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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7화 (7/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7화

“저놈의 드래곤이!”

나는 방금까지만 해도 레르하겐이 있던 곳을 향해 발을 굴렀다. 물론 아무런 소용도 없었지만.

‘역시, 아버지를 잘못 골랐어.’

나는 그리 읊조리며 이마를 짚었다.

* * *

미풍이 포근하게 부는 대륙의 남쪽 끝.

허락되지 않은 이는 발견조차 할 수 없는 드래곤 레어.

마치 신을 모시는 신전처럼 새하얗기 그지없는 곳에서, 레르하겐이 하시스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만 들어가야겠군. 피곤하니 건드리지 마라.”

다른 이들이라면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을 말에 하시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진짜로 피곤하신 게 아니라는 거 압니다. 애초에 수면도 안 취하는 분이.”

“스승에게 지나치게 건방지군.”

“아까 저를 벽에 꽂은 대가라고 하죠.”

“쪼잔한 녀석. 겨우 그런 걸 갖고.”

“제가 맞고 있을 때는 보고만 계시다가, 제가 그…… 꼬맹이한테 검을 겨누자마자 나타나신 거잖습니까.”

“글쎄.”

“모르는 척하지 마시죠.”

하시스의 얼굴에는 어이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르하겐은 웬만해선 직접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평소에 외부 침입자들을 상대하다가 엉망이 된 하시스를 보면서도 시큰둥한 얼굴을 하던 자였다.

귀찮을 것을 싫어하는 성정의 이면에는, 타인에게 일절 관심이 없는 지독한 냉정함이 있었다.

그나마 제자에겐 관심을 갖는 듯하나.

“그 꼬맹이는 대체 뭡니까?”

“아르시스의 황제다.”

“어쩐지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 근데 왜 꼴이 그 모양입니까?”

“이유를 알았다면 진작에 돌아갔겠지. 그 성정에.”

“스승님은 그 꼬맹이를 잘 아십니까? 평소에는 소환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분이 소환에 응하시고.”

레르하겐은 하시스의 물음에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애매한 미소를 짓던 그가 손을 젓더니, 모습을 감췄다.

홀로 남겨진 하시스는 혀를 찼다. 레르하겐이 순순히 대답해 줄 것이라생각은 안 했다.

“나까지 끌어들이다니.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그렇게 읊조려 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머리에 까치집을 이고 멍하니 있는 거울 속 아이를 응시했다.

어제저녁의 여파가 컸던 걸까, 푹 잤는데도 여전히 피곤했다.

‘아냐, 벌써 이러면 안 돼.’

오늘 중요한 발표가 있는데 이런 정신머리로 참석할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자 머리를 터는데, 익숙한 노크 소리와 함께 리건이 들어왔다.

“폐하, 기침하셨- 헉.”

그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내 몰골을 보자마자 뒷걸음질을 쳤다. 물론 내 싸늘한 눈빛에 침착하게 문을 닫고 들어왔지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있었지. 그것도 아주 큰일.”

“아까 확인했을 때 기사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는데.”

“아, 마력으로 소리를 차단해서 그래. 원래는 포박하고 기사를 불러오려고 했는데.”

“누굴…… 포박하려던 겁니까?”

“내 이복 오빠.”

“……?”

리건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어젯밤 레르하겐 님의 제자가 실수로 내 방에 들어왔어. 좌표를 잘못 찍은 모양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러게, 어떻게 그럴 수가.”

내가 들여보냈다고 해도 원래 황제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중죄다. 제국법에 따라 멸문을 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다만 그 드래곤이 너무 제멋대로라 그렇지.

‘그래, 강하면 다지.’

그렇게 생각하며 관자놀이를 짚는데, 리건이 꽤 진지하게 물었다.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괜찮아. 다만 조금 복잡한 이유로 그 녀석이 내가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 버렸어. 그래서 이복 오빠로 내 옆에 묶어 두려고 한 거야.”

“아.”

“내 옆에 묶어 놓기에는 가장 좋은 핑계니까. 겸사겸사 부려 먹기도 하고.”

“부려 먹…….”

“아무튼 레르하겐 님의 방 옆으로 방 하나 더 마련해. 군식구가 늘었으니.”

“알겠습니다.”

리건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그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까 전부터 품에 안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게 내밀었다.

“오늘 정오에 열릴 회의의 소집령입니다.”

종이에는 황제 폐하와 후계자 문제로 공표할 일이 있으니 긴급히 소집을 명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용에 딱히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의 표정이 눈앞에 훤하네. 이대로 진행해. 나는 일단 좀 씻어야겠어.”

“셀라더러 시중을 들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이곳은 엄연히 황제의 방이야. 황제가 없는 게 이상해. 하물며 이 방에서 황제가 나가는 것을 본 이가 없으면 더욱더.”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날 뭐로 보는 거야. 시녀 없이 산 게 몇 년인데.”

당연하게도 황제의 미움을 받는 황녀의 시중을 들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다.

억지로 명령에 따라 내 시중을 들게 된 이는 그저 딱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만 제 일을 했고, 그들의 눈치를 보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뭐든 스스로 하는 습관을 길렀다.

그것을 알고 있는 리건은 답지 않게 입매를 살짝 굳히더니, 이내 다시 헤실거리며 말했다.

“그럼 아침 식사를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 * *

씻고 나오자 리건이 놓고 갔는지 아침과 드레스가 테이블 위에 각각 놓여 있었다.

일단 가볍게 아침을 먹은 뒤 옷을 갈아입은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멜리어스비에트(마리오네트).]

내가 황녀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에스트리아는 여전히 귀족들 앞에서 건재할 필요가 있었고, 심지어 평소와 다름없이 멀쩡하게 걸어 다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인형술.

내가 자주 쓰는 공격이나 방어형 마법과는 결이 다르나, 섬세하게 마력을 다루면 그리 어렵지 않은 마법이었다.

곧 마법진과 함께 천천히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 새하얀 얼굴.

익숙한 모습이 눈앞에 드러나는 것을 보던 나는 시선을 깔고 입을 뗐다.

“너는 이제부터 ‘황제 에스트리아’다. 나처럼 말하고, 나처럼 행동해. 대신, 생각은 하지 마라.”

인형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곤란해진다. 이 세상에 같은 영혼은 두 개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형이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인형이 곧 나를 대신해 에스트리아가 된다.

물론, 나는 죽고.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을 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형’이 눈을 떴다. 나와 똑같은 얼굴, 그럼에도 영혼이 깃들지 않은 내 인형.

그녀의 눈빛에서 흐르는 싸늘한 냉기에 흡족한 얼굴을 하는데, 그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형술이라. 재밌군.”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나는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움찔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레르하겐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창턱에 앉아 있었다.

“오셨군요.”

“네가 오늘 오라고 하지 않았나.”

“어젯밤에 하도 제멋대로 사라지기에 안 오실 줄 알았죠.”

물론 우리의 거래 조건 중 하나에는 그가 내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있으므로 그는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어젯밤의 일을 생각해 보니 황제로서의 나를 우습게 본 것 같아서 은근히 괘씸해져 비꼬아 보았을 뿐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것일까, 레르하겐이 고개를 돌렸다.

“심통 난 얼굴이군.”

“심통이라니!”

“아직도 좌표를 잘못 준 것 때문에 그러느냐?”

“그것도 있고, 심지어 제 말에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고 가셨잖아요.”

“아.”

레르하겐의 태도에 나는 혀를 찼다.

저 드래곤을 상대로 내가 열을 내는 것도 이제는 우습게 보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향해 물었다.

“말씀해 보세요, 일부러 그러셨죠?”

“글쎄.”

“하시스를 옆에 놓고 시종처럼 부리고 싶은데, 제가 허락하지 않아서 그런 거죠?

“…….”

비록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입을 다문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긍정의 답이 있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가 조금 두려웠는데, 이제는 그 두려움마저 분노와 황당함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정말이지 제멋대로시군요.”

“내가 원래 그렇다.”

“그건 자랑이 아니고요.”

“하지만 그 덕에 네가 이득을 본 건 사실이지. 진실을 보는 눈, 잘 써먹으면 약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제 방에 이상한 사람을 들여놓아 제 정체를 폭로한 건 엄연히 소환 조건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그래서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잖느냐. 귀찮게 잔소리 그만해.”

“싫어요. 그리고 부탁은 부탁이고 잘못한 건 잘못한 거죠.”

누가 들어도 내 말은 억지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말하는데, 왠지 모르게 그 순간 레르하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어?’

혹시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리건이 방에 들어왔다.

“폐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리건은 방 안에 있는 나와 내 앞의 ‘인형’, 그리고 창턱에 있는 레르하겐을 보고 멈칫했다.

그러나 내 보좌관답게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원로원이 소집되었습니다.”

“좋아. 레르하겐 님, 가 보죠.”

“나도 가야 하는 건가.”

“물론이에요. 애초에 그러라고 온 거니까요.”

곧 내 지시와 함께 ‘인형’이 일어났다. 그 뒤를 따르며 방을 나간 나는, 닫히는 문틈으로 보이는 내 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탕.

문이 닫혔다.

* * *

자랑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원로원의 고통을 낙으로 삼아 왔던 나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폐, 폐하, 이게 대체.”

‘인형’의 뒤를 따라 알현실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경악한 표정을 짓던 그들은, 제집인 양 느긋한 레르하겐의 등장에 거의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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