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22화
제2장. 새로운 가족에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
에스트리아가 세베르를 처음 만난 날, 그녀는 버려진 궁의 옷장 속에 갇혀 있었다.
그날은 그녀의 셋째 오빠 에딘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황궁의 외톨이답게 에스트리아는 당연히 그 파티에 초대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파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그녀의 언니 오빠들이 그녀의 궁에 우르르 찾아왔다.
“에스트리아, 혼자 궁에 있으니까 심심하지?”
“우리랑 놀지 않을래? 우리, 숨바꼭질할 거거든.”
갑작스러운 친절이었지만 에스트리아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하기에 그녀는 너무 어렸고, 순진했으며 동시에 언제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언니 오빠들의 사이가 너무 부러웠으니까.
결국 에스트리아는 그들과 함께 황궁의 서쪽 끝에 있는 폐궁으로 향했다.
“여기 함부로 들어와도 돼? 여기는, 마담 드베일라의 궁이잖아.”
마담 드베일라는 한때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었으나 반년 전 마차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였다.
모든 이가 그녀의 죽음이 황후가 사주한 것이라고 했으나 증거는 없었고, 결국 그녀의 죽음은 불행한 사고로 처리되었다.
그 뒤로 황제의 명령에 따라 마담 드베일라의 궁은 아무도 접근하면 안 되는 곳이 되었고, 어길 시 엄벌에 처해졌다.
그에 에스트리아가 두려운 얼굴을 하는데, 3황자인 에딘이 다정하게 웃었다.
“괜찮아. 저기 아멜리도 함께 왔잖아? 아바마마는 아멜리를 가장 총애하시니까 괜찮아.”
“진짜?”
“응. 자, 그럼 술래를 정해 볼까?”
에딘의 말에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으나 에스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4황녀 아멜리가 술래로 지정되었다.
한때 숨바꼭질의 술래로 정해졌다가 모두가 말도 없이 자기 궁으로 가 홀로 길을 잃고 헤맨 경험이 있던 에스트리아는 자신이 술래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없이 기뻐했다.
어디에 숨을까 고민하던 그때, 에딘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숨을 데를 알고 있어. 가자.”
에딘이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마담 드베일라의 침실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오지 않아 먼지가 가득 쌓인 방에 들어서자 기침이 나왔다.
에딘이 방 한구석에 있는 옷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숨으면 되겠다. 넌 체구가 작아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옷장에……?”
“응. 저기 들어가면 아무도 널 못 찾을 거야. 생각해 봐, 누가 저렇게 먼지 가득한 곳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겠어?”
“그, 그럼 오빠는?”
“난 키가 너무 커서 못 들어가. 걱정 마. 난 테라스에 숨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저 옷장은 안에서 열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아무 때든 나와도 좋아.”
“…….”
“왜, 싫어?”
에스트리아는 불안한 얼굴로 옷장을 응시했다.
먼지가 잔뜩 쌓인 데다가 심지어 얼룩마저 져 있는 옷장은 밖에서 봐도 꺼림칙해 보였다.
혹시라도 아멜리가 찾지 못하면 그녀는 언제고 저기 숨어 있어야 하는 걸까?
왜 오빠는 나를 이런 곳에 가두려고 하는 걸까.
그러나 에스트리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싫으냐고 물어보는 에딘의 얼굴은 지나치게 싸늘했고, 그녀가 고개를 저으면 바로 그녀를 버리고 이곳을 떠날 것 같았다.
홀로 남겨지는 것이 제일 싫다.
에스트리아는 오랜만에 언니 오빠들과 놀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곧 에스트리아가 옷장으로 들어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테라스의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진짜로 오빠가 테라스에 숨은 걸까. 역시 의심하지 않기를 잘했어.
에스트리아는 속으로 그리 읊조리며 기침을 했다.
그렇게 에스트리아는 먼지 가득한 옷장 속에서 아멜리를 기다렸다.
콜록, 콜록.
먼지가 코안으로 들어와 계속 기침이 났지만 그녀는 나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실수로 아멜리에게 들킬까 봐. 그래서 이 숨바꼭질을 망칠까 봐.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누군가가 옷장을 열어 줄 거라고 믿었다.
옷장의 틈새로,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자정의 종소리만 아니었다면.
뎅뎅-!
이쯤이면 생일 파티도 끝났을 것이다.
에스트리아는 결국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슬프긴 했으나 자주 있는 일이라 그저 ‘이번에도’라는 생각만 들 뿐 딱히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옷장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어? 왜 열리지 않지?
에스트리아는 당황해 입을 꼭 깨물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문을 밀었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탕탕!
손으로 문을 쳐 보았으나 그녀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설마…… 날 이곳에 가두려고?
에스트리아는 그제야 언니 오빠들이 갑자기 그녀를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평소와 달리 과하게 친절하던 오빠, 더럽다고 그녀의 손은 만지지도 않더니 오늘따라 그녀의 손을 잡던 언니, 그리고 묘하게 미소를 짓던 그들.
그들은 애초에 그녀와 놀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은 그녀를 괴롭히려는 계획일 뿐이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그녀는 울며 문을 쾅쾅 쳤다.
“오빠, 문 열어 줘! 내가 잘못했어, 오빠! 거기 아무도 없어요? 열어 주세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으나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고, 어리숙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교정했던 발음도 뭉개졌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공포스럽게 한 것은 언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에스트리아가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녀의 시종과 시녀들은 괜히 재수 없이 저런 주인을 만나서 파티에 참석하지도 못한다고 투덜대며 귀가했다.
그녀의 궁을 지키는 시녀장은 저녁 시간에 황녀의 부재를 눈치챌 정도로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물론 내일 아침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찾기야 하겠지만 이 일이 황제의 귀에 필히 들어갈 것이다.
그럼 마담 드베일라의 궁에 들어온 그녀는 엄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어두워.
옷장 틈새로 겨우겨우 들어오던 빛마저 완전히 사라져 그녀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잠기고 말았다. 그 와중에 비가 오는지, 밖에서는 우레 소리마저 들려왔다.
우르릉- 쾅!
에스트리아는 결국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룻밤만 버티면 된다, 하룻밤만. 그럼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거야.
그런데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그들이 나를 찾아 줄까?
언니 오빠들은 내 행방을 알리지 않을 거야.
그럼 어떡하지?
속으로 온갖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 올라 에스트리아는 숨죽이며 울었다.
우르르릉- 쾅쾅!
다시 한번 우레가 치자 에스트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술이 뜯어졌는지, 비릿한 피 냄새가 입 안에서 느껴졌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잠시 고요해진 틈을 타 낯선 기척이 들려왔다.
에스트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혹시 오빠가 다시 온 것일까?
어쩌면 잠깐 까먹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그녀를 찾아와 준 것일까?
훗날 생각해 보자면 그야말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생각이었으나, 에스트리아는 그 순간만큼은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는 계속해서 커졌다. 그리고 드디어 그것이 멈출 무렵.
끼이익- 문이 열렸다.
“오빠?”
에스트리아가 작게 읊조렸다.
나를 구하러 와 줬어.
그녀의 얼굴에 기대감과 희열이 비꼈다.
그러나 정작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그녀는 제 앞에 길게 드리워진 처음 보는 소년의 인영에 멍해지고 말았다.
“황녀 전하.”
“누, 누구.”
“세베르 켈리어드입니다.”
“……어?”
“모시러 왔습니다.”
애티가 났지만 그럼에도 고귀함이 흐르던 그 정교한 얼굴, 단정한 연회복, 서늘한 목소리와 그녀에게 내밀어진 상처가 덕지덕지 난 손.
그렇게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밤.
에스트리아는 ‘소문’의 켈리어드가의 귀공자, 세베르를 만났다.
* * *
“헉.”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또 꿈인가.
원래 자주 꿈을 꾸는 편이 아닌데 묘하게 요 근래에 꿈을 꾸는 일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의 협곡에서 파동이 일어나고 흑마법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은 뒤, 나는 확실히 평소보다 쉽게 잠이 들었고, 잠이 들면 꿈을 꿨다.
“이번에는 무슨 꿈이었지.”
그래도 유일하게 다행인 점이라면 그날 꾸었던 이상한 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별 의미 없는 꿈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나는 희미한 꿈을 되짚어 보다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왠지 모르게 옷장 속에 갇혀 있었던 것 같은데.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나는 그저 어린 시절 기억 속의 파편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훌훌 털어 버렸다.
어렸을 때 어딘가에 갇혔던 적은 무수했고, 버려졌던 적도 무수해서 그건 이제 악몽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욕실로 들어가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셀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침하셨나요, 황녀 전하?”
“응. 들어와.”
곧 문이 열리고 셀라가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오늘 입을 옷과 아침을 간단하게 가져온 그녀가 내 시중을 들어주었다.
처음에는 꽤 불편했던 것도 이제는 슬슬 적응이 되긴 했다.
게다가 셀라는 생각 이상으로 선을 잘 지켰는데, 처음 의욕이 가득한 모습에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내가 홀로 뭔가를 하겠다고 하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옷을 입고 포크와 나이프를 능숙하게 쓰는 나를 보면서 대견스럽다는 눈빛을 하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곧 목욕을 끝내고 옷까지 갖춰 입은 뒤 아침으로 나온 빵을 베어 물었다.
‘어?’
평소와 달리 달짝지근한 크림 대신 짭조름한 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빵도 있나. 주방장이 새롭게 개발한 건가 싶어 한 입 더 베어 무는데, 내 침대를 정리해 주던 셀라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레르하겐 님이 보이지 않으시네요?”
“응? 아.”
“일리안 님께서 황궁에 오신 뒤로 며칠 동안 보이지 않으시던데, 혹시 다망하신 걸까요?”
셀라의 말에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글쎄, 나도 몰라.”
“황녀 전하도 모르세요?”
“……응.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