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21화
사인은 마력 중독.
그 어떤 연금술사도 해독할 수 없는 수준의 정밀한 마력 충돌은 마력석에 심취해 있던 귀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비가 내리던 그날 밤.
일리안은 죽어 가는 남작을 응시하며 마지막으로 울었다.
그는 절차대로 마탑에 넘겨졌고 종신형이 내려졌다.
장소는 죽음의 협곡. 그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그런데.
- 일리안이라고 했나.
- ……누구지?
- 그건 알 필요 없어. 네가 알아야 할 건 하나다. 내가 이곳에서 널 꺼내 줄 수 있다는 것.
- 필요 없어. 난 이미 복수를 마쳤어.
- 복수는 마쳤지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
- …….
- 제안을 하지. 내 제안을 수락하면 그 대가로 네 부모를 살려 주겠다.
일리안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가 말을 마치자마자 온갖 오물 덩이에 묻혀 있던 쥐의 사체가 살아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 그는 순간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뒤로는 에슈트에게 말한 대로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 에스트리아라. 들어 본 적은 있는데.
- 아주 혐오스러운 계집이지. 권력에 눈이 멀어 제 피붙이를 죽이고 어미에 아비까지 죽였다.
- …….
- 누구는 한평생 보고 싶어 하는 부모를 제 손으로 죽였어. 겨우 권력 때문에. 그야말로 네가 가장 혐오하는 푸른 피의 양상 아닌가.
-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 일단 마력석으로 황궁에 들어가. 그리고 그 뒤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 시키는 대로?
침대 위에 앉은 일리안이 눈을 살짝 감았다.
아까 전까지 그의 앞에서 턱을 치켜들던 아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작달막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오만함과 위엄.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향해 명령하던 남자의 목소리 또한 귓가에서 울렸다.
- 황제를 죽여라.
“아아.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적을 만들까.”
일리안은 다소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작 말의 내용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 * *
이튿날 아침.
마치 어젯밤의 소란은 전부 거짓이었다는 듯이 나는 태평하게 기상을 하고 아침을 들었다.
리건이 ‘이제는 말씀해 주시죠.’라고 아침 보고 시간 내내 끈질기게 물어 와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답해 주었다.
당연히 ‘미치셨습니까?’라는 격식 차린 무례한 대꾸가 들려왔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볍게 무시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이 흐르고 점심이 될 무렵, 레르하겐을 찾아 후원으로 갔으나 생각과 달리 텅텅 비어 있어 나는 지나가는 기사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빠…… 는?”
“오늘 외출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아마 방에 계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기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레르하겐의 방 앞에 도착해 노크를 하려고 손을 올리는데, 마치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갑자기 달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방에 들어가자 레르하겐이 흔들의자에 몸을 누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몸 위로 햇빛이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은은한 달빛이 주는 것과는 또 다른 기묘한 느낌을 내게 선사했다.
햇살 아래 화사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이 기묘한 금색을 흩뿌리는 것 같았다.
태생적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은 저런 것일까.
문득 어젯밤 내 앞에서 흑마법을 상대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기분이 미묘해졌다.
나는 커다란 흔들의자마저도 그대로 삼켜 버린 것처럼 압도적인 그의 분위기에 입매를 살짝 굳혔다.
그때, 고요하던 방 안의 정적을 깨고 레르하겐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그의 목소리는 이 정적 속에서 유달리 깊게 울리는 듯했다. 나는 흐음,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차피 서론으로 시간을 길게 끄는 취미는 없었다.
곧장 입을 열었다.
“도움을 청하러 왔어요. 대가 있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레르하겐이 눈을 천천히 떴다.
햇살을 받아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이윽고 무심하게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가 입을 뗐다.
“도움이라. 무엇을 말하는 거지.”
“그전에 하나만 묻죠.”
“…….”
“날, 해칠 건가요?”
내 질문은 꽤 뜬금없고, 무례했으며 동시에 이상했다.
면전에 대고 나를 해칠 것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해치겠다고 답하는 멍청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었고, 그는 답했다.
“아니.”
“…….”
“그럴 생각 없다.”
그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큰 결심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날 도와줘요. 내가 흑마법에서 벗어나고 어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혼자 한다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바뀌었어요.”
“생각이 바뀐 이유가 궁금하군.”
“내가, 알아 버렸거든요. 내가 어떤 존재를 아버지로 들였는지.”
레르하겐은 조용하게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살짝 얼굴을 굳히다가, 쓰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요, 인정해요. 당신이 내 아버지로 소환된 순간부터 나는 딱히 당신을 믿지 않았어요. 솔직히 그렇잖아. 예전에 한 번 본 존재가 갑자기 와서 도와주겠다니, 그걸 어떻게 믿어.”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요.”
“…….”
“당신은 강해요. 나처럼 이제 겨우 이십 년 조금 넘게 산 인간 따위는 영원히 그 발끝조차 닿지 못할 정도로 강하죠.”
“…….”
“솔직히 부러워요. 나는 인간이고 필연적으로 언젠가 죽을 거지만 당신은 영원하고, 강하고, 무한한 힘을 갖고 있죠.”
“그래서?”
“그래서, 괜히 인간으로 태어난 게 분하고, 샘나고, 억울하고, 질투심마저 들어요.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나도 알아요. 올라가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느낌이니까.”
“흐음.”
“하지만 내가 아무리 부러워해도 바꿀 수 없는 건 없는 거고, 내가 갖지 못한 건 못한 거예요. 그래서 이러는 거예요.”
나는 살짝 턱을 들어 레르하겐과 시선을 마주했다.
“나를 도와줘요.”
“…….”
“당신의 강함은 내가 경계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차라리 당신의 힘을 빌리고 싶어요.”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이 며칠 동안 그를 한껏 불신했고, 심지어 혼자 처리하겠다는 말을 남긴 주제에 이제야 겨우 그의 강함을 알아보고 이렇게 부탁을 하다니.
그야말로 인간의 뼈에 새겨진 강함에 대한 숭배가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천박하고 마땅하지 않은 것이든, 인생의 반절을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힘당했던 내게 레르하겐의 강함은 도움을 청할 만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이 며칠간 나를 도와준 건 사실이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로드님 덕분에 제가 어젯밤 무사하게 살아남았잖아요.”
“딱히 도와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하지만 도움이 되었죠. 너무 분한데 흑마법은 제가 고군분투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거 같아요. 정말 분하지만.”
“…….”
“그러니까.”
나는 숨을 골랐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완전히 적의 코앞에 던져졌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가급적 살아남는 것밖에.
“도와줘요. 대가는 치를게요.”
결국 나는 내 자존심을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딱히 모욕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더 강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을 뿐.
하지만 어쩌겠는가.
적은 이미 일리안을 내 옆으로 보냈다.
그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든 내 일거수일투족이 적에게 노출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야말로 불공평한 게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원래 불공평했고, 나는 그 불공평을 부숴 버리고 내 손으로 게임의 승자가 된 이였다.
가끔은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 되기는 했다. 비록 입안이 쓰기는 했지만.
나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레르하겐이 이런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생을 살아온 불멸자로서 나 같은 존재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그래,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게 뭐 어때서.
승패의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겨 왔다는 것이고, 생존 앞에서 자존심보다 더 하찮은 것은 없다.
그렇게 속으로 읊조릴 때였다.
“그래.”
방 안의 정적을 깨고 흘러나오는 레르하겐의 승낙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시야에 들어오는 레르하겐의 모습에 잠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그가 웃고 있었다.
그저 흔히 보이는 실소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은은하게 비낀 그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레르하겐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흑마법을 푸는 것을 도와주지. 단, 조건이 있다.”
“말씀하세요.”
어차피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라 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갑자기 레르하겐이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지 말 것.”
“……네?”
“내 조건은 그것이다.”
생각 외의 조건에 나는 조금 의아해지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이타적인 인간으로 보였나?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래. 그러면 가장 좋고.”
“…….”
“받아들이겠나?”
받아들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제안은 내가 한 것이므로.
“그래요.”
내 말에 레르하겐의 벽안이 묘한 기색으로 빛났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그 눈빛에 나는 왠지 모르게 미묘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레르하겐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강했고, 나는 그가 필요했으며, 그는 나를 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 부탁드려요, ‘아빠’.”
나는 살짝 턱을 들고 손을 내밀었다.
레르하겐은 다시 무심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뭐, 그러지.”
그렇게 화사한 햇살이 스며드는 여름날, 내 말도 안 되는 가족 놀음은 그렇게 정식으로 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