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6화
“……무슨?”
“네가 시종은 안 된다고 했잖나.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직접 움직이는 건 귀찮고, 그래서 방이 따뜻한지만 잠깐 확인하고 오라고 했다.”
“……그런데요?”
“좌표를 잘못 줬지.”
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국에서 제일가는 성격 파탄자로 유명한 나를 어이없게 만들기도 힘들 것 같은데 그걸 이 드래곤이 해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떡 벌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을 짚어 주어야 하지?
어딘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지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황당함에 가득 찬 얼굴로 레르하겐을 향해 물었다.
“좌표를 잘못 주다니, 지금 황제의 방에 아무나 들이려고 한 건 아시나요?”
“저 녀석을 방에 들인 건 너 같은데. 이 방, 방어 마법이 처져 있어서 아무나 못 들어오지 않느냐.”
“손수 포박하려고 했던 거였어요. 원래 저는 이 방에 들어온 모든 이를 직접 심문하니까.”
“그런 것치고는 익숙하게 대응을 못 하던데.”
“다시 말하지만, 아이의 몸이 익숙지 않아 그런 거예요. 그리고 설사 레르하겐 님이 오지 않으셨다고 해도 제가 이겨요.”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이 몸으로 마법 무기를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던 나는 순간 자객이 읊조리던 것이 생각나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잠깐, 그럼 제 정체는 레르하겐 님이 알려 주신 건가요?”
내 물음에 레르하겐이 읊조렸다.
“그럴 리가.”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게 아니면 일개 시종 따위가 어떻게 내 정체를 알죠?”
“저 녀석이 네 정체를 알 리가 없어. 난 말하지 않았으니.”
“아니-.”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방금까지 벽에 반쯤 박혀 있던 자객, 아니, 소년이 눈을 떴다.
나와 레르하겐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돌아갔다.
곧 정신을 차린 듯한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투두둑.
나는 그의 몸 뒤로 떨어지는 벽의 파편을 보고 레르하겐이 정말 그를 인정사정없이 메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으, 머리야.”
나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길로 소년과 레르하겐을 번갈아 보았다.
바로 그때, 소년이 살짝 고개를 들더니 레르하겐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스승님!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스승님? 시종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 의문 섞인 눈길에 레르하겐이 무심하게 읊조렸다.
“제자나 시종이나.”
“덩…… 정말 다른 개념이거든요.”
“내 말이, 아니, 그전에, 대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소년은 아직도 몸이 얼얼한지 잇새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에게 하기에는 꽤 무례한 말투였으나, 그것은 그가 레르하겐과 꽤 친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레르하겐은 여전히 그 무심한 얼굴로 읊조렸다.
“어린애를 상대로 검까지 빼 들기에 나와 본 거다, 하시스.”
“그거야.”
통증이 좀 가셨는지 아까보다 훨씬 평온해진 얼굴을 한 소년, 하시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 순간, 그가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린 채 크게 말했다.
“어린애가 아니잖습니까.”
역시.
나는 고개를 들어 레르하겐에게 어디 한번 해명을 해 보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레르하겐은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르하겐이 깨달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진실을 보는 눈이 있었지.”
“진…… 실을 보는 눈, 그거라면, 설마 배신자의 후예들이 가진!”
순간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배신자의 후예라는 것은 다름 아닌 금기에 손을 댄 대가로 천벌을 받은 알레어 왕의 후손을 일컬었다.
그리고 그 천벌의 내용이, 바로 진실을 보는 눈이었다.
세상 모든 본질을 꿰뚫는 힘. 설령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든 추악한 것이든.
또한 모든 종족에게 배척당해 지금은 거의 사라진 핏줄.
“지금 배신자의 핏줄을 제자로 삼으신 것도 모자라 제 방에 들이신 건가요?”
“후자는 내 실수다만, 전자 또한 문제인가?”
“당연히-.”
큰 문제죠!
말을 내뱉으려던 나는 레르하겐의 여유로운 표정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결국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뭐, 백번 양보해서 누구를 제자로 들이느냐는 레르하겐 님의 선택이니 그렇다 쳐요.”
“그렇다 친다, 라.”
“하지만 제 정체를 알고 있잖아요.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란 말이죠.”
저 하시스라는 소년이 어떻게 내가 진짜 아이가 아니라는 알아차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내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사실이었다.
시한폭탄 같은 녀석을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다.
최소한 내 옆에 묶어 둬 감시해야 했다. 아니, 감시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어른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를 ‘제약’할 만한 뭔가가 있어야 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현재 내 신분은 황녀, 레르하겐은 내 아버지, 그러면 저자는 누구라고 둘러대는 것이 내 옆에 두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핑계가 될까?
귀족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고 동시에 이 황궁에서 조금만 허튼짓을 해도 눈에 띌 만한 ‘신분’.
그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 이상한 눈길로 나를 보던 하시스가 내 눈빛에 움찔했다.
“왜, 왜 그렇게 봐? 당장 고개 돌리지 못해?”
하시스가 은근히 기겁한 듯이 손을 저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냉랭하게 그에게 물었다.
“너, 몇 살이지?”
“그건 왜 물어?”
“뭐, 상관없어. 어차피 남들이 보기에 내 오빠 같으면 되니까.”
“오빠?”
하시스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쩍 벌리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이 크게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지금부터 너는 레르하겐 님의 아들이자 내 이복 오빠다.”
“헛소리를. 내가 왜 네 오빠가 되어야 하는데?”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죽일 수밖에 없어. 나는 내 정체를 아는 자를 밖에 풀어 둘 생각이 없거든.”
심지어 배신자의 후예라. 그렇게 위험한 존재를 내가 어떻게 방치하겠는가.
그나마 레르하겐의 제자라서 살려 두는 것뿐이었다. 드래곤 로드의 제자는 아무리 나라도 함부로 처리하기가 힘드니.
하시스는 내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하, 죽인다니. 스승님이 그렇게 내버려 둘-.”
“…….”
“……둘 것 같긴 한데.”
말을 잇던 그는 레르하겐을 힐끔 보더니, 그가 제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그런 그를 냉정하게 응시했다.
의외로 레르하겐은 내 말에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레르하겐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하시스는 머리를 부여잡고 홀로 고뇌를 하다가,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젠장, 얌전하게 심부름만 한 내가 잘못이지.”
“운명이거니 하고 받아들여.”
“꼭 오빠여야 하나? 제자라고 해도 되지 않나?”
“안 돼.”
“왜!”
“네가 레르하겐 님의 아들이어야 귀족들이 진짜로 겁을 먹고 네 뒤를 캐거나 이용할 생각을 하지 못하거든.”
나는 레르하겐을 힐끔 보았다.
“레르하겐 님도 괜찮죠? 함부로 제 방에 이런 자를 들였으니, 갑자기 생긴 아들 정도는 받아들이세요.”
“마음대로 해라.”
하시스의 얼굴에 더욱더 먹구름이 끼었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아.”
“영리하네.”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네 오빠라고 귀찮게 굴지 마.”
“뭐, 노력은 해 볼게.”
노력은 무슨. 그가 내 오빠인 이상 그의 평온한 생활은 물 건너갔다.
“그럼 이제 간단하게 언약을 맺지.”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강제적인 약속이다.
상대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언약. 만약 이 언약을 어기면 나는 언약을 건 자로서 하시스를 ‘심판’할 수가 있다.
물론, 이미 비밀을 발설한 상황에서 심판 따위 해 봤자 소용이 없기에 웬만해서는 안 쓰는 마법이었지만 저 녀석을 구속하기에는 적당했다.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곧 새하얀 빛과 함께 강한 바람이 우리를 감쌌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모든 것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끝이야.”
그러나 내 득의양양한 목소리와 달리 하시스는 마치 마녀에게 영혼이 팔린 이처럼 절망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힐끔 보고, 나는 이번에는 레르하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주제에 그는 그야말로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드래곤 로드에게 인간이 우스운 존재라고 해도 그렇지. 어쩐지 그가 괜히 괘씸했다.
“하시스의 일은 수습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레르하겐 님을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에요.”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지?”
레르하겐은 뭘 원하느냐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그의 미간에 묻어 있는 짙은 귀찮음에 내가 눈썹을 까닥였다.
사실 딱히 레르하겐에게 뭔가를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약점을 잡았는데 그냥 넘어가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읊조렸다.
“이제 제 부탁 하나를 들어줘요. 그게 무엇이든지.”
“틈만 있으면 써먹으려고 하는군.”
“제가 원래 그런 성정이에요.”
“뭐,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오늘은 피곤하니 이만 가겠다.”
말을 마친 레르하겐은 바로 마법을 발현했다. 나는 그를 굳이 잡지 않은 채 시큰둥하게 읊조렸다.
“태평하시군요. 애초에 좌표만 잘못 주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요. 시종을 보내 방이 따뜻한지 알아보는 것도 어이없는데 심지어 그런 실수-.”
말을 내뱉던 나는, 피뜩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가설에 얼굴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설마 일부러.”
“글쎄.”
레르하겐은 애매한 한 마디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언제 전투가 있었느냐는 듯이 방 안이 깔끔하게 원상 복귀되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혹시 일부러 좌표를 잘못 줘서 하시스를 내 방으로 데려온 건가?’
내가 시종을 데려오지 못하게 해서? 이런 식으로 내가 그를 옆에 묶어 두게 하려고?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사실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