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9화
레르하겐을 등지고 있어 그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으나, 그의 성정상 겨우 이런 것에 놀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비뚤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렇게 쉽게 인정하다니. 시시하게. 좀 더 버티지.”
“하지만 딱히 쓸모없어 보이는데.”
일리안은 여전히 그 여유로운 미소를 얼굴에서 지워 내지 않았다.
그 표정은 마치 자신이 이런 상황에 놓일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살짝 허리를 세우고 여전히 포박되어 있는 일리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옅은 녹안이 묘한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그것을 빤히 보는데, 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 변명은 듣지 않아?”
“내 정체를 안 이상 네 변명은 중요하지 않아. 죽이면 될 일을 왜 번거롭게 만들지?”
“어어…….”
죽이면 된다는 말에 일리안의 눈가에 그제야 동요가 넘실거렸다. 죽을 것은 예상하지 못했나.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들어 보지. 누구지? 네게 황제가 아이가 되었다고 알린 사람이?”
일리안은 내 물음에 희망을 얻은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바로 입을 여는 대신 그는 시선을 살짝 하시스에게 돌렸다.
“이 검, 내려 주면…….”
“안 된다.”
하시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일리안은 하시스가 생각보다 더 강경하게 나오자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가 내 뒤에 있는 레르하겐을 한 번, 나를 한 번 보며 입을 열었다.
“난 죽음의 협곡에 감금되어 있던 연금술사야.”
“죄목은?”
“귀족 상해.”
“오. 꽤 흥미로운 죄목인데.”
“아시다시피 죽음의 협곡은 한 번 갇히면 평생 나갈 수 없는 곳이야. 연금술사나 마법사들은 그곳의 기운 교란 때문에 마법을 쓰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런데 며칠 전,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어.”
“…….”
“그자의 명령을 들으면, 나를 그곳에서 탈출시켜 주겠다고 했거든.”
“무슨 명령이지?”
“황제 폐하의 인장을 훔쳐 오라.”
인장?
나는 턱을 살짝 들었다.
어느 황실이나 오직 왕만이 쓸 수 있는 인장이 있는 법이고, 그것이 꽤 중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내 인장은 대대로 물려 내려오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즉위한 뒤 마법을 덧씌워 새것을 만들어 나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도 못하고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자가 알려 주었나? 내가 아이가 되었다고.”
“그래.”
“마력석은?”
“그 사람이 건네준 거야. 장담컨대 이렇게 큰 소란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 그 사람은 내가 죽기를 바랐던 걸까?”
말을 마친 일리안이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그 얼굴에는 일말의 불안도 없어 딱히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내 인장을 훔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황제의 인장의 궁극적인 목적이야 당연히 정치적 이용이다.
그러나 인장 하나만 훔친다고 황제의 권력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인장 하나 훔치는 것치고 일리안의 등장은 과할 정도로 요란스러웠다.
‘설마…….’
결국 나는 고개를 돌려 레르하겐을 응시했다.
무심하게 팔짱을 끼고 우리를 보고 있는 그를 향해 물었다.
“어쩔까요?”
“네 방에 들어온 자의 처우를 내게 묻는 거냐.”
“죽이기에는 아까운데. 살릴까요?”
“그것도 네 마음이지.”
“아까 전 그 검은 기운은 역시 죽음의 협곡에서 온 것일까요?”
“아마도.”
레르하겐은 내 모든 말에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그에게 확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일리안을 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일리안이 다시 웃었다.
“살려 줘, 아가씨.”
“폐하.”
“살려 줘, 폐하. 살려 주면 뭐든 할게. 진짜야. 죽음의 협곡으로 보내지 않고 살려만 준다면 진짜 뭐든 다 할게.”
“뭐든?”
“그래. 뭐든.”
딱히 간절해 보이지는 않는 어조였다.
애초에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는 태도가 퍽 거슬렸으나 나는 그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애초에 내가 죽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말 짜증 나는 일이지만, 나는 확실히 이자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범인은 나를 알고 있거나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 녀석은 범인이 아니고.’
하지만 이 녀석이 죽음의 협곡에서 온 것도 사실, 흑마법과 함께 나타난 것도 사실, 심지어 내 방의 좌표를 찍어서 나타난 것도 사실이다.
일리안의 말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의 배후에 있는 자는 높은 확률로 나를 이렇게 만든 범인일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일리안을 죽여도 별 의미는 없다.
어차피 새로운 사람이 다시 올 테니까.
‘내 행적이 적에게 이미 까발려진 상황 같은데.’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를 아이로 만든 상황에서 내 행적이 노출된 것쯤이야 이미 예상을 했다지만, 그래도 기분은 더러웠다.
그러나 내 기분과 별개로, 이렇게 된다면.
‘이 녀석이 지금으로서는 범인과 가장 밀접하게 접촉을 해 봤다는 건데.’
그런 자를 함부로 죽여 단서를 내 손으로 끊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대로 감옥에 가두어 지켜보는 것도 나름 좋은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허술해. 그리고 허술한 데는 언제나 이유가 있는 법이지.’
일리안은 내가 황제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애초에 그의 등장부터 시작해서 모든 언사를 생각해 보면 자신이 내 정체를 알고 있음을 알아 달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내가 알아차릴 수 있음을 적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적이 내 생각을 알고 있다는 사실 또한 나는 안다.
확신할 수 없지만 어쩌면 적은 애초에 무슨 목적을 갖고 내 옆으로 일리안을 첩자로 보낸 것이다.
심지어 일리안이 첩자라고 알리면서. 일리안은 기실 이용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서로의 속셈을 전부 간파하면서 진행되는 싸움이었다. 적이 명백히 우세한.
괘씸하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죽이냐, 놔주냐, 아니면…….’
내가 고민하는 사이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좋아, 살려 주지. 감옥에 가두지도 않을게.”
“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하시스가 얼굴을 찡그리고 나를 불렀다.
나는 조용하라는 듯이 쯧, 혀를 차고는 다시 일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리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말해, 아가씨. 뭐든 들어줄-.”
“나와 언약을 하나 맺어 줘야겠어.”
어차피 언약을 맺는 게 일리안이 처음도 아니었다.
레르하겐과 한 것도 언약 마법의 일종이고, 하시스와 한 것도 언약 마법이었다.
“언약?”
“그래, 다시 말하자면 계약이지. 다만, 종이가 아닌 마법으로 진행이 된다는 점에서 더 강력한 처벌이 작동하지.”
“오…… 그래서 무슨 언약을 하려는 거야, 전하?”
“일단 가장 중요한 건 내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거야.”
“그건 당연히 해야 할 거고.”
“둘째는, 내 목숨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것.”
“그것도 쉽네.”
“그리고 방금 두 개의 조항을 어길 시, 너는 즉사야.”
“……즉사?”
즉사라는 말에 일리안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죽는 건 꽤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즉사. 그리고 더 있어. 셋째, 네게 제안을 한 자가 다시 너를 찾아오거나 연락을 시도하면 내게 바로 보고해야 해. 기한은 한 시간. 늦어지면 계약 위반으로 역시 즉사야.”
“잠깐, 시간을 어기면 죽는다고? 좀 극단적…….”
“넷째, 저 녀석과 마찬가지로 내 오빠 노릇을 좀 해 줘야겠어. 그리고 네 부주의로 내 오빠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역시 즉사야.”
“……뭐?”
“다섯째, 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비밀을 유지할 의무가 있어. 나에 관련한 그 어떤 정보도 외부에 흘리지 마. 흘리면 즉사야. 참고로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즉사는 질식사니까 알아서 하도록.”
“…….”
“아, 그러고 보니 부가 조항도 있어. 이 모든 조항에서 네 의도는 중요하지 않아. 다시 말하자면 너는 발설할 의도가 없었는데 네 말로 다른 사람이 추론을 해내도 네 탓이니까 넌 죽어.”
“…….”
“이 모든 것은 내 마력으로 유지가 될 것이고, 언약의 끝은 네가 죽기 전까지일 거야. 어때, 할 건가?”
“…….”
“참고로 말하는데 거절하면 난 널 바로 마탑에 알려서 죽음의 협곡에 가둬 버릴 거야. 또 현 마탑주인 비올레는 아르시스 제국 출신이라서 내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어.”
“마탑은 어느 국가에도 귀속이…….”
“안 되긴 하지만, 너라면 자국의 황제가 하는 명령을 무시하겠어? 평생 아르시스로 돌아오지 않을 건가?”
“그거, 마법 기관에 대한 정치적 간섭-.”
“응, 간섭이지. 하지만 괜찮아. 내 ‘전과’가 좀 화려해서, 이 정도는 다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방실방실 웃고 있던 일리안의 표정은 내가 조건을 하나하나 말하자 점점 굳어졌다.
나는 팔짱을 끼고 어디 한번 골라 보라는 표정을 했다.
내 말에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던 하시스의 표정이 되레 떨떠름해졌다.
하긴, 언약이라고 하니 저와 맺었던 장난 수준의 언약을 상상했겠지.
하지만 레르하겐의 제자인 하시스와 이런 신원 불명에, 심지어 동기도 불순한 자식을 같은 선상에 둘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일리안은 내 말에 미간을 좁히고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을 했다.
그러다 결국 한숨을 쉰 뒤 애매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받아들일게. 나는 정말 죽음의 협곡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거든.”
그의 대답에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곧 내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마력으로 수놓아진 금빛 마법진이 바닥에 얼기설기 얽히며 환한 빛을 냈다.
나는 그것을 본 뒤 하시스를 향해 말했다.
“계약엔 피가 필요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찔러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