같은 건 고려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러면 제가 또 슬퍼지잖아요.”

“딱히 슬픈 얼굴은 아닌 듯한데. 억지다.”

“알아요. 괜히 심술이 나서 억지 좀 부려 봤어요.”

“심술이 나?”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게 있으니까요. 즉위를 하고 마법을 배울 때, 마력을 압축하고 또 압축해서 무기를 만든 게 그 정도 무게였는데, 로드님께 이런 무기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흐음.”

“그런데 그게 로드님 탓은 아니니까. 아, 난 왜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지막은 거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진심이 아니기도 했다.

어쨌든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한계를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이 상태를 마뜩잖게 여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레르하겐은 어떻게 내 말을 이해했는지, 이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라 존재 가치가 있지.”

“네?”

“겔라의 입버릇이다.”

겔라? 내가 아는 창조주 겔라?

나는 눈썹을 까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레르하겐은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에 나는 그저 웃어넘겼다.

그래, 내 가짜 아빠가 창조주와 친한 친구일 수도 있지 뭐.

사람이 살면서 그런 경험도 해 보긴 해야겠지.

나는 손에 들린 채찍을 만지작거렸다.

어쨌든 이 무기는 내 손으로 들어왔다.

레르하겐의 성정으로 보아 줬다 뺏을 것 같지는 않으니 안심이지만, 이제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 꽤 고민이었다.

‘아이의 몸이니 민첩도를 늘리는 것이 좋을까? 사실 무거운 걸 드는 게 좀 어려워서 그렇지, 아이의 몸이라도 힘은 꽤 셀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고민하던 나는 곧 채찍을 들었다.

그때, 뒤에서 조용하게 있던 레르하겐이 입을 열었다.

“힘쓰지 마라.”

“힘 안 쓰면 채찍을 어떻게 휘두르죠?”

“마력으로 컨트롤해.”

나는 레르하겐의 말에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다.

물론 마력 무기인 만큼 마력으로 컨트롤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실체화된 무기를 다루는 데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레르하겐을 보았다.

레르하겐은 의문에 가득 찬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곧 팔짱을 풀고 내 옆으로 다가갔다.

이내 나와 시선을 맞춘 그가 살짝 손을 까닥했다.

그 순간 내 손끝에서 뭔가 시원한 감각이 느껴졌다.

내 것이 아닌 마력이 내 손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뭔가 느껴지나?”

“손끝이, 차가워요.”

“내 마력이다. 네 의지와 채찍을 잇는 역할을 하지.”

“내 의지와 채찍을 잇는다고요?”

“채찍을 어느 쪽으로 휘두를 거지?”

“일단 앞으로-.”

“옆으로 조금만 휘둘러 봐.”

나는 고분고분 레르하겐의 말을 따랐다.

딱히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가장 강하니까…….

“어?”

그때였다.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오른쪽으로 채찍 손잡이를 살짝 움직인 나는, 커다랗게 휘감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채찍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원하는 궤적으로 움직이는 거야?’

나는 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바닥을 내리치겠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바로 채찍이 바닥을 가를 듯 내리쳤다.

쾅!

‘이게 가능해?’

힘을 쓰는 것도 아니고, 시동어나 마법진도 아닌데, 그저 생각만으로 채찍이 그대로 움직인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문득 기시감이 들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레르하겐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무심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된 건가요? 로드님께서 하신 건가요?”

“네가 한 거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내 손끝에서 느껴지던 시원한 감각이 사라졌다.

대신, 그 빈틈은 내 마력으로 자연스럽게 채워졌다.

나는 여전히 허공에서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채찍을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비록 아까 전보다 안정성은 떨어지지만, 엄연히 나는 시동어나 마법진같은 그 어떤 배열 과정 없이 생각만으로도 채찍을 컨트롤하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지. 마력이 많을수록 마법 효과가 강해진다고.”

“사실이잖아요.”

“물론 마력의 양이 크게 차이가 나면 그렇다. 하지만 인간들이 타고나는 마력의 양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아.”

“……그럴 리가요, 저만 해도 언니들과 많이 났는데요.”

“마법의 핵심은 마력의 컨트롤이다. 마력을 컨트롤해서, 의지와 융합시켜야 한다.”

“의지와 융합이요?”

“그래, 네 의지와 마력을 그대로 융합시켜,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마력이 행하게 만들어.”

“…….”

“물론 인간에게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넌 최소한의 힘으로 채찍을 움직일 수는 있으니 필요한 건 연습과 노력이다.”

“연습한다고 될까요?”

“안 되면 안 할 건가?”

“그럴 리가요.”

은근히 의문을 품고 있던 나는 레르하겐의 물음에 순간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

하긴, 안 된다고 안 하는 게 말이 되는가.

“원래 약할수록 전투가 요란하고 화려하지. 인간들은 그런 걸 좋아하지만, 나는 싫어한다.”

“왜요?”

뭔가 마법에 관한 큰 비밀이라도 있을까 싶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레르하겐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귀찮거든.”

“…….”

“왜 굳이 몸을 움직이려고 하지? 생각만 하면 다 현실이 되는데?”

나는 문득 그를 처음으로 소환할 때 들었던, 숨 쉬기 귀찮아서 숨을 안 쉬어도 살 수 있는 마법을 연구한다는 혼잣말이 그냥 해 본 말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이 실력이 있으면 이렇게 세상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는구나.’

나는 일국의 통치자로서 나름대로 가치 있는 교훈을 얻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한번 마력을 내 손끝에 주입시켰다.

레르하겐이 하던 것처럼 쉽게 되지는 않아 팔을 조금씩 휘저었다. 그리고 아까 전의 감각을 더듬어 나는 무사하게 채찍을 거둬들였다.

곧 내가 다시 레르하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딱히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그에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설마, 이 며칠간 사라진 게 이것 때문이셨어요?”

“겸사겸사.”

“절 도와주시려고?”

“네가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그렇긴 한데.”

뭐지? 내가 도와 달라고 하면 원래 도와주는 건가? 그냥 무시해도 되지 않나?

“그리고 부러워했잖나.”

“뭘요?”

“내가 아무런 시동어도 없이 마법 쓰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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