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8화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 아이는 뭐고 레르하겐 님은 왜.”
내 성격을 그대로 복제한 ‘인형 에스트리아’는 그런 귀족들의 다그침에도 그저 냉정하게 단상의 왕좌에 천천히 착석한 뒤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계속되는 ‘내’ 침묵에 귀족들이 본능적으로 하나둘씩 입을 다물 무렵, ‘내’가 입을 열었다.
<오늘 귀경들을 이리 소환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중요한 사항을 발표하기 위해서이다.>
“중대한 사항이라니.”
<그동안 귀경들에게는 함구했지만, 사실 짐에게는 레르하겐과 낳은 딸이 있다.>
그 순간 원내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마치 엄마에게 딱 붙어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인형’의 손을 잡고 귀족들의 안색을 살폈다.
‘아직까지는 이상한 게 없네.’
귀족들은 그저 ‘내’게 딸이 있다는 사실에 얼어붙은 듯했다.
심지어 그 딸의 아버지가 레르하겐이라는 데서 아마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이 무슨.”
길고 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리건의 아버지이자 원로원의 수장인 델멘 공작이었다.
내 외할아버지인 엘비어츠 공작과 나를 적대시하던 켈리어드 대공이 완전히 원로원에서 나간 뒤 거의 귀족들의 수장 격이 된 그는, 과연 제 직무에 충실한 듯했다.
물론 그래 봤자 ‘내’ 싸늘한 눈빛 아래에선 별 의미 없었지만.
<안 되나?>
안 되겠지.
기실 나도 알고 있었다. 황제가 대신들의 이목을 피해 아이를 낳고 숨겨 두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제 아들이나 제 가문의 이가 내 눈에 들어 황제의 남편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던 이들이었다.
물론 그 목적은 황권에 손을 대는 것.
그러니 그들의 충격이 얼마나 크겠나.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자신과 똑같은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는데 놀랍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는 귀족들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리고 그사이 말을 고르던 델멘 공작이 입을 열었다.
“하면 이 아이, 아니, 황녀 전하께서는 참으로 드래곤 로드님의 따님이란 말씀이십니까. 아니 어찌-.”
<귀경들이 보내는 사내들은 모두 잘 보았다. 하나같이 노리는 것이 너무 명백해 우습더군.>
참고로 이건 내 진심이었다.
<하여 귀경들의 손아귀에 놀아나지 않을 사내로 찾아 후사를 보았는데, 마음에 안 드나?>
“폐하, 폐하께서 이리 원로원을 신뢰하지 못하신다면 저희로서도 난감합니다.”
<하여 어찌할 예정인가.>
“…….”
<내가 귀경들을 신뢰하지 못해 드래곤과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 아이를 죽이겠나, 아니면 저 드래곤 로드를 죽이겠나, 아니면-.>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웃음 섞인 나의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짐을 죽이겠나.>
“폐하!”
<짐은 피붙이도 죽여 황좌에 올랐다. 하여 경들은 짐을 폭군이라 부르지.>
“그런 적 없습니다!”
<상관없어. 나약한 왕보다야 피로 물든 폭군이 낫지 않겠나. 하나 귀경들은 알아야 해. 제 피붙이도 죽였는데, 하물며 피붙이가 아닌 이들은 어떻겠나.>
나는 일부러 ‘인형’의 무릎을 꼭 잡고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인형’의 입을 빌리고 있지만, 기실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경고에 불과했다.
<짐의 황권은 겨우 아이 하나 낳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이제 후계자가 생겼으니, 더욱더 탄탄해지겠지.>
“하지만 폐하, 하면 혼인은-.”
<올리지 않아.>
귀족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이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종족이 경배하는 드래곤 로드를 정식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아이를 낳은 것 이상으로 일이 복잡해지니까.
나는 귀족들의 얼굴을 살피다가, 마지막으로 레르하겐을 힐끔 보았다. 내가 기껏 위엄을 갖추고 말했음에도, 레르하겐은 그저 의자에 앉아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것보다 저렇게 상징처럼 앉아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존재 자체가 수많은 귀족의 기를 눌러 놓고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슬슬 깔끔하게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마침 델멘 공작이 물었다.
“황녀 전하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다.”
“에슈트.”
이번에 대답한 것은 나였다. 삽시에 내게 몰리는 눈길에, 나는 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에슈트 드 레비아체, 아르시제스다.”
“에슈트라면.”
“어마마마의 어린 시절 아명이야. 어마마마께서 특별히 지어 주셨지. 그렇죠?”
내 물음에 ‘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디 더 물어볼 것이 있느냐는 듯이 귀족들을 쭉 둘러보았다.
결국 얼마나 지났을까, 델멘 공작이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원로원의 수장이 이리 구는데 나머지 귀족들의 태도야 볼 것도 없다.
나는 한쪽에 서 있는 리건과 이제는 아예 잠에 빠진 듯한 레르하겐을 번갈아 보다가 마지막으로 귀족들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 * *
회의는 무사히 끝났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오직 나뿐인 것 같았으나, 일단 원로원 중 누구도 내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황제가 그동안 드래곤 로드와 낳은 딸을 숨기고 키웠다’에 관심을 주었는데, 그 덕분에 바빠진 것은 리건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는 귀족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지만 애초에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그가 해명하기로 했기에 나는 굳이 그를 귀족들의 마수에서 구해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인형’마저 내 방으로 보낸 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마력으로 문을 잠근 뒤, 새로이 ‘내 방’이 된 곳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 발을 내딛자마자 꽤 정교하게 꾸며진 인테리어에 감탄을 하기가 무섭게, 나는 침대 위에 있는 ‘물건’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물었다.
“저것들은 머야?”
“인형이에요! 리건 님이 준비하지 않아서 제가 특별히 준비해 보았어요! 귀엽죠? 어떤 걸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고양이랑 강아지랑 여우랑 토끼랑 다 준비해 보았어요.”
셀라의 해맑은 얼굴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그녀의 상식에서 아이의 방에 인형 하나둘 정도는 있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아이가 아니었고, 저 인형들은 아무리 봐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인형을 아주 싫어했다.
‘마음 같아서는 치워 버리라고 하고 싶지만, 아이의 방이니 내버려 두는 게 보기에 좋겠지.’
결국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토끼 인형을 무심코 집어 들며 문득 이렇게 ‘내 방’에 인형이 있는 건 처음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시녀도 없는데 인형 따위를 가져 봤을 리가. 이런 좋은 것들은 언제나 내 형제들의 것이었고, 나는 감히 만져 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보란 듯이 아바마마가 선물해 줬다고 내 앞에서 인형을 자랑하곤 했다.
그게 바로 내가 인형을 싫어하는 이유였다. 내가 갖지 못했으니까.
“토끼 인형 좋아하세요?”
저도 모르게 생각에 잠겼나 보다. 나는 셀라의 물음에 불현듯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좋아해.”
“그럼 고양이?”
“그것보다, 배고픈데.”
나는 결국 셀라의 부담스러운 눈빛에서 벗어나고자 화제를 돌렸다. 그에 셀라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짝 쳤다.
“간식을 가져올게요.”
“아니, 간식 말고 식사…….”
“하지만 아직 점심시간이 되지 않았는걸요.”
나는 살짝 혀를 찼다.
‘의외로 고집이 있네. 의욕이 넘치는 타입인가.’
내 생각과 달리 셀라는 해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따 식사하셔야 하니 가볍게 과일 같은 것을 가져올게요. 오늘은 경황이 없어 미리 디저트를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제가 직접 만들어 드릴게요.”
정말 호들갑은.
그러나 굳이 말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총총히 방에서 나가는 셀라를 보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손에 들린 인형을 아무렇게나 침대에 놓고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내 키에 맞춰 제작되었는지 올라가기 꽤 쉬웠다.
어디 그뿐일까, 방 자체가 마치 나를 위해 맞춤 제작된 것처럼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어린 시절 내가 꿈꾸던 그대로의 방.
‘리건 얘도 참 쓸데없는 짓을 한다니까. 대충 장식하면 될걸.’
그렇게 읊조리며 방을 둘러보던 나는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그 속에는 조금 통통한 뺨을 가진 ‘황녀 에슈트’가 있었다. 그것을 빤히 보던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언제까지 이 모습으로 있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별 의미 없는 고민이라는 걸 깨닫고 생각을 접었다.
‘일단은 주변 이들이 눈치를 못 채게 잘 연기하는 게 중요해. 그리고 가급적 조용하게 조사를 해 보아야겠지.’
이 모든 것을 위해 ‘가짜 가족’까지 만들어 두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기분이 미묘해졌다.
가족이라.
하지만 빠르게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 중으로 레르하겐과 하시스 두 사람도 황궁으로 완전히 들어올 건데. 혹시 실수 같은 건 하지 않겠지?’
오늘 막 숨겨진 황녀가 발표된 터라 그들 역시 모든 이의 주목을 받을 게 뻔했다. 어제는 하도 급해서 자세하게 알려 주지 않았는데.
‘이제라도 찾아가서 주의 사항을 일러 줘야지. 겸사겸사 부탁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 * *
갑작스럽게 발표된 내 존재는 아무래도 생각 이상으로 황궁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 같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내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모든 이목이 내게 쏠렸고, 그 이목 중 일부는 그리 호의적이지도, 그렇다고 악의적이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호기심.
그래, 호기심에 가까운 눈빛 속에서 걸음을 옮기던 나는, 레르하겐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문 너머에서 아무런 호응이 없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