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10화
“그게 무슨…….”
나는 리건의 생뚱맞은 말에 더더욱 얼굴을 찌푸렸다. 세베르 켈리어드는 내 소환에도 잘 응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알현을?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조금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갑자기 커다랗고 길쭉한 인영이 다가왔다.
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모습에 그만 경악에 빠지고 말았다.
“델멘 경, 어찌 된 일이지? 나는 폐하를 뵙겠다고 했는데.”
“대공 전하, 어찌!”
“폐하는 어디 있지?”
리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는지, 모습을 드러낸 이는 세베르 켈리어드였다.
그야말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얼굴에 보는 이를 그대로 빨아들일 것 같은 매혹적인 금안, 냉랭하게 그려진 차가운 눈매와 꽉 다물어진 입술, 날렵한 턱선. 모든 것이 세베르 켈리어드였다.
그러나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평소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반듯하게 정돈된 머리카락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는데 심지어 땀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목을 조이는 크라바트가 있어야 할 곳은 훤하게 드러나 목울대가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 채우다 만 셔츠의 깃이 살짝 벌어져 있어 탄탄한 몸이 언뜻언뜻 보이고 있었다.
평소에 코트의 단추 하나하나 전부 채워 입던 그인지라, 의아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도 저럴 때가 있어?’
맨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던 녀석의 의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뭔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직 경멸과 멸시만을 보여 주던 그의 눈가에 경악의 감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는 절망, 혹은 짙은 분노 같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 * *
세베르 켈리어드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려면 일단 그의 가문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아르시스 제국에서 개국공신 가문이자 황실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는 검.
대대로 황실 기사단장을 배출하는 절대적인 명예를 지닌 가문인 켈리어드 대공가에서도 세베르는 역대 가주 중 가장 천재적인 재능으로 모든 이의 칭송과 추앙을 받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이의 기대에 걸맞게 그는 열세 살에 선대 기사단장을 상대로 삼 연승이라는 업적을 이루어 냈고, 성인이 되던 열여덟 살에 직접 드래곤의 목을 베어 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 당시 하는 짓이라곤 기껏해야 언니들 뒤에서 달달 떨고 있었던 것이 전부였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켈리어드 가문 특유의 짙은 흑발과 태양을 닮은 매혹적인 금안, 붓으로 그린 듯 유려한 눈썹과 깊은 눈매.
그야말로 조각상을 인간으로 재현해놓은 듯 정교하면서도 시선을 끌어들이는 얼굴과 탄탄하면서도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우월한 체격.
그런 그가 황실의 관심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터.
열여덟 살에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받은 뒤 자연스럽게 최연소 기사단장이, 그리고 대공 위를 물려받게 된 그는 내 아바마마의 자랑스러운 신하였고, 내 오라버니들의 질투의 대상이었으며 언니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물론 세베르는 딱히 사람들의 시선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차기 켈리어드 대공이 과연 누구를 황제로 지지할까 떠들었지만, 세베르는 그저 고고하게 기사로서, 켈리어드 대공으로서 제가 할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그런 기사로서의 자부심과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은 형제자매를 벤 나를 누구보다도 경멸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황궁을 피바다로 물들인 그날 보았던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한 치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반듯한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지던 날.
- 전하께서 하신 겁니까?
- 그래, 내가 죽였어. 이곳에 있는 모든 시체, 핏자국, 그리고 혈흔 모두 내가 했어.
- …….
- 화가 나? 충성을 바치던 이들이 전부 죽어서?
내 물음에 세베르는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혈흔이 낭자한 바닥과 내 오라비, 마지막으로 내게 닿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단정한 얼굴에 균열이 생기더니 마치 으르렁거리듯 그가 한 자 한 자 짓이겼다.
- 너는, 내 황제가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법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로 추대하고자 하는 이가 내 손에 죽었고, 한때 약혼 이야기가 오가던 황녀도 죽고, 그가 지켜야 하는 황실은 내 손에 풍비박산이 났으니 대공으로서도 기사로서도 당연히 자존심이 상했겠지.
이 모든 것이 한때 그의 적선 같은 호의에 배시시 웃던 멍청한 계집애에 불과하던 내가 한 짓이라니, 오죽했을까.
어쨌든 그 뒤로 세베르는 기사단장 업무를 반납한 뒤 영지로 돌아갔고, 내 소환이 있을 때만 간간이 차가운 얼굴을 들이밀었다.
물론 나는 그의 직위 반납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가 황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데에는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나는 켈리어드 대공가의 이름이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저런 꼴로 오다니.”
나는 최대한 놀라움을 숨기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빛으로 세베르를 빤히 보았다.
갑작스러운 세베르의 등장에 리건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대공 전하, 기척을 죽이고 제 뒤를 밟는 것은 폐하에 대한 결례입니다.”
하나 세베르는 리건의 말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예법에도 무지하지 않은 녀석이 왜 이러지.’
나는 일부러 살짝 뒷걸음질을 쳐 레르하겐의 다리 뒤에 쏙 숨었다.
세베르는 내게 시선이 못 박힌 듯 그런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눈을 깜박거리며 마치 처음 본다는 듯 물었다.
“누구지?”
순간 세베르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마치 절망한 듯이 나를 응시하던 그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이내 그가 시선을 살짝 들어 천천히 레르하겐에게로 옮겼다.
그 순간, 그의 눈가에 거센 분노가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화를 억누르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결례를 이해해 주십시오. 세베르 켈리어드입니다.”
결례인 걸 아는 녀석이.
이 모든 상황이 미심쩍어 나는 일부러 입을 꼭 다물었다.
굳이 세베르에게 말을 걸어 그의 주의를 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세베르는 대단한 검사인 것만큼 감이 엄청나게 좋은 인물이었다. 혹시라도 그에게 약점을 잡히면 큰일이었다.
나를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은 급한 쪽은 그이지 내가 아니라는 것.
대체 무슨 용건이 있어서……. 일부러 침묵으로 그의 반응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데, 갑자기 레르하겐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켈리어드의 핏줄.”
그 차가운 목소리에는 나도 흠칫할 정도의 위압감이 들어 있었다.
하나 그것보다도 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라고 말았다.
혹시 세베르가 드래곤의 목을 쳐 버린 것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원한이라도 있는 것인가?
레르하겐이 딱히 동족이 죽었다고 인간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성격이 저래도 동족에 대한 애정은 각별할지도.
나도 모르게 레르하겐의 바지 자락을 꽉 잡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세베르에게 시선을 돌려 그의 안색을 살폈다.
꾹 다물린 입술과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 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꿈틀거리는 목울대.
내가 황녀였을 때도, 황제로 즉위한 뒤에도 차분하고 오만한 모습으로 고고하게 굴며 나를 경멸하던 그의 동요에 나는 다소 기분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세베르가 입을 열었다.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과…… 폐하 사이에 아이가 있다고.”
“그래.”
세베르의 어조와 달리 레르하겐의 답장은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그 단순한 대답에도 세베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레르하겐의 차가운 눈길을 보며, 서늘하게 읊조렸다.
“지금, 10년 전에 제가 당신을 도발한 대가로 벌이라도 내리는 겁니까. 그래서 폐하와 아이를 가지신 겁니까?”
“논리가 이상하군. 그래서라니.”
“제가.”
세베르는 레르하겐의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꽉 다물었다. 말을 잇던 그의 시선이 내게 살짝 닿았다. 이내 그가 심호흡을 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 나는 눈썹을 까닥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것이야 그래, 10년 전이라고 했으니 세베르가 드래곤을 죽인 것 때문이라고 치자. 하지만 내가 아이를 가진 것은 레르하겐의 말마따나 그와 무슨 상관이냔 말인가.
그러나 그런 내 의문에 세베르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그가 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더니 작게 읊조렸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니겠거니 했는데.”
무슨 소식?
소식이라고 해 봤자 ‘황제 에스트리아’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 정도다.
그런데 그 소식이 이 남자가 이렇게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면서 이곳으로 온 이유가 되나?
세베르는 그러고도 한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진정된 듯 그가 입을 열었다.
“폐하를 알현하겠습니다. 폐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말에 레르하겐은 답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 폐하가 지금 자신의 뒤에서 제 바지 자락을 잡고 있으니까.
대신 상황을 파악하던 내가 살짝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마마마는 침소에 계셔. 하지만 알현은 안 돼. 나를 레어에서 데려오느라 많이 피곤하셔.”
세베르는 내 대답에 다시 움찔했다.
그가 다시 흉흉한 시선으로 레르하겐에게 말했다.
“전하를 데려오는 데 왜 폐하께서 힘을 쓰시는 겁니까. 당신은 뭘 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