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인데 황녀가 되었다 3화
이 마법은 소환 마법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다. 단순히 필요한 이를 소환하는 것 외에 많은 조건을 주입해야 했고, 심지어 응하지 않는 자에겐 마법진을 통해 기억 삭제 마법까지 걸어야 했으니.
실패하면 내가 역으로 마법진에 삼켜져 죽을 수도 있으나.
‘그 정도야 뭐.’
대다수가 갖고 태어나는 마력을 한 톨도 갖지 못하고 태어난 나는 황제가 된 뒤 마력을 얻기 위해 별짓을 다 해 보았다.
혈혈단신으로 검을 들고 에르힐 산맥의 던전에 쳐들어가 죽을 위기에도 처했었으나 결국에는 살았다.
그 외에도 힘을 위해 내가 저지른 일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내 이름 앞에 붙는 폭군이라는 호칭에는 힘을 갈구하는 광기에 가까운 나의 집착을 두려워하는 귀족들의 공포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그들의 눈에 나는 언제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손에 넣고, 대항하는 자는 태연하게 밟아 버리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원래 일은 해결하라고 있는 거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귀족들에게 암살당하나, 뭔가 내 손으로 해 보다가 잘못되어 죽으나 결과는 똑같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소환 상대 앞에서까지 어눌하게 보일 수는 없다. 게다가 마법 시동어는 마법 발현의 관건이라 정확하게 외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입에 힘을 준 뒤, 조금 느릿하게, 하지만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주문을 외웠다.
[라 메이딘스(생성).]
눈 깜짝할 사이에 새하얀 빛과 함께 허공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술식으로 얼기설기 섞인 마법진은 누가 봐도 한없이 복잡했다.
마법의 핵심은 마법진의 구현. 마법진이 올바르게 구현되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빠르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리에스티스(소환).]
화아아앗-!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마법진에서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부신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강풍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조건을 하도 많이 걸어서일까,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나는 조금 긴장한 얼굴을 하며 빛만 뿜어낼 뿐 묵묵부답인 소환진을 응시했다.
설마 한 명도 응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면 진짜로 리건을 아버지라고 속여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던 소환진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마치 구멍이라도 뚫린 듯, 마법진 한 곳이 일그러지더니 마력이 마구잡이로 흡수당하기 시작했다.
‘내 마력을 누가 흡수하고 있어?’
그 순간 나는 조금 긴장했다.
아무리 이종족이라고 해도 내 마력을 이렇게 쉽게 컨트롤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데다가 심지어 지금 상황을 보건대-.
‘소환에 응한 건가?’
누구지?
누가 내 소환에 응한 것일까.
예상과 달리 흘러가는 상황에 나는 여차하면 바로 상대를 죽여 버릴 기세로 공격 태세를 취했다.
아니, 취하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확 밀려오는 바람에 비틀거리지만 않았다면.
“앗!”
나는 빠르게 몸을 돌려 바닥을 짚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따뜻한 바람이 나를 감싸며 부드럽게 부축해 주었다.
“역시, 아이는 성가시군.”
내가 몸을 바로 하는데,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히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창가에서 흐릿한 인영이 점점 윤곽을 갖추더니,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창가에 몸을 기대고 한쪽 다리는 창턱에, 다른 한쪽 다리는 바닥을 짚고 있었다.
게다가 소환 마법의 여파가 남아 있는지, 은발이 살짝 흔들리고 있어 묘한 느낌을 냈다.
조각 같은 얼굴 위 짙은 속눈썹 아래 자리한 옅은 벽안, 우뚝한 콧날과 굳게 다물어진 입술.
조각상처럼 날카로운 얼굴에 긴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는 그의 널찍한 어깨와 커다란 키를 온전히 가려 주지 못했다.
나는 멍하니 사내를 응시했다.
나는 저자를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에슈, 아니, 에스트리아. 못 본 사이에 많이…….”
“……?”
“……작아졌군.”
묵직한 목소리와 나른한 어조.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듯한 싸늘한 표정.
등장한 사내는 다름 아닌 레르하겐.
모든 종족의 위에 군림하는 드래곤들의 수장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 중 가장 강한 존재.
동시에-.
“그런데 역시, 오랜만에 나오니 숨 쉬는 것도 귀찮아.”
“…….”
“역시, 숨을 안 쉬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아야겠어.”
이 세상 모든 생명체 중 가장 이상한 존재이기도 했다.
나는 경악했다.
왜, 내 가짜 아버지를 소환했는데 드래곤 로드가 나오는 거지?
이건 내가 원했던 스케일이 아닌데?
* * *
사실 나와 레르하겐은 초면은 아니었다.
대부분 제 영지에서 콱 박혀 있는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그는 귀찮은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의외로 꽤 많은 인간들과 교류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열 살 무렵, 마법 천재라고 소문난 내 넷째 언니의 스승이 되어 주십사 아바마마가 그를 황궁에 초대할 때였다.
넷째 언니 아멜리는 비록 후궁의 딸이긴 하나 어렸을 때부터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어 모든 마법사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천재였다.
그녀는 종종 그것을 빌미로 나를 향해 불을 날려 내 머리카락을 태워 버리거나, 한겨울에 얼음덩이를 만들어 내게 퍼붓는 등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나는 기실 그녀가 레르하겐의 제자가 되는 것이 꽤 두려웠다.
그녀가 그의 제자가 된다면 필시 더 강해져서 나를 진득하게 괴롭힐 것이니.
그러나 정작 평소보다 더 완벽하게 마법진을 구현하는 그녀를 보던 레르하겐은 그 조각 같은 얼굴로 냉랭하게 읊조렸다.
- 이게 천재라고?
- ……네?
- 인류의 미래가 암담하군. 이런 게 천재라니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면서 단 한 번도 부정적인 말을 들어 본 적 없는 아멜리 언니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바마마와 시녀들이 급히 그녀를 달랬으나 무용지물이었다.
레르하겐은 엉엉 울고 있는 넷째 언니와 분노에 가득 차 있음에도 찍소리 하나 못 하는 내 아바마마를 무심한 눈으로 훑으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했다.
형제자매들 틈에 끼어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그것을 보던 나는 그가 아주 대단한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반전이 갑자기 일어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무심하게 주변을 훑던 레르하겐이 갑자기 내게 시선을 고정시켰던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평온하게 나를 응시하던 그가 말했다.
- 내 일곱 번째 제자는 너다.
당연하지만 그 순간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모든 이의 경멸을 받는 막내 황녀가 그 위대한 드래곤 로드의 제자가 되다니.
그러나 나는 레르하겐이 나를 지목했다는 사실에 기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멀리서 넷째 언니를 달래던 아바마마의 섬뜩한 눈길이 내게 꽂혔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 부모의 경멸과 멸시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결국, 나는 레르하겐을 향해 작게 도리머리를 지었다.
레르하겐은 그런 나를 조금 미묘한 얼굴로 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바마마를 힐끔 보던 그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 싫으면 말고.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사라졌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그가 실수나 변덕으로 나를 지목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화났거나.
감히 인간 여아 따위가 드래곤 로드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로 황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날 이후로 넷째 언니가 나를 직접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이들은 여전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몇 년 뒤 황제가 된 나는 레르하겐을 완전히 까먹었다. 아니, 까먹었다기보다는 그를 찾아갈 생각도, 불러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존재 위에 군림하는 드래곤 로드.
그런 그를 한 번 거절해 놓고 다시 찾아가는 것도 우습고, 무엇보다도 그때의 나는 더는 누군가의 도움 따위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제 다시는 접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레르하겐은 그야말로 대륙, 아니, 온 차원을 통틀어서 귀찮은 걸 가장 싫어한다고 소문이 난 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다니.
“어떻게 오셨죠?”
“소환진을 통해 왔다만.”
충격이 가시지 않은 내 목소리에 레르하겐이 무심하게 읊조렸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한지, 창턱에 늘어진 채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커다랗고 단단한 체격에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내가 거절한 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어서 이 기회에 복수하러 온 건 아니겠지?
몇천, 아니 몇만 년을 산 드래곤이 설마.
그렇게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를 살펴보는데, 그가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볼 필요 없어. 날 소환한 건 너 아닌가?”
“내가 소환한 건 내 아버지가 대어, 되어 줄 사람이었어요. 로드가 아니라.”
“그래, 그래서 왔다.”
“……그래서라니.”
“아버지를 찾는다기에, 아버지가 되어 주려고.”
지금 뭐라고 했지.
나는 이제 완전히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래, 물론 나는 조건에 부합되는 이종족과 거래를 할 예정이긴 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레르하겐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가 얼마나 귀찮은 걸 싫어하는지 나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 대륙, 아니, 이 차원 모든 이의 경배를 받는 존재 아닌가.
그런데 레르하겐은 마치 내 아버지가 되어 주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딘, 진심…… 이신가요?”
내 얼떨떨한 표정에 레르하겐은 결국 다섯 번째 하품을 마치고 천천히 창턱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