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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4화 (4/146)

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4화

안 그래도 어마어마한 체격인데, 어린아이의 시야에서 보니 그 위협이 배가되었다.

내가 움찔하자, 그것을 발견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귀찮은 것인지 레르하겐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대꾸했다.

“난 농담하지 않아.”

“그럼 대체.”

“농담하면, 힘이 들거든.”

“…….”

“그러니 가급적 쓸데없는 말은 시키지 마라, 귀찮아.”

저렇게 귀찮은데 왜 사는지 모르겠다. 설마 죽는 게 귀찮아서 사는 건 아니겠지.

이제 내 마음속을 채우고 있는 건 경악이나 경계가 아니었다.

일단 소환진을 통해 그가 왔다.

그렇다는 건 어느 정도 내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받아들이지? 그냥 심심해서 받아들였나?

아니 설마, 저 드래곤의 사전에는 심심하다의 정의 따위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왜 왔는지 모르는 눈치군.”

그의 말에 정곡을 찔린 내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그를 소환했으면서, 무례하게 굴고 있는 것은 나 같았다.

레르하겐은 고개를 옆으로 까닥하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를 소환한 건 너다.”

“응한 건 로드겠죠.”

“그러니까, 네가 나를 안 반길 이유가 없을 거 같은데.”

그래,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너무 어마어마한 존재라서 예상치도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레르하겐이 내 가짜 아버지가 되어 준다면, 일단 아이인 동안 내 안전과 평온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감히 드래곤 로드의 아이를 건드리겠는가.

게다가 그는 내가 자리를 비울 때 황제 에스트리아의 인형을 만들어 귀족들을 속여 넘길 수도 있었다.

심지어 내 존재에 대해서도 귀족들 모두 반발을 못 할 것이다.

감히 드래곤 로드와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있나? 그가 분노한다면, 이 제국이 폐허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물론 마지막 사항은 내가 용납하지 않겠지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로드를 소환한 것도 나고, 그런 내 소환에 응한 것이 로드이니 긴말 필요 없겠죠.”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아무렴 지금 내게 더 좋은 선택지가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하도 키가 작아서 목이 아팠지만.

“이제 원하는 것을 말해 바요.”

소환에 응했다면 내가 내건 대가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르하겐은 그저 ‘흐음-’ 하는 알 수 없는 추임새만 뱉을 뿐 대답이 없었다.

그에 의아해진 내가 다시 물었다.

“혹시, 다른 걸 원하시는 건가요?”

“글쎄.”

“다른 걸 원하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들어 드릴 수 있어요. 뭐, 사람을 바치라는 변태적인 요구만 아니라면.”

“그런 성가신 요구를 왜 하지?”

이 드래곤은 귀찮아서 나쁜 일도 안 할 자다. 악당이 되는 것도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그러나 레르하겐은 의외로 복잡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대가를 안 받으면 안 되는 건가?”

“설마 대가를 받기도 귀찮으신 건 아니죠?”

“그건 아니다마는, 딱히 갖고 싶은 게 없는데. 돌아갈 때 그걸 이고 레어로 돌아가는 것도 귀찮거든.”

“그게 귀찮아서 안 받는 거죠. 그러실 거면 왜 제 소환에 응했어요?”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소환에 응하는 이유는 당연히 상대의 제안이 마음에 들어서다. 그런데 레르하겐은 보답도 필요 없다지 않은가.

하나 레르하겐은 무척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

“그냥 네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왔는데, 그러면 안 되나?”

“안 대는데요.”

“왜?”

“그건 거짓말이니까요. 이 세상에 대가 없이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어디 써요?”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어서 진짜 목적을 말하세요.”

레르하겐은 한참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나는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진심이었다. 이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원래 인간, 아니, 모든 인격체는 약육강식을 숭상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약하면 잡아먹히는 게 당연하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 형제자매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얻은 교훈이었다.

약한 존재는 밟힌다. 그러므로 나는 강해져야 했다.

더군다나 나처럼 갑자기 약해진 존재는 더더욱 위험하다.

레르하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파란 눈동자로 나를 그저 빤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 안 컸군.”

“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레르하겐은 되레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나도 안 자랐다고. 인간에겐 제법 긴 세월이 지났고 그새 황제가 되었다기에 뭔가 좀 달라졌나 했더니 아직도 그때에 머물러 있군.”

“그때라니.”

“네 오라비 언니 사이에서 겁에 질린 채 나를 보던 때 말이야.”

겁에 질리다니. 울컥 화가 났다. 그때의 수치스러운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에 내가 무슨 헛소리냐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레르하겐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네가 굳이 대가를 주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아르시스 제국 서쪽 칸타 산맥을 넘겨라.”

“……대가 없이 왔다고 하던 것치고 너무 과한 걸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럼, 내가 과연 네 그 조그만 던전 금고를 탐낼까?”

쪼끄맣다니.

나는 자존심이 팍 상해 입을 꾹 물었다. 하나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칸타 산맥이라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곳은 인간이 아예 없는 곳이니까.

“좋아요. 그게 전부인가요?”

“그리고 내 시종을 한 명 데려올 예정이다.”

“그건…….”

나는 조금 말을 골랐다.

“무리예요. 만약 시중을 들 이가 필요하시다면, 황궁에 있는 이들 중 한 명으로 보내 드릴게요.”

애초에 내가 소환한 것은 ‘아버지 하나’뿐이었다. 그 외의 사람을 들인다는 것은 소환 조건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가급적 처음 보는 사람을 곁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내 말의 뜻을 알아챘을까, 레르하겐은 의외로 더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럼 없다.”

“좋아요. 그럼 제 소환은 이렇게 마무리 짓겠어요. 이제부터 당신은 내 가짜 아버지예요.”

그렇게 말하며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새하얀 빛이 손끝에서 반짝거리다가 사라졌다. 소환 의식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원하는 것을 빨리 말해 준 덕분에 우리의 거래는 무사히 진행되었다. 안 그랬으면 나는 끝까지 그를 의심했을 테니.

모험이었지만 소환을 한 보람이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황궁에 앞으로 지내실 거처를 마련해 드릴게요.”

“상관은 없다만 황궁은 너무 춥다. 추우면 보온을 위해 에너지를 쓰지. 에너지를 쓰면 힘들다. 그러니 방의 온도를 높인 후 나를 다시 불러.”

그의 극단적인 무기력함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나 레르하겐은 당연한 소리를 한 듯 손을 휘릭 저었다. 그 순간, 따뜻한 바람과 함께 그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나는 이마를 짚었다.

‘나, 잘한 거 맞을까? 혹시 드래곤 로드라는 이름에 홀라당 넘어가서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한 건 아니겠지.’

왠지 모르게 레르하겐은 내가 감당할 만한 존재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소환 의식이 완성된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 * *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리건과 함께 들어온 어린 소녀를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내 시녀가 될 이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샛노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그녀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셀라입니다, 전하. 델멘 경께서 전하의 사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수련을 위해 궁 밖에서 머물러 계셨다고요.”

……수련?

대체 뭘 어떻게 설명한 거지.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옆에 있는 리건을 응시했다.

리건은 내 눈빛에 담긴 의문을 읽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면서 셀라를 향해 말했다.

“전하께서는 아직 황궁의 예의에 익숙지 않으시니, 성심성의껏 보호해 드려야 할 겁니다.”

보호는 무슨, 그냥 기본이나 하면 그만이다. 내가 언제 시녀들과 그리 친했다고.

그러나 셀라는 리건의 말에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황녀 전하를 보좌하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이 우습기만 했다. 내가 황녀가 아니라면 당장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면서.

물론 그건 그들로서는 당연한 거다. 누가 고용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나, 이득이 있어서 붙어 있는 거지.

“셀라 님, 이제 황녀 전하의 방을 정리해 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이곳은 폐하의 침소이신지라.”

“아,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셀라는 동글동글한 눈을 빛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참 부담스러운 유형이군. 하필 사람을 찾아와도.’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셀라는 리건의 말을 듣자마자 바람같이 방에서 사라졌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입을 열었다.

“쫌 정상적인 걸 찾아오지.”

“황궁의 시녀 중에 유일하게 귀족의 입김이 닿지 않은 시녀입니다.”

“아주 잘했어.”

그렇다면 말이 달라진다. 대체로 황궁의 하녀들은 물론이요, 시녀들도 거의 다 귀족 출신이거나 귀족들이 보내온 이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완전히 귀족들의 입김이 닿지 않는 사람이라니.

“평민인데 어떻게 황궁의 시녀로 들어온 거지?”

“제5궁 파티시에의 제자로 황궁에 들어왔습니다. 다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황궁에서 나가야 했는데, 평소에 그녀를 눈여겨보던 제5궁의 시녀장인 아스틸 부인의 추천으로 궁에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흐음. 가족이라.”

“깐깐한 아스틸 부인이 추천한 것만큼 뒷배경도 깨끗하고, 저 또한 추가로 조사를 마쳤습니다. 수도의 아미네 블록에 집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여의고 동생과-.”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야. 내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대.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는 구구절절한 사연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에 리건이 복잡한 눈빛을 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조사하라고 한 건 조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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