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6화
“그래. 바로 그거야.”
흑마법을 사용하는 마족들은 더욱더 강력한 힘을 위해 수많은 인간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려 했고, 죽음의 협곡은 바로 그 수많은 인간이 죽임을 당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족의 근거지가 된 그곳은 죽음의 기운과 온갖 오염된 마력이 차고 넘쳤는데, 그 정도가 심해 마족이 소멸된 뒤에도 흑마법의 여파가 잔재해 지금도 사람들이 꺼리는 곳이다.
기껏해야 주기적으로 정화를 행하러 가는 신관이나 오염된 마력을 없애기 위해 관리를 자처한 마탑의 마법사들 정도?
그 외에 굳이 꼽자면, 마탑이 심판을 맡은 마법 관련 죄인들이 갇히곤 했다. 물론 거기서 살아 나왔다는 이는 본 적이 없지만.
“왜 갑자기 죽음의 협곡에서 마력 파동이 일어났지? 지금까지 그런 일 없지 않았나?”
“엄연히 말하자면 한 번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저번 소란은 112년 전이었고, 그 이전은 239년 전, 302년 전, 476년 전, 503년 전, 600…….”
“그만, 그건 별로 알고 싶은 정보가 아니야. 입 다물어.”
나는 끝도 없이 나오는 숫자에 바로 리건의 입을 틀어막았다.
리건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쨌든 주기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곳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내가 아이가 되었을 때에……. 네 생각에는 그저 우연이겠지, 하고 넘어가는 게 옳다고 봐?”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대신 리건이 살짝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에 비낀 난감함은 그도 사실 결론을 짓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바로 ‘혹시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따위의 말을 내뱉었을 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의문이 들었다.
“왜 그래?”
“사실…….”
내 물음에 리건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그것은 얼핏 보면 걱정 같기도 하고, 불안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 같기도 했다.
답지 않게 뜸 들이는 그의 모습에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빨리 말해. 한 대 맞기 전에.”
“아니 그게.”
맞는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동안 내가 던진 무수한 쿠션과 펜과 문서를 맨몸으로 받아 냈던 리건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리고 곧, 그가 길게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혹시 진짜로 폐하와 연관이 있는 문제라면, 죽음의 협곡으로 가실 겁니까?”
“못 갈 건 없지?”
“절대 안 됩니다! 거기는 사람이 갈 곳이 아니라고요!”
그제야 나는 리건이 이렇게 난리를 치는 이유를 알아냈다.
나는 어처구니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뭐야. 내가 죽음의 협곡으로 갈까 봐 그랬던 거야?”
“네! 폐하라면 두 번도 가실 분이시고, 그렇게 되면 그 뒤처리는 제가 다 해야 하지 않습니까.”
“…….”
“아니 뭐, 물론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도 있기는 합니다만.”
“……도?”
“물론 폐하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지만요.”
“너 요즘 따라 유난히 까불어.”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아까 전의 화제로 돌아왔다.
“아무리 나라도 죽음의 협곡에 갑자기 쳐들어가지는 않아.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솔직히 이 시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게, 나와 아주 상관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어.”
“그래도 일단은 지켜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단순히 단서 하나만 보고 협곡에 가는 것보다는 몸을 사리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솔직히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필요하다면 가기야 하겠지만, 아직은 가야 하는 이유가 꽤 부족했다.
“일단, 마탑에서 후속적으로 오는 전갈을 받아 보고 다시 결정하지.”
“알겠습니다.”
리건은 내가 협곡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아 너무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솔직히 그의 마음속에 있는 내 이미지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지만, 일단 이 문제는 추후에 해결하기로 했다.
곧 리건이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자 다시 서류를 처리하기 위해 펜을 찾는데, 문득 시야에 반지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 며칠 동안 레르하겐을 못 본 거 같은데.’
솔직히 계약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레르하겐이 무조건 내 시야에 보여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나도 레르하겐과 계약한 이상, 그저 그가 사고만 안 치면 된다는 주의였기에 딱히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성격에 사고 같은 걸 칠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다시 시선을 서류에 고정시켰다.
그렇게 하루가 무사하게 흘러가고 저녁.
목욕을 마친 뒤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셀라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럼 평안한 밤 되세요, 황녀 전하.”
탁.
곧 문이 닫히고 방 안은 완전히 정적에 스며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딱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의외로 빨리 잠이 쏟아져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깊은 수마,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 ……해요.
긴 금발을 가진 여자였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노을빛을 반사했는지 발그스름한 빛을 흘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 펄럭거리는 붉은색 망토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익숙해 나는 미간을 좁혔다.
누구지?
갑자기 나타난 광경은 그야말로 실체를 알 수 없는 신기루처럼 내 앞에서 언뜻거렸다.
흐릿해졌다가 또렷해지고, 흔들거리다가 다시 정지되었다.
나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나는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여자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 …….
‘뭐라는 거지.’
여자가 무엇인가를 말하듯 입을 뻐금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언뜻언뜻 들려오는 단편적인 목소리는 인식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였으나 마치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내 주변에서 흩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자가 웃는 것 같았다.
‘같았다’라고 하는 것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에 가려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들어 보고자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 약속해요.
마치 내 귓가에 속삭이듯 또렷한 여자의 목소리가 그대로 나를 덮치고 아까까지만 해도 밝았던 주변이 갑자기 칠흑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촤악-!
새빨간 선혈이 허공에 수를 놓는다.
순식간에 흩뿌려진 비명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여자는 그대로 단도를 휘둘렀다.
마치 루비처럼 산산이 흩어지는 핏방울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으윽.”
‘갑자기 두통이.’
나는 그대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 사실 주저앉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리 인식하고 있었다.
의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나는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목 부근에서 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뱀이 똬리를 틀듯, 짙은 질식감이 느껴져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이대로 죽으면 안 돼. 나는 절대 죽지 않아!
그리 생각할 때였다.
콰광!
“……려.”
“…….”
“……차려!”
“…….”
“정신 차리라고! 에스트리아!”
“헉.”
그야말로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눈을 떴다.
분명 평온하게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온몸이 마치 사슬에 옥죄이기라도 한 듯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뭐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레르하겐이 내게 반지를 준 날, 내가 느꼈던 그 울렁거림, 두통과 흡사했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갑자기 옆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났냐?”
촤아악.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하시스였다.
그가 왜 여기에 있지?
그의 목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베이는 소리도 들렸던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으나 돌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대답 대신 눈을 다시 감았다.
내 몸을 옥죄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
나는 집중해 내 몸을 감고 있는 무엇인가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따뜻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몸을 옥죄던 것이 그대로 사라졌다.
바로 몸을 일으킨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무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방에 주르륵 달려 있던 세 개의 발코니 창문이 전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카펫 위에 우수수 떨어진 유리는 이미 가루가 되었고, 그 위로 찢어진 커튼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욱더 나를 경악시킨 것은 창문 너머에서 넘실거리는 검은 기운이었다.
얼핏 보면 연기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검은 기운은, 갑자기 몇 가닥으로 흩어지더니 마치 내 목숨을 노리는 수십 마리의 뱀 같은 형태를 이룬 채 발코니 부근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쉬이익-!
순간 검은 뱀 하나가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 급히 방어막을 치기도 전,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하시스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마치 실체가 있는 듯 투명한 검날에 닿자마자 뱀은 그대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시스가 고개를 돌렸다.
“정신 차렸어?”
“이게 무슨 일이야?”
“보면 모르냐? 침입자다. 젠장, 혹시나 해서 이 주변을 돌아다녔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너는 또 왜 그렇게 퍼질러 자고 있냐? 원래 잠 깊게 들어?”
하시스의 말에 평소라면 발끈했을 나는 되레 입을 다물었다.
그럴 리가.
평소의 나는 아주 얕게 잠드는 편이었고, 심지어 가끔 잠들지 못해 밤을 새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확실히 오늘은 좀 쉽게 잠들었어. 게다가 평소에 꿈도 안 꿨는데…….’
문득 꿈결에 보았던 광경이 생각이 나 나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설마 이 모든 것이 다 관련이 있는 것인가?
답은 뻔했다.
나는 정체도 모르는 내 적을 저주하며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와 하시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야, 오지 마.”
하시스는 내가 다가오자 얼굴을 팍 찌푸렸다.
그 순간 창문가에서 넘실거리던 다른 뱀 하나가 그대로 우리를 덮쳐 왔다.
그러나 아까 전과 달리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