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9화
‘뭐야, 어디로 간 거야?’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그사이에 또 사라졌어?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조금 전부터 나를 힐끔거리던 기사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안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고 입을 열었다.
“저, 황녀 전하, 도와드릴 거라도?”
“아, 로-.”
로드가 왔느냐고 물으려던 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엄연히 말하자면 그는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호칭을 똑바로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황제와 공식적으로 결혼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아바마마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럼 아버지?
물론 가장 무난한 호칭이긴 했으나, 어쩐지 애착이 깊어 보이지는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부녀 관계로 보일 필요는 있었다.
고민하다 입을 뗐다.
“그, 아, 아…… 아.”
나는 애써 이것은 호칭일 뿐이며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되뇌었다.
그래, 모두를 완벽하게 속여야 하는데 이 정도도 못 하겠는가.
에스트리아, 이건 이상한 게 아니야. 언니들이 애교를 부리면서 아바마마한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해 내.
그러나 마음과 입은 결국 따로 놀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입을 열었다.
“어디에-.”
“네?”
“……빠, ……빠는 어디에.”
“아, 파파, 레르하겐 님을 찾으시는 겁니까?”
아 잠깐만, 방금 뭐라고?
나는 기사의 청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저게 어떻게 파파로 들리지?
아니 그리고 나는 누가 봐도 다섯 살은 넘었는데 아기들이나 쓸 법한 옹알이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기사는 이미 내가 파파라고 말했다고 확신하는지 활짝 웃었다.
심지어 그 눈빛에는 귀엽다는 의미까지 들어 있어서, 그야말로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사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레르하겐 님은 후원에 계시다고 시녀들이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파파라고 한 거 아니야! 아빠라고 한 거였어!”
졸지에 옹알이하는 어린이가 되고 만 내겐 기사의 착각을 고쳐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하나 기사는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저 허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저희 딸도 종종 애교를 부릴 때 그렇게 말하곤 하는데요.”
“나는 애교를 부린 적이 없어!”
“네, 알겠습니다.”
전혀 알고 있는 표정이 아니잖아!
“후원까지 에스코트 해 드릴까요?”
“필요 없어.”
결국 나는 그야말로 심기 불편한 얼굴로 레르하겐의 방 앞을 떠났다.
곧 아래층으로 내려간 나는, 후원으로 향하는 복도의 한쪽에 있는 기둥 뒤에 따닥따닥 붙어 있는 시녀들을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저건 또 머야?”
아무리 봐도 내 궁의 시녀로 보이는 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붉히고 어딘가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나는, 태평하게 나무 위에서 자는 레르하겐을 발견하고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지금 다들 레르하겐을 보고 저러는 건가?
심지어 그 나무 아래에서 하시스가 검을 닦고 있는데, 시녀들 중 어려 보이는 몇몇의 시선은 그에게 꽂혀 있었다.
물론 레르하겐이 잘생겼다는 개념을 뛰어넘어 정말 조각처럼 완벽해 매혹적인 건 인정했다.
곱상하고 괴롭히는 맛이 있게 생긴 리건이나, 그야말로 얼음장같이 싸늘하게 생긴 켈리어드 대공과 달리 레르하겐은 묘하게 나른하고 권태로운 느낌이 있는 미남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지, 볼품 없이 뭐 하는 짓들이지.
심지어 저자는 현재 내 아버지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황제 에스트리아 와 아이를 낳은 남자란 말이다.
나는 기가 막혀 시녀들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때, 한 시녀가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화, 황녀 전하?”
“그래. 내…… 아빠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다시는 파파라고 불렀다는 오해 따위 받지 않으려 ‘아빠’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물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시녀들의 낯빛이 하얘지면서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전하, 송구하옵니다. 저희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었고!”
나는 쯧 혀를 찼다.
“어마마마의 궁에서 일하는 시녀라면 품위를 지켜.”
황녀의 아버지를 넘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궁의 시녀라면 어디서든 저렇게 헤벌쭉하게 다니면 안 되지 않는가.
시녀들은 황급히 떠났다. 나는 화가 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차단한 뒤, 후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 등장에 하시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왔냐?”
나는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바로 고개를 들어 나무 위에 있는 레르하겐을 향해 말했다.
“그냥 방에 좀 계시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시녀들이 이렇게 정신 빼고 있지도 않았을 거고, 나, 나도 그 망신을 안 당했을 거 아니에요.”
레르하겐은 내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한 일도 아닌데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구나.”
“대체 왜 이곳에 계신 거예요? 멀쩡한 곳 많은데 왜 이렇게 사방에서 다 보이는 나무 위에 누워 계시는 거죠?”
“여기가 시원해서.”
“……따뜻한 걸 좋아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왜 왔느냐.”
레르하겐은 자연스럽지 않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자연스럽게 넘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 되레 내가 푸시식 식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 드래곤 로드를 내게 맞추느니 내가 저쪽에 맞추는 게 더 빠르겠다.
“오늘 제가 황녀라는 사실을 밝혔으니, 조금 신경 써 달라는 말을 전하려고 왔어요. 회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사라지셨잖아요.”
“회의가 하도 지루해서 말이다.”
“원로원이 들었다면 단체로 뒷골을 잡고 넘어갈 소리를 하시네요.”
오늘 회의에서 그들의 표정을 봤으면서도 저런 말을 하다니, 어떤 의미로는 정말 대단하다.
그래도 그라면 누군가에게 휘둘리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이렇게 황궁에 계셔서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좀 황궁에 붙어 있으세요.”
“그럴 예정이다. 워프 마법을 쓰는 것도 힘이 들거든.”
“마력도 넘쳐 나면서.”
“그래서, 그 말을 전하러 온 건가?”
레르하겐의 말에 나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물론 내가 그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당부를 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리건을 통해서 전해도 될 말이라면 내가 굳이 직접 올 필요는 없었다.
“그럴 리가요. 당연히 따로 드릴 말이 있어서 왔죠.”
“……흐음.”
레르하겐은 여전히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나는 팔짱을 척 끼고는, 턱으로 하시스를 까닥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을 제 방에 들인 대가로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승낙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거절도 한 적 없으니까요.”
“그래서, 뭐지?”
“제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도구나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비록 성격은 이상하지만 레르하겐은 엄연히 신화와 기원을 함께하는 존재였다.
그야말로 이 세상 신화의 절반은 그가 썼다고 해도 무방한 상태.
혹시라도 뭔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갖고 있는데, 갑자기 레르하겐이 몸을 일으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에 착지했다.
어.
나는 내 위로 비낀 그의 커다란 인영에 눈을 깜박거렸다.
레르하겐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곧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미묘한 눈빛을 하던 그가, 하시스를 힐끔 보더니 입을 뗐다.
“네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은, 평범한 마법의 힘은 아니라는 거겠지.”
“당연하죠.”
“그럼.”
레르하겐은 살짝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곧 입을 뗐다.
“아마 다른 힘과 연관이 있을 것 같군.”
“다른 힘이요?”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그게 뭔가요?”
“나도 모른다.”
“…….”
“그냥 있을 수도 있다고 했을 뿐. 찾아는 보지.”
은근히 희망을 품고 있던 나는 괜히 실망스러워졌다.
하지만 일단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드래곤이 찾아본다고 했으니, 나는 그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걸 왜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하지?
보통 사람들은 이 정도는 다 하지 않나?
나는 무심한 얼굴의 레르하겐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정말이지 표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황녀라는 것을 밝혔으니, 제 아버지로서 신경 써야 하는 일이 꽤 많을 거예요.”
“귀찮군.”
“뭐, 사실 리건이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하지 않게 진짜 아버지인 척이라도 좀 해 주세요.”
“……생각해 보지.”
“좀 확답이라는 것을 해 보는 건 어때요? 자꾸 귀찮아하지 말고요.”
“확답이라는 건 하면 안 된다.”
“왜요?”
“훗날 후회할 일을 만들거든.”
뭐, 그건 나랑 생각이 같네. 이 드래곤, 은근히 영악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감히 몇천 살, 아니, 어쩌면 몇만 살 정도 되는 존재를 영악하다고 판단하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죠. 아, 앞으로 방에 좀 붙어 있으세요. 그리고 시녀들이 주변에서 침을 흘리고 있으면 쫓아내시고요.”
“귀찮다.”
“어련하시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그럼 이제 방으로 돌아가 식사나 할까, 생각하는데, 그 순간 저 멀리에서 급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달려오는 인영은 분명 리건이었다.
드디어 귀족들에게서 벗어났나. 그리 생각하며 우리 주변에 두른 방음막을 치우는데, 헐떡거리면서 온 리건이 나를 향해 말했다.
“폐, 아니, 전하.”
“무슨 일이야? 내가 황궁에서는 침착하게 품위를 지키라고 했지.”
사실 리건은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 앞에서 절대 책잡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리건의 이어지는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헉…… 대공, 대공 전하께서.”
“대공? 세베르 켈리어드?”
“대공 전하께서, 폐하를 알현하기를 요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