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 나는 인류를 믿는다(?)(2)
국민도 바보가 아니다.
무진의 행보가 성에 차지 않지만, 그 상징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세계에 나가 어깨 펴고 다닐 자부심이 된 지 오래였다. 한껏 세워진 어깨 뽕을 다시 빼려는 세력이 있다고 상정해 보자. 여당이고 야당이고 살아남지 못한다.
‘날로 먹는구나.’
이래서야 무진의 울타리에서 영영 벗어나지를 못한다. 맘 편해지자고 빠지는 순간, 그동안 받은 혜택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거 진짜로 대통령 되겠는데.
교장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누구보다 잘할 자신은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몽상에 빠져 계실 건가요?”
“응?”
“빨리 졸업장이나 주세요. 앞에 세워 놓고 제사 좀 그만 지내세요. 정말 향냄새 맡게 해 드려요?”
“……아, 미안하다.”
무진에겐 졸업장이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다. 주면 받고, 안 주면 말고였다. 반면 아카데미로선 무진에게 졸업장을 수여해야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광고 효과를 무시할 수 없었다.
“길게 하면 화낼 거지?”
“당연하죠.”
“수고했다. 자, 받거라.”
“감사합니다.”
졸업장 수여를 한 이후로는 신속히 진행되었다. 올림픽도 아니고, 입학식과 졸업식은 최대한 간결하게 해야 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길게 하면 곤란하겠지.’
***
3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아카데미의 수련 기간을 6년으로 세운 걸 보면 시간의 성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변화에 수긍하고, 나태해질 시간이 되기에도 충분하다.
다크로드는 돌아온다.
폭군의 전제였다. 그때를 대비해서 투명청룡오관과 무진탑을 건설했다. 성능은 확실하기에 부작용에 대한 의구심은 떨쳐 냈으나, 공포심을 조장해서 과도한 가격에 팔아먹었다는 의혹이 생겼다.
인간은 공포에 잠식되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화가 없으면 나태함에 젖어 든다. 일종의 무사안일주의였다.
다크로드가 진정으로 강림을 하느냐?
폭군의 말만 전적으로 믿기에는 3년은 길었다. 강림의 증거로 빈번한 던전 이상 침식, 브레이크가 일어나곤 있지만 잘 막아 냈다. 별안간 강해지고 늘어난 마물로 곤란했지만, 각성자의 역량이 높아지면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공포 조장 마케팅이란 의혹이 쌓이자, 세계 정상들은 움직였다. 폭군의 졸업식은 좋은 핑계가 아닐 수 없다.
폭군의 집.
세계 정상과 대표 각성자가 자리했다.
재임한 아너 대통령이 나섰다.
“진정 다크로드가 강림하는 것인가?”
“다들 배가 불렀네요.”
다크로드의 강림을 물었더니, 무진이 다른 소리를 하자 모두는 인상을 찌푸렸다. 폭군의 강함을 알지만, 국가원수를 대함에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단, 누구도 불편한 속내를 먼저 밝히진 않았다. 그러기엔 배후로 세워진 진(眞)무진탑을 향한 대표 각성자들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들도 안다. 이 안에 있는 무진탑이 진짜라는 걸. 본국에 세운 무진탑은 모조품에 가까웠다.
“한국의 속담대로면 우리에게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잘 아시네요.”
“자네의 노고를 모르진 않네. 우리가 3년 전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도 인정해. 그렇다고 해서 마냥 기다릴 순 없지 않은가?”
세계는 경계경보가 발휘된 상태였다. 언제까지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 수는 없었다.
“4월 15일 3시, 태평양 한가운데요.”
“응?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마냥 기다릴 수 없다면서요. 그때 열려요. 됐죠?”
3년 전 이후로 무진은 대외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폭군답게 돈만 밝힌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 세간에 알려진 진실과 다르게 무진은 차원, 시간, 공간의 흐름과 축을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다크니스의 본부를 봉인하면서 금제로 인한 차원 간의 변화를 살폈다. 던전이 오픈되는 빈도수, 침식, 브레이크에 영향을 줄 때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온 날짜다.
“다크로드가 강림하는 날이라고?”
“그래요.”
궁금증이 해소됐으니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무진이 던진 발언의 파급력이 엄청났다. 다크로드의 강림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려던 속내는 쏙 들어갔다.
“날짜를 대체 언제부터 안 건가?”
“어제요.”
본인이 어제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기는 한데. 의심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확인 자체가 불가능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다크로드가 자네의 우려만큼 대단한지는 정확히 모르지 않나?”
“그거야 그렇죠.”
맘대로 대응하라는 식의 무진의 태평함에 세계 정상들은 속이 타들어 갔다. 어느 정도의 피해를 불러올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나마 태평양이라서 다행이라고 하기엔 규모의 강환이 생생하다.
‘이놈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꼭 사고가 났는데.’
아너 대통령은 안다. 할인을 해 준다고 하고선, 미국의 자존심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참히 박살 냈다. 그때 엠페러한테 얼마나 시달렸던지. 무진이 대수롭지 않다고 해서, 자신들까지 똑같이 대응한다면 대형 사고를 유발할 수 있었다.
‘함정 카드를 언제까지 남발한 셈이더냐?’
듣기에 따라서는 상대를 존중하지만, 그 안에 실린 악의에 아너 대통령은 소름이 돋았다. 폭군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함정을 곳곳에 숨겨 놓았다. 당장은 좋다고 받다가는 심각한 물적 손해는 물론, 개망신을 각오해야 했다.
후우우.
숨을 크게 쉬어 흥분을 가라앉혔다. 가볍게 여기다간 감당하기 어려운 후폭풍을 맞아야 한다. 그럴 바엔 자존심을 숙이는 편이 이롭다.
정치인 이전에 사업가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너 대통령은 손익계산이 빨랐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게, 자네의 말을 충실히 따르겠네.”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긴 하네요. 좋습니다. 다크로드가 강림했을 때의 파장부터 알려 드리죠. 일단, 문을 열려고 노력만 하는데도 던전 침식과 브레이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데, 아예 부수고 들어온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요?”
“세계 곳곳에 동시다발적인 던전 사태가 발생하겠군.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한 달 남았습니다. 하지만 준비는 3년을 했지요.”
이만하면 무진은 할 만큼 했다. 다크로드와의 전투만 생각해도 부족하다. 자기 나라는 자기가 지켜야 했다. 무진은 폭군답지 않게 3년 동안 강해질 기회를 주었다.
‘대단하구나. 무력을 넘어선 심기와 혜안이다.’
각국의 정상들도 동조했다. 미국이 줏대가 없다고 하기엔 다가올 위협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공포 조장을 따질 시간이 없었다. 불과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3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최대한 날짜는 숨겨야 하겠군.”
“졸업식 끝나고 이미 발표했는데요.”
“……뭬야?”
“사극 좋아하시는구나.”
한류 드라마가 인기가 있으니.
각국의 정상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님을 직시했다.
저 미친놈이 또 뭔 짓을 할지 모른다. 그 전에 자국으로 돌아가서 다크로드를 대비하고, 국내를 안정시켜야 했다.
다다다다!
무진은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한 달 후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고 하면, 세계가 혼란의 소용돌이가 빠질 수 있었다. 통제되지 않은 혼란은 저들로선 곤란할 따름이다.
‘모르고 당하는 것보단 낫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차라리 모르고 당하는 편이 낫다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계층만 정보를 공유하고 자기들만 살려고 바둥거리는 꼴은 못 보겠다.
‘살면 다 같이 살고, 죽으면 다 같이 죽어야지.’
무진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아는 사람들만 데리고 차원을 넘어갈 계획을 세워 놓았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하면 어쩔 수 없잖아.
무진은 인류보존프로젝트를 발동했다.
***
예상대로 세계는 혼란스러웠다. 다음 달 다크로드가 돌아온다니, 제정신을 유지하긴 힘들었다. 각국 정부에선 다크로드가 강림해도 충분한 대비로 막아 낼 수 있다고 공표했지만, 혼란을 제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장 내일이 없다는 듯이 약탈, 방화, 살인, 강간 등 강력 범죄가 폭증했다. 공권력이 부족한 국가일수록 범죄에 취약했다. 각성자 체계가 잘 잡혀 있는 국가는 통제가 되는 편이었다.
그렇더라도 사건 사고가 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 혼란을 초래한 무진의 발표에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성급한 발표였어, 지금 밖에 나가기도 겁이 날 정도라고.
-우리나라도 치안이 예전만 못하긴 해도, 통제가 되지 않는 정도는 아냐.
-강력 범죄가 늘고 있는 건 어떻게 책임질 건데? 괜히 말을 해서 뒤가 없는 사람들이 날뛰고 있잖아.
-혼란스러운 건 알겠는데, 나는 모르고 있다가 당하는 것보단 낫다고 봐.
-역사를 보면 답이 나오지. 전쟁 나기 전에 자기들만 정보를 공유하고 빠져나간 적이 한두 번이야!
-어차피 그런 식의 정보란 극소수만 알고, 자기들끼리만 살려고 방비하잖아. 혼란이 가중된 건 안타깝지만, 폭군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봐.
-씨발, 개 같은 소리들 하고 있어. 당장 네 식구가 강도한테 죽었다고 생각해 봐. 그 앞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어!
-솔직히 답이 없는 발표였어.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할 거잖아.
이번에도 여론은 반반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통제를 위해서 밝히지 않았다면 나중에 왜 사실을 밝히지 않았냐고 질타할 게 뻔했다. 세상은 어차피 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책임을 져 주기를 바랄 뿐이다.
세간의 이목이 인류 최강 무진에게 집중되었다. 3년 동안 공포를 조장했다는 부정적 여론이 생기기 무섭게 다크로드의 재림을 특정했다.
사람들은 명확한 해명을 바랐다. 특정한 날에 오지 않았을 때의 책임과, 온다면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를.
여론의 성화.
무진은 오후 2시에 방송하겠다고 공지를 올렸었다.
공영이 아닌 개인 방송이라고 무시하기엔 15억의 구독자를 보유했다. 수익 창출을 노리지 않았음에도, 영상 1편만 올려도 평균 30억 회 이상이었다. 세계가 주시하니 광고 효과만 해도 수십 조 이상이란 통계가 나왔다.
공지한 시간에 방송을 틀었다.
무진의 방송 무대는 방이 아니라 식탁이었다. 방송 장비를 전부 혼자서 컨트롤했다. 사람을 쓰지 않아도, 허공섭물만 있으면 장소 불문 영상을 찍을 수 있었다. 드론 없이 공중 촬영 영상을 찍어 봤나? 안 찍어 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
아버지와 지수는 찬조 출연했다.
영상은 밥을 먹는 것으로 시작해, 30분간 말없이 식사만 하고 있었다.
골고루 먹고, 후식을 채울 때쯤.
“궁금한 점 있으면 물어봐라. 성의껏 답해 주마.”
댓글창을 열기가 무섭게 댓글이 폭주했다.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지만, 주 내용은 3가지 내외로 정리되었다.
-다크로드가 오는 날짜가 확실합니까? 아니라면 그 책임을 폭군께서 지실 겁니까?
“어떻게 책임을 질까?”
무진은 되물었다.
오지 않았을 때의 책임을 어떻게 지기를 바라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정치, 경제, 사회 혼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