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1화
마치 따지기라도 하는 듯한 세베르의 말에 레르하겐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런 귀찮은 일을 내가 할 필요 있나?”
“폐하는…….”
“세베르 켈리어드, 그건 나와 에스트리아의 일이다. 너와 상관없어.”
레르하겐은 세베르가 자신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것을 염려했는지 그야말로 더없이 시큰둥한 얼굴로 그의 말을 잘랐다.
나는 뒤에서 레르하겐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세베르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의 안색을 살펴보다가, 다시 입을 뗐다.
“혹시 나 때문에 온 건가, 대공? 하면 어마마마께 전해 줄 테니 용건을 말해.”
아무리 생각해도 세베르가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올 만한 이유는 나뿐이다.
물론 내 소식이 왜 그를 이렇게 다급하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것이 세베르를 움직이게 만든 모양이었다.
세베르는 내 얼굴을 보다가 다소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소식을 듣고 온 것뿐. 결례를 범했습니다, 전하.”
말을 마친 뒤 세베르는 마치 인생의 커다란 결정을 내린 자처럼 천천히 뒤돌아섰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감정을 줄줄 흘리던 그의 모습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그는 다시 평소의 냉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리건은 세베르가 떠나갈 기색을 보이자 바로 그의 등을 떠밀지 못해 안달 난 얼굴로 그를 안내했다.
그러나 그때, 세베르가 리건에게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들려왔다.
“폐하께 고해라. 곧 기사단으로 복귀할 것이니, 근시일 내로 알현을 요청한다고.”
잠깐만, 기사단에 복귀한다고?
갑작스러운 그의 결정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자기 손으로 직위를 반납했으면서 갑자기 돌아온다니, 왜? 설마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알현하려는 것인가?’
내가 아는 세베르는 이렇게 즉흥적으로 뭔가를 결정하는 이가 아니었다.
그가 약을 잘못 주워 먹어 미친 것이 아니면, 필시 무슨 생각이 있다는 의미.
그에 다소 불안한 눈길을 하는데, 세베르가 나를 힐긋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곧 리건과 함께 세베르가 사라지자 나는 드디어 아이처럼 레르하겐의 뒤에 숨어 있던 것을 멈추고 바로 걸어 나왔다.
“미친 건가.”
흐음, 길게 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레르하겐이 나를 힐끔 보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그동안 영지에 있던 녀석이 갑자기 수도로 왔다. 마침 내가 등장한 이때. 그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과할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시야에 미간을 좁힌 채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는 하시스가 들어왔다.
“멀 봐?”
마치 바보천치를 보는 눈빛이라서 매섭게 물었다. 그러자 하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그냥, 네가 참 그 몸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어.”
“뭐?”
“상당히 어리다는 뜻이지.”
“헛소리하지 마.”
나보다도 어린 게 지금 나더러 어리다고 하는 건가?
나는 그의 말이 어이없어 조롱을 담아 대꾸했다. 하시스는 한쪽 입술을 비스듬히 올리며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다시 한번 세베르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가 갑자기 등장한 것도 이상했지만, 무엇보다도 기사단으로 복귀하겠다고 하는 의중이 무척이나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왜 나를 만나지 못해서 안달 난 것처럼 보이지?’
결국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세베르가 사라진 곳을 빤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레르하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은 채.
* * *
그날 이후로 내 존재는 아르시스 제국은 물론이요 대륙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심지어 황녀의 ‘이복 오빠’의 존재까지 알려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욱더 놀란 듯했다.
물론 레르하겐의 아들이라는 데서 황위 계승과 하나도 관계가 없으니 별로 논란거리는 생기지 않았지만.
덕분에 황궁은 내가 즉위한 뒤 처음으로 각국에서 보내오는 선물에 파묻혀야 했다.
“우아, 정말 귀엽고 예쁘네요.”
셀라는 내 앞에 놓인 각종 화려하고 귀여운 보석 장신구들과 고급스러운 천과 구두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해도 황제였을 때 받은 선물보다 귀하겠나.
시큰둥한 얼굴로 선물들을 뒤적거리던 나는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황제 폐하 앞으로도 선물이 많이 들어왔어요.”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겠지.”
이 며칠간 어떻게든 정확한 발음을 하기 위해 입과 머리에 힘을 주고 다닌 덕분에 이제는 정신만 차리면 발음이 크게 새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는 울면서 발음을 교정했던 것 같은데. 다행히도 알맹이는 어른이어서 그런가 이번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어려워도 무조건 교정했을 거지만.
내 읊조림에 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래도요. 모두 황녀 전하를 이렇게 반기는데요.”
설마 나를 반겨서 그러겠는가. 그저 아르시스의 국력이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지.
비록 귀족들에게 폭군이라 불리긴 했지만, 나는 전쟁을 즐기는 황제는 아니었다.
아니, 즐기지 않는다 뿐일까. 돈 들고 목숨 드는 전쟁을 나는 거의 혐오하다시피 했다.
사람 목숨은 장난이 아니다. 이미 충분히 손에 피를 묻힌 나는, 굳이 더 손에 피를 묻혀 업보를 가중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내가 군사를 보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시스 제국은 내가 즉위한 뒤 대륙은 물론이요 다른 대륙의 강대국과 견주어 보아도 대단한 실력을 자랑했으니.
“무섭겠지. 내가 황제가 댈, 될 텐데, 어마마마와 달리 나는 어떤 성정인지 모르잖아.”
물론 ‘에슈트’가 황제가 되는 일은 없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셀라는 내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웃으며 선물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나는 무심하게 한쪽에 쌓인 서신들을 훑었다. 다름 아닌 이 며칠간 귀족들이 보낸 축하 서신이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훑는데, 그중에서 꽤 눈에 띄는 이름이 있어 반가웠다.
엘비어츠 공작가.
내 외할아버지의 가문이자, 동시에 내가 황제가 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가문이었다.
나는 서신을 뜯었다. 휘황찬란하게 인장까지 박아 넣은 다른 가문들과 달리 달랑 사인만 있는 서신에는, 누가 봐도 내 외할아버지인 엘비어츠 공이 쓴 글이 있었다.
[곧 가마!
외할아버지가.]
“얼마나 급하게 쓴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져 서신을 봉투에 넣었다.
리건에게 외할아버지가 오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때 셀라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 왕관은 어찌하실 예정이신가요?”
“왕관?”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황족이 탄생하면 언제나 왕관을 하나씩 맞춤 제작하곤 했다.
물론 나는 진짜 탄생한 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새로운 황족이니 겉으로 보기에는 구색을 갖춰야 할 것이다.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의 왕관은 황후 폐하나 황비 전하께서 책임지신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왕…… 황후가 없잖아.”
“그럼, 레르하겐 님께서 만드시겠죠? 기대되네요, 황녀 전하께 얼마나 예쁘고 귀한 것들을 주실지.”
……글쎄?
사실 왕관을 만드는 풍습은 어디까지나 보여 주기식에 불과했다.
보통은 자식에게 주는 왕관의 값어치로 그 어미의 가세와 권력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 내 아버지의 모든 후궁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든 귀한 왕관을 만들어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려 했다.
참고로 나도 왕관이 있기는 했다.
다만 그 왕관은 엘비어츠 공작가에서 제작한 것으로서, 그저 비싼 걸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것이라 버린 지 오래였다.
레르하겐이 그런 것을 열성스럽게 만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니 리건에게 구색 맞춰 만들어 두라고 해야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은 오직 나뿐이었나.
얼마 뒤, 갑자기 내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온 하시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으로 보석 산을 소환해 냈다.
“이게 다 뭐야?”
그의 기행에 내가 입을 떡 벌리고 물었다. 하시스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네 보좌관이 말하길 왕관인지 뭔지 만들어야 한다며?”
“그래서?”
“그래서 지금 보석을 고르고 있는 거잖냐.”
“……네가?”
“그럴 리가. 이거 전부 스승님의 레어에서 가져온 거다. 네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고 했어.”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하는 척 구색이라도 맞춰 달라고 했더니 진짜로 맞추는 척은 하나 보다.
나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하며 보석들을 훑어보았다.
곧 금색 물결이 넘실거리는 검은색 보석을 들고 그것을 찬찬히 보았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보석들과도 다른, 마치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효과는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바라보다 하시스를 향해 물었다.
“이건 묘안석이야?”
“비슷하지.”
“예쁘고 신비롭네. 하지만 왕관에 박기에 묘안석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야. 이 제국의 인간들은 예쁜 것보다는 무조건 크고 비싼 보석만 고집하는 천박한 취향이 있거든.”
그러나 내 말에 하시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진심이냐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이게 평범한 묘안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그거, 스승님의 단도에 박혀 있던 거다.”
“……?”
“주신 겔라가 직접 스승님께 전승해 준 단도에 박혀 있던 거야. 아마 제국의 역사보다도 더 긴…… 야, 괜찮냐?”
그 순간 내 손에 들려 있던 보석이 주륵 떨어졌다.
그에 기겁한 하시스가 아슬아슬하게 보석을 받아 들었다.
“너 뭐 하냐? 이 귀한 걸. 깨지면 복구도 못 해.”
“지금 황녀의 왕관에 주신 겔라의 축복이 담긴 보석을 박겠다고?”
제정신인가?
하시스는 드물게 내게 동조하는 얼굴을 했다. 그는 거의 질린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