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5화
“일단 어젯밤 황궁에 출입한 이들을 조사했는데 수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럴 둘…… 줄 알았어. 누군가가 침입해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애초에 내가 먼저 알아차렸겠지.”
그럼 뭐지.
왠지 모르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느새 하루가 거의 저무는 시간이 되어서 그런가, 하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녔더니 피곤해졌다. 물론 온종일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지.
아, 그러고 보니.
“나도 가짜 아버지를 누구로 할지 정했어. 적당한 방 하나 따뜻하게 해 둬. 따뜻해야 온대.”
“벌써요? 누굽니까, 그 비운의-.”
“데…… 레르하겐.”
내 말이 끝나자마자 리건이 굳었다. 심지어 그는 입을 쩍 벌리기까지 했는데, 아무리 그가 잘생겼다고 해도 그 모습이 그리 우아하게 보이지는 않아 말했다.
“입 닫아.”
“헙.”
“그렇게 세상 구경 못 한 표정 짓지 마. 창피하니까.”
레르하겐이 등장했을 때 제일 놀랐던 주제에 나는 아주 태연하게 리건을 타박하고 있었다.
리건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듯이 눈만 깜박거렸다.
“대체 어떻게?”
“조건을 주입시켜 소환진을 보냈는데 그자가 소환에 응했어. 그 이상은 묻지 마, 다쳐.”
“그냥 설명하기 싫으신 거죠?”
“알면서.”
리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선을 넘지 않는 그 적당함이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어쨌든 아버지도 정했고, 내일 오전에 원로원에게 내 존재를 발표할 거야. 소집령을 내려.”
“알겠습니다.”
“굉장히 당황해할 거 같네. 재밌겠어.”
리건은 내 얼굴에 걸린 미소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일을 해치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곧 리건이 할 일이 남았다며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내 방을 쭉 훑었다.
이 방, 아니, 이 궁은 내가 황제가 된 뒤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 지은 것이다.
그들은 선황 폐하께서 쓰던 궁을 어찌 내치느냐고 했지만, 내 강경한 결정 앞에서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궁에 꽤 애착이 갔다. 이곳은 그 어떤 이의 자취도 없는 오롯한 내 영역이므로.
‘하지만 상관없지, 다시 돌아올 거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 뒤 침대로 올라갔다. 내일이면 완전히 신분이 바뀐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미묘했다.
게다가 가짜 아버지라-.
‘내일부터는 그 드래곤도 여기에서 머물러야 할 텐데.’
다른 이들의 이목도 있으니.
나는 고민하다가, 허공을 검지로 톡 쳤다. 그 순간 작고 하얀 빛이 나타났다. 원하는 이에게 말을 전할 수 있는 통신 마법이었다.
“내일 제 신분이 공표될 거예요. 그러니 내일부터는 얌전하게 제 궁에서 기거하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물론, 로드님의 말씀대로 방도 따뜻하게 해 드릴게요.”
곧 하얀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래.”
꽤 빠르고 흔쾌히 돌아온 답변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잖아?
왠지 모르게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누웠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천진난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 * *
고요한 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온한 휴식에 드는 시간.
마치 먹물을 쏟은 듯 새카만 밤하늘 아래, 환한 달빛을 맞으며 한 소년이 가볍게 나무에 내려앉았다.
소년의 나이는 대략 십 대 후반.
마치 와인으로 물들인 듯 짙은 적색 머리카락과 루비 같은 적안을 가진 그는 무엇을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체 어디라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년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원하는 것을 찾아낸 듯 가장 가까운 창문 안쪽에서 반짝거리는 뭔가를 발견한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가 사뿐히 창가에 내려앉았다.
“여기군. 왜 이렇게 어두침침해?”
소년이 의문스럽게 중얼거렸다. 뭔가 생각하던 그가 대담하게 손가락으로 창문을 톡톡 쳤다.
철컥.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단단히 잠겨 있던 창문이 순식간에 열렸다.
소년은 창문을 살짝 밀고, 안쪽으로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했다.
그때였다.
촤르르륵-!
갑자기 들려온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에 소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무심한 표정을 지었던 소년이 순식간에 허리춤에 채워진 검에 손을 댔다.
스릉-.
곧 눈부신 검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쇠사슬을 쳐 낸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
그러나 소년의 말이 끝나기도 전,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수십 개의 검날이 그를 노리듯 허공에 떠 떠올랐다.
소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살짝 흘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그를 난도질할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실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야 함부로 부릴 수 없는 솜씨였다.
소년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반대편을 보았다. 그곳에서 아른거리는 검은 인영을 발견한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정작 희미한 달빛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인영의 얼굴에 소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팔랑팔랑한 프릴이 달린 잠옷에 풍성한 분홍빛 금발을 가진, 그야말로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외모의 아이였다.
“누가 보냈지?”
완전히 드러난 아이의 면모를 살펴보던 소년이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요즘은 아이로 위장하고 다니는 게 유행인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 에스트리아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 * *
아무리 내가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해도 감까지 퇴화하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자객의 침입을 받았던 나는 깊게 잠드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현재는 아이가 되어 더 위험한 상태이니 더욱더 날이 선 것은 당연지사.
애초에 침입자가 접근한 순간부터 나는 자객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그를 포박하고자 일부러 내 방으로 들였다.
그러나 허술한 움직임과 달리 꽤 실력자였는지 자객은 내 마력 구속을 단번에 쳐 냈다.
그렇다고 해도 마력으로 만들어진 칼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지만.
나는 바닥에 앉아 경악한 얼굴의 자객을 응시했다.
복면을 쓰지 않아 훤히 보이는 얼굴은 누가 봐도 상당히 잘생겼다.
아니, 어디 잘생겼다 뿐인가. 아마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보았다면 하나같이 넋을 잃을 만큼 정교한 얼굴을 가진 소년이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얼굴을 가진 사람을 자객으로 보냈다고?’
약간의 의문이 생겼지만, 나는 방금 내 마력을 튕겨 낸 그의 실력을 상기하며 그저 그가 실력이 좋아서 내게 보내졌겠거니, 생각하며 입을 뗐다.
“누가 보냈지?”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상당히 싸늘하고 냉기가 흘러넘쳤다.
그러나 자객은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그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읊조렸다.
“요즘은 아이로 위장하고 다니는 게 유행인가?”
그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내 정체를 알고 있어?’
그저 황제 에스트리아를 노리고 온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아니면 우연히 내 정체를 알아본 건가?
리건조차도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는데 오늘 처음 보는 녀석에게 정체를 들키다니.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녀석을 놓아줄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손안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곧 성인 대여섯 명 정도는 묶을 수 있는 길쭉한 채찍이 손에 잡혔다.
자객은 내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더욱더 서늘하게 읊조렸다.
“얌전하게 있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어.”
그리고 채찍을 높게 들었다.
분명 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는 것임에도 은근히 힘이 들었다.
철썩-!
그러나 내가 채찍을 내리칠 때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얌전히 있던 자객이 갑자기 머리를 들더니 손을 뻗어 내 채찍을 덥석 손으로 잡았다.
“윽!”
그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힘에 속절없이 앞으로 끌려갔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자객이 검을 들었다.
‘아이라서 그런지 실체화된 무기는 컨트롤하기 힘들어.’
나는 빠르게 마력을 거둬 내고 뒤로 몸을 뺐다. 이 정도 공격에 당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손에 마력을 집중시킨 뒤 그의 검을 그대로 잡아 비틀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헉!”
갑자기 비명과 함께 쿵- 하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힘이 뒤로 넘어가려는 나를 잡아 부드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나를 지탱해 준 힘은 꽤 익숙한 것이다. 바로 내가 레르하겐을 소환할 때 나를 잡아 준 그 힘.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레르하겐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검을 겨눈 자객이 벽에 부딪혀 쓰러져 있었다.
“데드…….”
아, 진짜 이름 발음하기 더럽게 어렵네. 혀가 꼬이는 탓에 나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
“로드님?”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내일 오라고 했는데 일부러 일찍 온 건가? 그런데 왜 내 방에?
순간 여러 가지 의문이 내 머릿속을 메웠다. 그러나 나는 레르하겐에게 물음을 쏟아 내는 대신 일단 자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레르하겐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힘으로 이길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얌전하게 마법만 써라.”
“아직 아이의 몸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것보다 저 자객을 빨리 포박해야 해요. 제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빠르게 마력으로 사슬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던 레르하겐이 무심하게 읊조렸다.
“그럴 필요 없다.”
“그럴 필요 있어요.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야 해요. 아니, 최소한 어떻게 내 정체를 아는지 정도는 캐내야죠.”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녀석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레르하겐의 말에 나는 하던 것을 멈추고 말았다.
“배후는 나다. 그리고 저 녀석의 정체는 내 시종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