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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5화 (15/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5화

“그거야 원래 강한 자만이 살아남으니까. 강하니까 아무도 우리를 넘보지 않는 거야.”

“그렇죠? 하지만 저는 그 강함과 약함이 꼭 서로 죽이고 죽는 관계에서만 드러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굳이 말하자면.”

“…….”

“나라의 국력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는 문제 아닐까요? 아르시스는 폐하 즉위 이래에 그 어떤 전쟁도 치르지 않았지만, 이 하늘 아래 아르시스의 강대함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폐하가 대단하신 거죠.”

조금 미묘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내가 아르시스의 부강에 힘을 쓴 것은 단순히 황제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였고, 전쟁을 하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셀라의 해석은 다소 과한 감이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마치 내가 형제자매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것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나는 거울을 통해 셀라를 힐끔 보았다.

높게 묶은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리고, 마무리까지 한 그녀가 손뼉을 짝 쳤다.

“다 됐어요! 마음에 드시나요?”

나는 시선을 옮겼다.

구불거리는 금발은 어느새 곱게 정돈되어 있었고, 길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 위에는 빨간 리본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정말 애네.’

물론 현재의 내 모습은 아이니까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이렇게 커다란 리본을 머리 위에 얹고 다니는 게 묘하게 이질적이라서 나는 손으로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큰 거밖에 없어?”

“예쁘지 않나요?”

“너무…… 귀여운데.”

나는 살짝 눈썹을 까닥였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리본 장식을 하려니 괜히 어색했다. 어른일 때는 물론이요 어린 시절에도 이렇게 화려한 건 해 본 적이 없는데.

‘하긴 그때야 하는 족족 빼앗겨서 그렇다고 해도.’

그러나 셀라의 생각은 다른지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여운 게 어때서요? 황녀 전하는 귀여운 거 싫어하시나요?”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내 말에 셀라가 조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했다.

곧 그녀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하긴, 황녀 전하시니 위엄을 살려 드리는 것이 좋겠네요. 다른 걸로 바꿔 드릴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다음부터 주의해 줘.”

“네, 명심할게요.”

곧 셀라의 시중을 받으며 구두까지 착용한 뒤 의자에서 내려왔다.

옆에 비낀 전신 거울에 드러난 내 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인형 같네.’

이것은 절대 칭찬이 아니었다.

화려한 레이스와 프릴, 그리고 나풀거리는 옷으로 예쁘장하게 꾸며진 인형은 의지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기왕이면 인형보다는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쓰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뿐더러, 후줄근하게 다니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기 때문에 그냥 외모를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뒤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평소처럼 방에서 나가려는데, 셀라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아, 황녀 전하.”

“왜?”

“혹시 좋아하시는 디저트 있으세요?”

뜬금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저트?”

“네. 제가 이래 봬도 한때 파티시에를 꿈꿔서, 웬만한 건 다 만들 줄 알아요. 혹시 좋아하시는 거 있으시면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별로, 난 단 것 좋아하지 않아.”

이건 사실이었다. 어렸을 때는 단 걸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싫어졌다.

아니, 단것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애초에 먹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셀라는 내 말에 다소 아쉬운 얼굴을 했다.

나름대로 내 앞에서 실력 발휘를 해 하려고 했는데 못 하게 돼서 실망하는 건가.

그저 못 본 척 방에서 나가려는데, 순간 왠지 모르게 아까 전 환하게 웃으면서 하던 그녀의 말이 생각나서 멈칫하고 말았다.

그리고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짭조름하게 만들면 먹어 볼게. 대신, 맛있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언제 실망했냐는 듯이 셀라가 활짝 웃었다.

그것을 보던 나는 피식 웃고는 방을 나갔다.

* * *

우연하게 레르하겐의 제자가 된 뒤 하시스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레르하겐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입은 대체 왜 달고 사는지 궁금할 정도로 레르하겐은 말이 없는 편이었고, 이상할 정도로 그는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는 데 도가 튼 하시스에게 마저도 레르하겐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러나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갑자기 난데없는 소환에 응해 에슈트의 아버지가 된 것을 기점으로 하시스는 요 며칠간 레르하겐이 묘하게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묘함은 언제나 레르하겐의 행동에서 기인했는데, 특히 그것은 에슈트를 대하는 태도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스승님.”

하시스는 오늘도 나무 위에 앉아 있는 레르하겐을 불렀다.

며칠 전 흑마법이라는 어마어마한 화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뒤, 레르하겐은 이 모든 것들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그저 홀로 시간을 보냈다.

물론 레르하겐이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세상만사 귀찮은 듯이 구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와 같다고 넘기기에는 그동안 레르하겐이 에슈트에게 보여 준 관심은 꽤 이례적이었다.

그래, 이례적.

에슈트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레르하겐은 자신이 잘못을 했다고 그 대가를 지불할 정도로 그리 주고받는 것에 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겨우 낯선 이를 황제의 방에 들였다는 것에 죄책감이나 책임을 느끼는 이가 아니었고, 당연하지만 겨우 그런 일 때문에 누군가를 도와줄 성정도 아니었다.

왕관이 필요하다는 말에 보석을 구해 주는 이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애초에 소환에 응한 것부터가 말이 안 되긴 했지.’

이 모든 사건의 시초부터가 사실은 이례적이었다.

‘뭐, 그거야 나름대로 그 녀석과 얽힌 사연이 있으려니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정작 가장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결국 하시스는 레르하겐을 이해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저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은 겁니까?”

하시스의 물음에 나무 위에 앉아 있던 레르하겐이 천천히 눈을 떴다. 차갑기 그지없는 벽안이 공기 속에 드러나고, 이내 그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글쎄.”

그야말로 간단한 대답이었다. 동시에 별 의미 없는 대답이기도 했다.

하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애초에 레르하겐에게서 확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는 기대였다.

그러나 그때, 무심한 얼굴로 앉아 있던 레르하겐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에슈트의 방 앞 복도에 머물렀다. 늘어진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빨간 리본을 힐끔 보던 그가 갑자기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탁.

가볍게 착지한 레르하겐의 모습에 하시스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무슨 의중인지 모를 레르하겐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하시스와 시선을 마주한 뒤 입을 열었다.

“올리프스에게 다녀와야겠군.”

“네?”

그 뜬금없는 말에 하시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올리프스라면, 요정족의…….”

“넌 이곳에 남아라. 남아서 주변을 살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 불청객이 올 거 같으니.”

“그게 무슨…… 잠깐만요, 스승님!”

하시스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 레르하겐은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야말로 제멋대로의 끝을 달리는 행동에 하시스가 이마를 짚었다. 그의 얼굴에 한숨이 가득했다.

“누가 올지는 좀 말해 주고 가시지.”

레르하겐이 이랬던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하시스는 그저 한숨만 푹 쉬었다.

그러나 곧, 다시 날카로운 눈빛을 한 그가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불청객이라니. 그 꼬맹이는 무슨 적이 그렇게 많지.’

속으로 투덜거리는 것을 잊지 않으며.

* * *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황제로서의 의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대외적으로 인형을 사용한다고 해도 어쨌든 황제의 집무는 당연히 내가 봐야 할 터.

그렇다고 이제 겨우 예닐곱 살 된 황녀에게 집무실을 만들어 주는 것도 이상하고, 설사 만든다고 해도 황제의 보좌관인 리건이 황녀의 집무실에 들락거리는 것은 꽤 수상해 보일 것이다.

그에 내가 내놓은 대책은 꽤 간단했다.

일단 ‘황녀의 놀이방’을 만들 것.

그리고 공간 왜곡 마법으로 놀이방의 문을 황제의 집무실과 이어 놓을 것.

이 마법은 내가 허락한 이들에게만 통하기에 실수로 들어간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동시에 마법이 적용된 것은 집무실의 문뿐이라서, 황제의 집무실에 억지로 쳐들어간다고 해도 놀이방까지는 갈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리건은 대외적으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황제에게 보고를 하러 집무실의 문을 열었고, 나는 놀이방으로 들어가 집무를 볼 수 있었다.

다만 유일하게 거슬리는 게 있다면, 내 본모습에 맞춰져 만들어진 의자 높이 때문에, 의자에 앉을 때마다 쿠션을 두 개 깔고 낑낑거리면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랄까.

오늘도 푹신한 쿠션을 깔고 의자 등받이에 기댄 나는 일상적인 보고 마지막에 붙은 소식에 미간을 좁혔다.

“마탑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죽음의 협곡에서 이상한 마력 파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신관들과 함께 복구를 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혹시나 하여 각 국가의 황실에 고지를 한 것 같습니다.”

“죽음의 협곡?”

“네, 죽음의 협곡. 마법에 관련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감금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문제는,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리건은 내 태도에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아- 하고 가볍게 탄식을 내뱉었다.

“한때 마족들의 근거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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