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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4화 (14/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4화

“흑마법을 증오하는 것 이상으로 폐하를 증오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리건, 세베르는 말이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혐오하는 것이라도 옳지 못한 수단으로 처리하려 드는 성정이 아니야.”

“…….”

“그래서 내가 걔를 싫어해.”

나는 영원히 그렇게 살 수 없거든.

리건은 내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묘한 기색을 담고 나를 응시했다.

이 몇 년 동안 내 옆에서 보좌관을 하면서 언제나 나를 봐 왔던 그는 내가 얼마나 세베르 켈리어드를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단순히 싫다는 감정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본질은 질투였고, 열등감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부러움이었다.

한평생 고결하게 자신의 신념과 줏대를 지키며 살 수 있는 이에 대한 지독한 패배감.

그리고 황궁에서 천덕꾸러기나 마찬가지인, 아무런 세력 없는 막내 황녀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태생적인 우월함.

곧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묘하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침묵하던 내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곧, 다시 시선을 들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건 싫어하는 거고, 쓸모 있는 건 쓸모 있는 거야.”

“어떻게 쓰시겠다는 겁니까?’

“로드님이 그랬어. 내가 이렇게 된 게 흑마법 때문이라면 내 주변인, 정확히는 내가 아는 사람의 소행일 거라고. 그리고 그것은 아주 높은 확률로 내 정적일 것이고.”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가능성이 크지. 아니, 사실은 정적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세베르 켈리어드는 나에 버금가는 권력을 갖고 있고, 그 올곧은 성격 덕분에 나보다도 더 큰 명망을 누리고 있어.”

“폐하.”

“그런 녀석이니 당연히 내가 이 꼴로 나서서 조사를 하는 것보다는 더 좋은 결과를 갖고 오지 않겠어?”

“하지만 폐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대공 때문에 더 경계를 한다면.”

“어차피 그들은 내가 아이가 된 걸 알고 있어. 내가 진짜로 무서운 건, 그들이 아닌 다른 적들이 이상함을 눈치채는 거야. 알잖아, 내가 얼마나 적이 많은지.”

“…….”

“게다가 세베르는 나와 관계가 좋지 않아. 아무도 그가 나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폐하, 간과하신 게 있습니다. 켈리어드 대공 전하가, 과연 폐하를 위해 흑마법을 조사할까요?”

“그러니까 약간의 술수가 필요하다는 거지.”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리건을 입을 딱 벌리고 내 말을 듣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겠다고 했어. 이 몇 년 동안 제멋대로 내 소환에도 응하지 않던 주제에. 대체 무슨 목적인지 갑자기.”

“…….”

“황궁이 자기 놀이터도 아니고.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곳은 아니잖아? 대가를 치러야지.”

그간 세베르가 내 소환에 응하지 않은 것은 나로서도 꽤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나 기왕 오겠다는데 이용해 주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물론 모든 걸 다 그 녀석에게 맡길 수는 없어. 어쨌든 내가 이 꼴이라는 걸 그 녀석에게 들킬 수는 없으니까. 따로 흑마법에 대한 정보를 조금 알아낼 필요는 있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때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건이 내 말을 받았다.

귀찮은 일을 시킬 때마다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던 것과 완전히 다른 양상이라 나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알았어. 너한테 시킬 거라는 거?”

“폐하께서 괴롭히실 만한 인간이 저 빼고 이 황궁에 또 있습니까?”

“또 맞을래?”

“아니, 그만큼 제가 신뢰받고 있는 걸 안다는 뜻이죠.”

나는 리건의 미꾸라지 같은 대답에 쯧 혀를 찼다.

‘사실이라서 더 짜증 나네.’

어쨌든 리건에게 맡기는 것보다 더 괜찮은 선택지는 없었다.

꼴은 저래도 델멘 공작가의 아들이고 무엇보다도…….

“들쑤시고 다니지 마.”

“물론입니다.”

나는 자신만만한 리건의 태도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믿음이 가면서도 한편으론 믿기 힘든 얼굴이었다.

어쨌든 리건만큼 신뢰가 가는 인물도 없었기에,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내 앞에 놓인 주스 잔을 들었다.

그때, 뭔가 적고 있던 리건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폐하. 왕관은 어쩌시겠습니까. 만약 흑마법이 이유라면…… 아무래도 이 모습으로 오래 계셔야 할 텐데. 물론 이미 레르하겐 님께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그래도 저희 측에서 왕관을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건 이미 해결됐어. 신경 쓰지 마.”

예상 밖의 대답에 리건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컵을 내려놓았다.

“나도 놀랍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물이 나올 거 같아.”

솔직히 그 어마어마한 보석들로 괜찮지 않은 결과물이 나올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대충 보석 하나만 머리에 얹어 놔도 역사에 길이 남을 머리 장식이 될 것 같은데 하물며 왕관의 장식이 된다니, 어떻겠는가.

그러나 직접 그 보석들을 보지 못한 리건은 은근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석연찮은 얼굴을 했다.

그에 어이없어진 나는 괜히 그를 타박했다.

“너는 시키는 일이나 해. 그런 자질구레한 건 신경 쓰지 마. 애초에 내 목적은 하루빨리 어른으로 돌아가는 거지 아이에 적응하는 게 아니거든.”

리건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인사를 마친 그가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서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난 날도 이런 날씨였는데.’

문득 과거의 잔상이 생각나 머리를 털었다.

어차피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후회스러운 순간이 없었다.

설사 내가 겪고 있는 것이 신의 벌이라고 해도.

* * *

세베르 켈리어드가 황궁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소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도로 퍼졌다.

기사단장의 갑작스러운 복귀에 다소 당황스러울 법도 하나 기사단은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착실하게 모든 준비를 해 나갔다.

게다가 세베르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비단 기사들만은 아니었던 듯,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시녀들의 입에서 켈리어드 대공의 이름이 들려왔다.

심지어 개중에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그에 나는 레르하겐과 하시스에게 얼굴을 붉히는 것도 모자라 세베르에게까지 흠모의 마음을 품는 그녀들의 남자 보는 눈에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전하, 소문 들으셨어요? 켈리어드 대공 전하께서 귀환하신대요!”

“덩말, 아니,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그 녀석이 그렇게 대단해?”

“헉, 녀석이라니. 전하!”

안 그래도 온 세상이 세베르 켈리어드의 소식으로 도배된 것 같아 괜히 심기가 불편했던 나는, 치장을 도와주던 셀라의 입에서까지 세베르의 이름이 나오자 괜히 삐딱하게 질문했다.

그에 내 머리를 빗겨 주던 셀라가 급히 나를 저지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얼굴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난 황녀야. 그 녀석보다 위라고.”

물론 아무리 일국의 황녀라도 권세를 누리는 대공가의 가주에게 함부로 녀석이라는 칭호를 쓸 수는 없었다.

애초에 내가 어렸을 때도 내 언니들은 세베르에게 예를 차렸고, 나 또한 그것이 황족과 고위 귀족 사이의 예법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며칠 동안 스트레스를 받아서였을까.

괜히 삐딱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던 셀라가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나 싶어 눈썹을 까닥였다.

셀라는 다시 빗을 들어 내 머리를 빗겨 주며 읊조렸다.

“그래도요. 훌륭한 황족은 어느 때든 예법을 지켜야 한답니다. 그래야 폐하처럼 모든 분이 존경하는 주군이 될 수 있지요.”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누가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주군이라고?

내가?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솔직히 말하자면 내 손으로 황위를 거머쥐었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모두가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뻔뻔하게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원로원의 치들은 나를 존경은 둘째 치고 공포와 혐오가 섞인 얼굴로 보고 있었고, 그 외 이들도 글쎄, 존경보다는 그저 힘에 굴복한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는다니.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나.

“내…… 어마마마가 대단한 건 인정하지만, 존경은 말도 안 대.”

“어머, 그렇지 않아요. 폐하가 얼마나 훌륭한 주군이신데요.”

“존경과 공포는 엄연히 달라. 어마마마는 공포를 만드는 주군이고.”

“흐음,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읊조리며 셀라가 빗을 내려놓았다.

곧 옆에 놓인 리본을 집어 든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최소한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 아르시스는 평화롭잖아요. 얼핏 보기에 당연한 것처럼 보여도 평화만큼 소중한 건 없어요.”

“그건 어마마마가 그냥 전쟁을 싫어해서 그런 거고.”

“그리고 평화롭다는 건, 그만큼 아르시스가 강대하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이건 반박을 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오직 강대한 국가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제국의 안정과 평화는 어쩔 수 없이 국력과 비례한다.

실제로 아바마마의 즉위 시절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잦았다.

가끔은 아르시스가 타국을 도발했고, 가끔은 우리가 도발당했다.

원로원은 언제나 제국의 위신을 높여야 한다며 전쟁을 주장했지만 정작 그 위신은 백성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권력자들의 욕심으로 얼룩진 전쟁 때문에 피해를 입는 것은 늘 백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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