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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20화 (20/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20화

하시스는 내 말에 입을 딱 벌렸으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일리안을 향해 읊조렸다.

“손바닥 내밀어.”

일리안은 순순히 손을 내밀어 줬다.

하긴 안 내밀면 어디를 찔릴지 모르는 상황이니 그럴 만도.

주르륵.

곧 눈 깜짝할 사이에 일리안의 손바닥에 한 뼘 정도의 상처가 생겼다.

그 상처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마법진 위에 투두둑 닿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금빛으로 빛나던 마법진 위로 갑자기 새빨간 바람이 일었다.

그 회오리 사이에서 나는 조용하게 서 있었다.

피의 언약은 모든 마법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언약이다. 그리고 마력 소모가 하도 커서 웬만해서는 잘 하지 않는 언약이었고.

그러나 솔직히 이 정도 마력은 내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라트레비아체(언약 완성).]

작게 시동어를 읊조리자 순식간에 붉은색 바람이 수그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일리안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사슬이 쨍그랑 깨졌다.

“잘 부탁해.”

나는 일리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 목숨을 걸고 말이야.”

일리안은 그런 나를 떨떠름하게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언제 그런 눈빛을 했냐는 듯이 그가 다시 여유롭게 웃었다.

“그래, 잘 부탁해, 아가씨.”

* * *

일리안과의 언약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하시스는 여전히 탐탁잖은 얼굴을 했고, 레르하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내가 하는 것을 마냥 지켜보기만 했다.

언약이 완성된 뒤 무너진 방을 복구하려던 나는 문득 외부의 공격에도 아무도 내 방에 오지 않았음을 상기하고 일단 내 방을 감싸고 있을 마력부터 파훼하려고 했다.

그에 발코니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레르하겐이 나를 저지했다.

“나가지 마라. 공간 왜곡이다.”

“네?”

말을 끝내자마자 갑자기 거센 강풍과 함께 아까까지만 해도 폐허가 되어 있던 방 안이 순식간에 평소와 다름없는 모양으로 되돌아왔다.

그야말로 언제 그런 소란이 일어났냐는 듯이 고요하기 그지없는 발코니 밖의 풍경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레르하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굳이 더 말을 붙이지는 않은 채, 리건에게 마법 전보를 보냈다.

몇 분 뒤, 리건이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내 방에 왔다.

“이제는 하다 하다 새벽에 부르시는 겁…… 저자는 뭡니까.”

그 와중에 옷만큼은 반듯하게 차려입은 리건은, 방 안에 갑자기 나타난 일리안을 보고 안경을 고쳐 썼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 위로 비낀 경계의 눈빛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첫째 오빠야. 인사해.”

“……?”

내 황당한 인사에 리건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는 마치 방 안의 분위기를 파악하듯 하시스와 나, 그리고 레르하겐의 얼굴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 방에 있는 그 누구도 그에게 해명을 해 줄 만한 성격이 아님을 깨닫고 포기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방으로 안내하라는 말이죠?’

“난 적절할 때 발휘되는 네 눈치가 좋아.”

“따라오십시오.”

원래라면 시녀장이 했을 일을 하면서도 리건은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그러나 방을 나가려는 순간, 그가 뭔가 눈치챈 듯 멈칫했다.

“폐하, 얼굴의 상처는.”

“아, 별거 아니야.”

“피 나는데요?”

“피 처음 봐? 잔말 말고 저 녀석이나 방으로 데려가. 자세한 건 내일 아침에. 피곤해.”

리건은 피곤하다는 말에 더 말을 얹지는 않았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그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다시 한번 방은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손으로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자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 이제-.”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하게 서 있던 레르하겐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에 멈칫하다 다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고민에 빠진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하시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는 안 나가?”

“야, 너.”

그러나 하시스는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되레 물음을 던졌다.

“무슨 생각이냐? 이렇게 무모한 짓을 왜 해?”

“무모?”

“진짜로 살려 두고 싶으면 감옥에 가두는 수도 있어. 아니, 애초에 그게 더 합리적인 방식이야. 그런데 너는…… 아니, 그전에 저 녀석이 한 말을 믿냐?”

그렇게 말하는 하시스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니, 전혀.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저 녀석이 한 말 중에 진실이 있다면 그건 죽음의 협곡에서 온 죄수라는 것밖에 없어. 솔직히 그것도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

“그럼 왜!”

“하지만 재밌잖아?”

“……뭐?”

순간 하시스가 기막힌 얼굴을 했다.

나는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하시스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먹잇감이야. 굳이 놓칠 필요가 있나 싶은데.”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런 것도 있고, 너도 눈치챘을 텐데.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저 먹잇감이 얼마나 많은 단서를 물어다 줄 수 있는지.”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됐고, 좀 나가. 피곤해.”

하시스는 내 태도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야 그럴 만했지만, 나는 더 이상 길게 말을 얹지 않았다.

결국 하시스가 한숨을 푹 쉬더니 내 머리를 헝클어 놨다.

“정말 모르겠다. 꼬맹아, 넌 너무 무모해.”

“쓰읍. 또!”

“잘 자라.”

말을 마친 뒤 하시스가 내 방을 나갔다.

나는 혀를 차며 닫힌 문을 응시했다. 그러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입을 꼭 다물었다.

나는 다시 한번 시선을 발코니로 돌렸다. 아까 전의 전투 흔적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공격한 흑마법의 기운은 생생하게 내 몸에 남아 있었고, 동시에 나를 겨냥하던 그 칼의 살벌함 또한 그대로였다.

온몸을 타고 올라오던 생생한 무력감이 나를 괴롭혔다.

하나 동시에, 그 모든 무력감을 상쇄시키던 레르하겐의 마법을 상기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짜증 나.”

나는 쓰게 웃으며 결국 고개를 돌렸다.

‘정말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겠지.’

결국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며 나는 침대로 돌아갔다.

물론 잠은 오지 않았다.

* * *

“이곳입니다.”

예상보다 훨씬 더 화려한 방은 갑자기 나타난 야밤의 침입자에게는 과한 곳이었다.

방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환하게 빛나는 샹들리에를 보던 일리안은, 제 뒤에서 서늘한 얼굴로 서 있는 청년, 아마도 황제의 보좌관일 자에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 아, 뭐라고 불러야 하지?”

“리건입니다. 폐하의 보좌관을 맡고 있습니다.”

아까 전 방에서 보였던 다양한 표정과 달리 그야말로 극도로 싸늘하게 식어 있는 보좌관의 눈빛에 일리안이 신기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이 준수한 청년은 제 주인의 앞에서만 꼬리를 흔드는 개인가 보다, 생각한 일리안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 난 일리안이야. 나이는 너랑 비슷하니까-.”

탁.

일리안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리건은 그대로 방문을 닫았다. 일말의 여지도 없는 냉정함에 일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주변을 돌아보며 묘하게 웃었다.

“아, 진짜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금은 사라진 약소국 뒷골목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운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태어날 때부터 잔병치레를 자주 했던 그는 언제나 약을 달고 살아야 했고, 그의 부모는 책임감은 있었으나 돈은 없었다.

결국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눈 한번 감고 뛰어든 마차에는 이름 모를 귀족이 타고 있었다.

갑자기 귀족의 마차에 뛰어든 뒷골목의 천민들.

평소였다면 마부가 은화 한 닢을 던져 주고 지나갔을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평소였다면 꿈쩍 않았을 마차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나온 귀족은 입술을 짓이기며 읊조렸다.

- 기분도 더러운데 잘됐군.

그 뒤로는 별것 없었다.

귀족의 발길질은 매정했고, 그의 주먹은 잔인했다.

부모는 콜록대는 아이 앞에서 맞아 죽었고 그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처참한 죽음에는 애도도 없고 장례도 없었다. 귀족의 명령에 기사들이 시체를 들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는 일상이었고, 더럽고 오물 가득한 뒷골목은 평범했으며, 쓰레기통에 버려진 한낱 천민의 시체는 당연한 것이어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이는 그날 부모의 시체 옆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 뒤로 아이는 한동안 뒷골목을 전전했고, 우연하게 연금술의 재능을 발견했으나 연금술을 가르쳐 줄 이는 없었다.

그의 재능은 뒷골목에서 소매치기를 하는 데 쓰였고, 딱히 수확이 없는 날에는 돌멩이를 은화로 보이게 만들어 먹을 것을 샀다.

제대로 된 스승 없이 연금술을 배운 탓에 이론적인 지식은 전무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그야말로 최고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는 소년이 되었고, 어느 날 그의 앞에 자신을 백작이라고 칭하는 사내가 나타났다.

- 네가 그 연금술사인가? 이 뒷골목에서 꽤 유명하다고 들었네만. 나를 도와줘야겠어.

그 뒤로 소년은 귀족과 왕족에게 바칠 온갖 희귀한 마력석을 제조했다.

그가 만든 마력석의 대부분은 귀족들의 여흥과 사치에 쓰였고, 가끔은 입으로 내뱉기도 어려운 일에 쓰였다.

귀족들은 추잡한 욕망을 이루어 주는 마력석에 심취했고 그렇게 그에 관한 소문은 결국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그는 왕궁에 초대받았다.

그는 거기서 제 부모를 죽인 남작을 만났다.

- 자네가 그리 유능하다고?

- 과찬이십니다.

- 천민 출신이라던데. 피가 더러우면 능력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 …….

- 뭐, 어쨌든 천민들의 용도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이용당하는 것도 영광이긴 하지. 하하하.

그에 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이 된 일리안은 웃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왕이 죽었다.

열흘 뒤, 왕족들이 하나하나 죽어 나갔고 두 공작과 백작 셋이 죽었다.

그리고 한 달 뒤, 남작가는 몰락했고,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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