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8화 (18/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8화

‘말도 안 돼. 저런 존재가 대체 왜.’

내 소환에 응한 거지?

레르하겐의 능력에 대해서야 나도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내 아바마마는 물론이고 내 언니, 내 오빠, 귀족들, 평민들 심지어 이종족들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가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강함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마지막으로 남은 검은 기운이 사라질 때까지 레르하겐은 그저 그대로 서 있었다.

싸늘한 벽색 눈동자에는 일말의 온기도 없었고, 그 모습이 마치 미물을 훑는 신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그것은 절대적인 강함에서 오는 매혹이었고, 동시에 내가 부러워할 자격조차 없는 여유로움이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나는 대체, 얼마나 끔찍하고 대단한 것을 내 아버지로 들였나.

마지막 한 자락의 기운마저 그대로 사라지자 레르하겐은 느긋하게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 보았다.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일까, 그가 입을 열었다.

“흑마법에 당한 이들은 흑마법의 공격에 더 쉽게 물드는 법이지.”

“…….”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잘 먹히는 것이 정신 공격이다.”

“……지금 저 위로하시는 건가요?”

“알려 주는 거다. 위로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받아들이든지.”

예전이라면 어이없게 들렸을 말에도 나는 그저 헛웃음을 흘렸다.

곧 내가 머리 위에 씌워진 코트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나 레르하겐의 목소리가 나를 저지했다.

“쓰고 있어.”

“이제는 개운해요.”

“이제 시작이다.”

“그게 무슨.”

나는 다시 긴장한 얼굴을 했다.

“또 뭐가 있나요?”

이번에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발코니 쪽으로 돌렸다. 대체 이번에는 또 무슨 어마어마한 게 오려고.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갑자기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발코니 쪽에 뭔가가 떨어졌다.

하시스가 팔로 내 앞을 막았다.

쿵!

와장창!

검은 기운이나 더 큰 공격을 기대했던 나는 생각과는 다른 분위기에 미간을 좁혔다.

아까 전과 달리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내 시야를 가린 것은 온통 먼지뿐이었고,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돌멩이까지 방 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폭발?’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는데, 천천히 사라지는 연기 사이로 드러난 것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구불구불한 긴 백금발을 가진 남자였다.

“저건 또 뭐지?”

그때 옅은 신음 소리와 함께 널브러져 있던 남자가 꿈틀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으윽.”

남자는 대략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비록 재가 묻어 있긴 했으나 원래 하얬을 것이 분명한 얼굴은 상당히 곱상했다.

유려한 얼굴은 부드럽고 유한 느낌이 있었다.

긴 백금발의 남자를 보던 나는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남자의 정체에 긴장한 얼굴을 했다.

곧 완전히 몸을 일으킨 남자가 눈을 떴다.

팔랑거리는 속눈썹 아래 자리한 것은 에메랄드를 방불케 하는 녹안이었다.

그에 숨을 죽이는데,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살짝 찡그리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녹안과 그대로 시선이 마주쳐 버렸다.

그리고.

“안녕, 아가씨?”

나를 발견한 남자가 곱게 웃으며 읊조렸다.

남자의 인사말은 다정하고, 달콤하고 심지어 여유롭기까지 했다.

아까 전의 소란을 직접 보지 못했으면 나는 그가 알현을 허락받고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닐까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남자는 내 테라스에 떨어진 것이 맞고, 레르하겐의 말을 짚어 보자면 아마 그 검은 기운과 연관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렇게 발랄한 태도라니.

나는 꼬질꼬질한 얼굴로 부드럽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하시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이없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닌 듯, 하시스가 눈썹을 찡그리더니 이내 나를 향해 물었다.

“아는 사이냐?”

그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에 답을 얻었는지 하시스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물음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깨달은 듯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남자를 응시했다.

자연스럽게 내 앞을 가로막은 레르하겐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내가 직접 신문을 하겠으나 상대가 흑마법에 엮인 이상 레르하겐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낫다.

자존심이 상했으나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쯤은 판단할 머리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레르하겐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우리를 번갈아 보던 남자가 곱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시고.”

퍽이나.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정말 퍽이나.

“우연하게 여기 떨어졌던 거였어요.”

정말 정말 퍽이나.

나와 하시스와 레르하겐의 지적 수준을 모욕하고 있는 그의 언사에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 모두 침묵하고 있는데, 그제야 레르하겐이 입을 열었다.

“이름.”

그 짤막한 명령에 사내가 웃었다.

“일리안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부모님이 없어서요.”

“마법사인가?”

“연금술사입니다. 나름대로 이것저것 만들면서 지내고 있죠.”

그야말로 해사한 미소에 나는 더욱더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도 과격하게 내 방에 등장한 주제에 왜 저렇게 여유롭게 굴지.

나는 슬슬 녀석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 답을 얻기도 전, 이어지는 레르하겐의 물음에 다시 입매를 굳혔다.

“죽음의 협곡에서는 어떻게 도망쳤나.”

뭐?

순간 느슨해지던 경계의 끈이 다시 팽팽하게 조여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 일리안을 응시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 금이 살짝 간 것 같았다.

역시 정곡을 찔린 걸까.

답을 기다리는데, 일리안이 다시 싱긋 웃었다.

“마력 파동 덕분에 틈을 타 도망쳤습니다.”

“…….”

“애초에 탈옥 기회만 주야장천 노리고 있었는데, 오늘 죽음의 협곡이 폭발했거든요. 그래서 일단 감옥에 있는 마력석 하나를 훔쳐서…….”

“…….”

“……왔죠?”

“마력석이라.”

“네. 보여 드릴까요?”

그렇게 말하며 일리안이 자신의 품을 뒤적였다.

이내 그가 내 엄지만 한 보석을 꺼냈다.

이미 마력이 다했는지 마력석에는 일말의 마력이 없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그러나 나는 녀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눈 어또케 왔어? 마력석에 찍힌 좌표가 어딘지는 알았을 텐데.”

앳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일부러 아기처럼, 조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하자 청년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곧 그가 다시 다정하게 웃었다.

“그건 나도 몰라, 꼬마 아가씨.”

“말도 안 대. 그거를 어또케 몰라?”

“어쩔 수 없잖아. 나는 탈출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걸.”

“그니까 마력이 폭발하고, 오빠는 마력썩으로 도망친 거야? 아무 데나 떨어지겠지, 하구?”

“맞아,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여기가 황제의 방인 건 오빠두 몰랐다는 거야?”

“그렇지.”

일리안은 마치 내가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 주는 것이 아주 기쁜 듯 굴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방긋 웃어 주었다. 그에 일리안이 곱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예쁘장한 얼굴로 저렇게 미소를 지으니 왜 사람들이 여우한테 홀리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일리안을 보며 천천히 내 머리 위에 씌워진 코트를 벗었다.

이번에는 레르하겐도 나를 저지하지 않았다.

설사 무슨 일이 있더라도 레르하겐이나 하시스가 옆에 있으니 딱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활짝 웃으며 읊조렸다.

[파르시에트(속박).]

촤륵.

그 순간 허공에서 쇠사슬이 생기더니 이내 눈 깜짝할 사이에 일리안의 몸을 칭칭 둘러맸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일리안이 놀란 듯 움찔하다가 난감한 눈빛을 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꼬마 아가씨?”

“거짓말의 대가야.”

“이런. 거짓말이라니,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스릉-.

말을 잇던 일리안은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검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움찔했다.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간 하시스의 하얀 검신이 그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일리안이 눈썹을 까닥이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꼬마 아가씨, 이게 무슨…….”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아까까지 짓던 순진무구한 미소를 얼굴에서 지워 냈다.

그리고 서늘하게 읊조렸다.

“이곳은 황제의 방이 아니다.”

“……어?”

“황제의 방은 다른 곳에 있지.”

“…….”

“그래서, 대체 네가 찾는 황제는 누구지?”

내 물음에 일리안이 묘한 얼굴을 했다.

그것은 얼핏 보면 아쉬움 같기도 했고, 난감함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응당 이 상황에서 보여야 하는 어떤 감정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공포였다.

나는 살짝 미간을 좁히고 걸음을 옮겼다.

레르하겐을 지나쳐 청년의 앞으로 다가가 살짝 허리를 굽혔다. 그의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꽤 예쁘장한 녹안이었다.

“낯선 곳에 떨어진 상황에서, 누가 봐도 절대 만만하지 않은 상대가 너를 경계하는데도 넌 긴장하지 않았어.”

“아.”

“황제의 방에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긴장하지 않고. 이 정도면 그냥 수상하다는 것을 알리려고 작정한 사람 같은데.”

“…….”

“너, 내가 누군지 알지?”

누가 봐도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겨우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아이가 어른의 말투를 쓰며 어른을 심문하고 있고, 그 아이를 말리지 않는 남자 하나, 소년 하나.

그럼에도 일리안은 그저 난감한 얼굴만 했다.

그리고 그 난감함은 필히…….

“하아.”

그때였다.

뭔가 생각하는 듯한 일리안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맞아. 나는 꼬마 아가씨가 황제라는 걸 알아.”

그 순간 나는 피식 웃었다.

옆에 서 있던 하시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