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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13화 (13/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3화

“인간이 흑마법을 행하려면 마족에게 육체와 영혼을 팔아야 한다고 들었어요.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저질러서 한다는 게 고작 저를 아이로 만드는 것이라니.”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라 흑마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이지. 꽤 골치 아파지거든.”

“골치 아파진다니, 무슨 뜻이죠?”

“이런 종류의 흑마법은 너를 잘 알고 있는 자만이 가능하다.”

“저를 잘 알고 있다면.”

“네 주변인이라는 뜻이다. 최소한 일면식은 있는.”

그 순간 나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침착하게 반문했다.

“그러니까 내 주변에 있는, 내가 알고 있는, 혹은 나와 아주 친한 누군가가 배신자라는 뜻이군요. 혹은, 아예 적의를 갖고 있는 자 중의 한 명이라거나.”

“그래.”

레르하겐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힐긋 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내 표정을 살피는 듯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는 아직도 검은빛이 넘실거리는 반지를 응시했다. 그러다 주먹을 꽉 쥐고 다시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당연하게도 내겐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주변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왜 입안이 썼을까.

‘됐어. 이렇게 감상에 젖는다고 뭐가 변하지는 않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곤 레르하겐과 시선을 맞추었다.

“좋아요. 그덤…… 그럼, 이제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황궁의 고용인들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범인을 찾아보죠. 딱히 변한 건 없네요. 애초에 정적의 소행이라 의심했었는데.”

“그런가.”

“거기에 내 주변 사람이 추가된 정도이긴 한데.”

나는 원래 그리 친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리건이나…….

어, 생각해 보니 친한 건 리건뿐인 것 같다.

레르하겐은 무슨 생각인지 그런 나를 그저 응시하기만 했다.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아니면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했다.

하나 무엇이 되었든 그가 내게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

“고마워요.”

“별로.”

“이 녀석을 제 방에 들이신 대가는 받은 걸로 치죠.”

“대가라…….”

“네. 대가였잖아요.”

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나를 순순히 도와주겠는가.

그런데 내 말에 옆에 있던 하시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까 전부터 우리를 조용히 보고 있던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응시하던 자세 그대로 복잡한 눈빛을 한 채 나를 향해 입을 뗐다.

“너.”

그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뭔가 생각하던 하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됐어.”

“말은 끝까지 해.”

“아니, 생각해 보니 잠깐 볼 꼬맹이한테 내가 무슨 설교를.”

“꼬맹이? 누가 꼬맹이라는 거야, 이 꼬맹이가?”

그러나 하시스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되레 내 머리를 잔뜩 흐트려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녀석이 어디서 뭘 잘못 배운 건가. 기껏 빗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다니.

나는 짜증 섞인 얼굴로 내 머리를 매만졌다.

그때, 갑자기 레르하겐이 나를 빤히 응시하는 것이 느껴져서 눈썹을 까닥였다.

“왜 그렇게 보세요?”

“혼자 할 수 있나?”

레르하겐의 물음에 나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물음이지.

그럼 당연히 혼자 하지, ‘세상 사람들, 내가 아이로 변했으니 와서 구경 좀 하세요’ 이러겠나.

나는 한쪽으로 머리를 정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혼자 해야죠.”

“당연히라.”

“네. 당연히.”

내 대답에 레르하겐의 눈빛이 미묘하게 빛났다. 그의 무심한 벽안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군.”

별 의미 없는 대꾸와 함께 레르하겐이 자취를 감추었다.

곧 하시스도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방에서 나갔다.

이윽고 홀로 남게 된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흑마법이라.’

새로운 단서를 찾긴 했지만, 이 단서만으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나도 알았다.

마족의 소멸 이후 흑마법은 금기가 되어 언급조차도 기피되었고 그나마 가장 자료가 많은 황궁의 서고에도 내 기억상 흑마법에 관한 정보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주변인이 했다고.’

‘주변인’이라는 단서가 첨가된다면 말이 달라진다.

‘역시 정적을 중심으로 찾아봐야 하는 건가. 하지만 원로원의 너구리 녀석들은 내가 뭘 조사하면 바로 이상함을 눈치챌 텐데. 아, 잠깐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문득 생각하는 것이 있어 멈칫하고 말았다.

‘내가 직접 나서기 애매하면, 다른 사람을 방패막이로 쓰면 되잖아?’

물론 그 방패막이는 나와 버금가는 권력을 갖고 있어야 하고, 나와 버금가는 실력을 갖고 있어야 했으며 동시에 나와 버금갈 정도로 흑마법을 증오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 나는 그런 녀석을 알고 있었다. 그 녀석은.

‘제 발로 황궁으로 들어오겠다고 했으니, 그에 대한 각오는 되어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버리면 되는 법이다.

* * *

“세베르 켈리어드의 기사단 복귀를 공식적으로 공표하고, 알현을 허한다고 전해. 날짜는 열흘 뒤. 비공식적으로 진행할 예정이야.”

이튿날 아침.

의례적으로 보고를 하러 온 리건은 갑작스러운 내 태도 전환에 조금 놀란 듯했다.

“웬일이십니까? 켈리어드 대공 전하라면 이름만 들어도 언짢아하시는 분이?”

“글쎄, 그 녀석이 탐탁잖기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 녀석을 쓸모 있게 사용할 아주 좋은 방법이 생각났거든.”

“사용할 방법이요?”

“리건, 흑마법에 대해서 알아?”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건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내가 왜 갑자기 이런 뜬금없는 화제를 꺼내는지 고민하다가, 문득 뭔가를 눈치챘는지 입을 딱 벌렸다.

“왜 갑자기 흑마법을 언급하시는 겁니까. 설마 폐하!”

“그래. 내가 이렇게 된 게 아무래도…….”

“이제는 하다 하다 흑마법에도 손을 대시려는 겁니까!”

“…….”

순간 느긋하게 미소를 짓다 멈칫했다.

말도 안 되는 반응에 눈썹을 까닥이며 고개를 드는데, 내 얼굴에 비낀 어이없음을 눈치채지 못한 듯, 리건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안 됩니다, 폐하. 흑마법은 행하는 자에게 반사 작용이 크게 미치는 사술입니다. 자칫하면 폐하께도 큰 악영향이 간다고요.”

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할까.

나는 진지하게 내가 흑마법 따위에 손을 댈 것이라고 생각하는 녀석의 정신머리를 뜯어고치는 것이 급선무일지, 아니면 이 와중에도 내게 끼칠 영향을 걱정해 주는 녀석의 충심을 칭찬하는 것이 먼저일지 고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걸까.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리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아닙니까?”

“그럼 그거겠니? 너는 어떻게 된 게!”

“휴, 다행이군요.”

리건은 내가 흑마법에 손을 대려는 것이 아님에 진심으로 안도하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리는데, 리건이 다시 의문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그러면 갑자기 흑마법 이야기는 왜 꺼내신 겁니까?”

“흑마법이래.”

“네?”

“나를 이 꼴로 만든 게.”

아까까지만 해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던 리건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언제나 나사 빠진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던 것이 전부 거짓이라는 듯 리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나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솔직히 나도 놀라긴 했지만, 놀라기만 하는 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얼굴 풀어. 내 보좌관을 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그런 표정을 지어?”

내 말에 리건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

그가 급히 헛기침을 하더니 곧바로 평소와 다름없이 누그러진 표정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충격이 가시지는 않았는지 그가 몇 번이나 안경을 고쳐 썼다.

내가 아이가 되었을 때도 이 정도 반응은 아니었는데. 흑마법이라는 게 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확실합니까?”

“확실해. 로드의 성격상 그런 거짓말을 할 이는 아니니까.”

“레르하겐 님께서 그러셨습니까? 흑마법이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낼 방법을 일러줬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어쨌든 나는 아이가 되었고, 흑마법이 작용했고, 그럼에도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해.”

리건은 살짝 코를 찡그렸다. 곧, 그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켈리어드 대공 전하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혹시…… 대공 전하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곁에 두면서 살펴보시려고.”

“아니, 그 반대야.”

“반대라고요?”

“세베르 켈리어드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내 물음에 리건이 얼굴을 찡그렸다.

오늘따라 질문을 너무 많이 던진 걸까.

나는 선심 쓰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바로 답했다.

“정의롭지 못한 것, 정당하지 못한 것, 그리고 약자를 괴롭히는 것.”

“아, 그래서 폐하와 사이가 좋지 않군요.”

“쓰읍.”

“아닙니다. 그래서요?”

리건은 내가 눈을 치켜뜨자 그대로 도리머리를 저었다.

이제는 충격에서 헤어 나왔다 그거지.

나는 조심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세베르 켈리어드는 흑마법을 극도로 혐오해. 흑마법은 인간들의 생명을 제물로 써서 구현되는 마법이야. 대량의 살생이 감행되기도 하고.”

사실 이 부분은 아무리 나라도 혐오하는 부분이긴 했다.

아니, 애초에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인간이라면 당연히 혐오하겠지. 그리고 그게 흑마법이 금기가 된 이유였다.

하지만 세베르 켈리어드는 평범한 인간 그 이상으로 흑마법을 경멸했다.

어린 시절부터 검을 잡아 오며, 타인을 보호하는 것을 절대적인 사명으로 삼은 그에게 흑마법은 그야말로 역겹고 증오스러운 것이었다.

“만약 나를 이렇게 만든 게 흑마법이 아니라 다른 술수라면 나는 세베르를 의심했을 거야. 하지만 흑마법이라니. 나는 세베르 녀석을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 대쪽같이 올곧은 성격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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