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 똥인지 된장인지(1)
-폭군의 위엄을 봤느냐. 절대고수, 대마법사, 대정령사, 대테이머, 대환술사 등등. 이게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재능이냐?
-그중에 하나만 나 줘! 하나만!
-솔직히 다 풀지 않아서 그렇지, 숨겨 놓은 게 더 많을지도 몰라. 폭군이 왜 인류 최강인지 알 수 있었어.
-규모의 폭군, 별명 참 오지지 않냐? 역시 뭐든지 규모가 커야 보는 맛이 있는 것 같아.
-우리 아내도 나보고 규모 좀 있으란다.
-무슨, 규모보단 내실이지.
-이쯤 되면 세계의 모든 재능은 폭군이 다 먹어 치운 거 아니냐. 그렇지 않고서야 한 사람에게 몰빵은 너무 심하잖아. 다크로드를 대적하기 위한 천적처럼 말이야.
-옳소! 그만한 재능을 타고났다면 세상을 위해서 희생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봄.
-너희들 속셈을 모를 줄 알아. 내가 보기에 다들 동귀어진을 바라는 것 같단 말이야. 폭군이 이럴 것 같아서 하지 않는다고 한 거지. 희생은 개뿔, 토사구팽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세상이야.
-이 정도로 대단한 재능이면 훈련해서 더 강해지는 편이 낫지 않나. 그때까지 찌끄러기들을 던져 줘서 시간을 벌고 말이야. 효율성을 따지면 이쪽도 더 나은데.
-종말을 막기 위해서라도 세계는 희생해라, 우리 폭군이 막타를 칠 테니. 인류를 보존은 해야 할 거 아냐!
-따지고 보면 이게 맞지. 다크로드를 대적할 사람이 폭군밖에 없으면 힘이라도 빼 놔야 하는 거 아닌가.
무진이 보여 준 퍼포먼스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영상을 자르거나 편집할 수도 없었다. 생방송으로 송출되어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폭군을 의심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폭군에게 부정적이었던 여론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절대고수, 대정령사, 대마법사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자칫, 진짜로 빡 쳐서 아이피까지 추적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땐 누구도 지켜 주지 못한다.
결국, 폭군은 논외로 지정하고 내버려 두기로 합의를 봤다. 폭군의 대척점이 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걸 아카데미에서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기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말은 언제든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러자 폭군의 주변으로 눈이 갔다.
-권후가 절대경이던데.
-그 검 쓰는 미소녀도 절대의 경지에 도달했다더라고.
-그 한국인 미소녀도 최상급 정령을 다룬다고 했어.
-그 나이에 가능한 일이야?
-폭군의 동생인가, 초등학생 정도 되는 놈도 마도가 7계식인 것 같았어.
-폭군과 친분이 있는 동기와 선배도 다들 강해. 그 나이 때를 초월했다고.
-투명청룡오관과 무진탑의 효과가 분명해!
-전부 폭군에게 복속한 거 아냐? 인간의 존엄을 지켜야지!
-그러기엔 투명청룡오관과 무진탑의 성능이 너무 뛰어나.
-분명 부작용이 있을 거야.
지나치게 뛰어난 효과에 의혹과 불신이 있었지만, 한·중·일 무인들의 성취가 가파르게 오르는 게 눈에 보이고 있었다. 국내의 문제로 인해서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한·중·일은 발전을 거듭했다.
이러다간 도태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다크로드가 먼 미래의 문제라면, 폭군은 당면한 과제였다. 폭군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패권을 전부 내주어야 할 판이었다.
각국의 정부로선 골치 아픈 사안이 되었다. 다시 투명청룡오관을 설치하고, 폭군을 설득해서 무진탑도 세워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자발적 노예를 자처하는 꼴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했던 유럽과 미국 등등, 본인들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인식에 한국은 여전히 동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해도 기저에 깔린 인종차별과 우월주의가 있었다.
세상이 바뀌어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 다시 손을 내밀기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나, 자존심 때문에 국민 여론과 현실적인 문제를 등한시할 순 없다. 투명청룡오관을 설치한 한·중·일의 가파른 성장세가 무서웠다.
국제사회는 여전히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 말로는 자유와 평화를 중시하나, 국익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일례로 억울하면 강해져라, 이 말이 왜 나왔겠는가.
세계 각국은 국민적 요구와 국가 경쟁력을 더는 간과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 투명청룡오관과 무진탑의 설치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한데, 돌아오는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각국의 대표권자는 권왕가로 와서 상담받으세요. 전화 상담으론 정확한 금액을 확답할 수 없습니다.
국제 협상 테이블을 따로 만들어서 협의를 받으려고 했던 국가들로선 당황스러웠다. 한국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기엔 대응이 지나친 면이 있었다. 각국의 대표권자는 국가마다 단어가 다르겠지만, 원수를 의미했다.
국가원수더러 직접 방문하여 상담받으라니. 시간과 날짜도 정해지지 않았다. 상대국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절차에 대해 항의했더니.
-상담 순서는 선착순입니다. 할인 행사 기간이라, 늦을수록 가격이 상대적으로 올라갑니다.
은밀히 진행해도 욕먹을 판인데, 정상회담을 선착순으로 공표했다. 황망한 나머지 다른 제안도 꺼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국내외 여론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국가 간 협상을 선착순으로 정하다니, 폭군답다고 해야 하나!
-나 지금 미국, 캐나다, 유럽 대통령들이 줄줄이 뛰어가는 거 상상함.
-이런 푸대접을 받고 잘도 하겠다. 나 같으면 존심 때문에라도 안 한다.
-안 하기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쇼맨십도 보여 줘야지. 전에 일본 총리는 필드에서 슬랩스틱 개그도 하던데.
-그래도 이번엔 너무 나간 거 아닌가? 국가원수를 이리 대하면 국제적으로 왕따 당할 수도 있잖아.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지. 처음에 원가로 지어 준다고 했는데, 복속된다는 이슈가 생기면서 자기들이 먼저 거절했잖아. 이제는 격차가 벌어질 것 같으니 다시 지어 달라고 하면 나 같아도 빡 돌겠다.
-서운할 순 있어도, 국제 관계를 감정적으로 대하게 되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는 수가 있어. 미래는 아무도 모르잖아. 적당한 선에서 미움 사지 말고 원만하게 마무리하는 편이 나아.
투명청룡오관이 공개되었을 때만 해도 원가로 지어 준다고 했었다. 그 이후 자유가 제한받을 수 있다는 부작용이 알려지면서 협상을 파기하고, 초기로 돌려세웠다. 지금 와서 다시 지어 달라는 건 염치가 없는 행위였다.
그렇더라도 작금의 제안은 세계를 적으로 돌릴 수 있었다. 어려울 때 도움을 줘서 우방을 만들어야 할 때, 대립각을 세우는 행위는 무모했다. 지금이야 우리가 주도권을 잡지만, 시간 앞에 흥망성쇠는 아무도 장담 못 한다.
예상대로 세계 각국은 모여서 합의점을 찾았다. 무진이 자발적으로 나오도록 한국을 압박하는 형태였다.
그러자 무진은 한술 더 떴다.
-투명청룡오관의 한 관문당 1조부터입니다. 먼저 오는 국가는 할인받을 수도 있겠지만, 늦어질수록 단가가 올라갈 겁니다.
관문마다 1조면 1기를 설치하려면 최소한이 5조였다. 각국의 인구가 다르다고 해도 최소 3기 이상은 보내 달라고 요청했었다. 못해도 15조는 있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폭군은 빠꾸 없네.
-노빠꾸 폭군, 역시 인생은 못 먹어도 고(Go)지.
-퍼포먼스에 가려져서 그렇지, 짓는 거만 보면 그냥 농막이더만.
-빨리 지었다고 농막은 아니지. 관문의 내구성과 정교함에 다들 칭찬 일색이었어. 한번 설치하면 거의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한가 봐.
-관문에 들어가는 기관진법과 고위 마법을 고려하면 조 단위가 나올 수도 있지.
-간단히 만드는 것 같다고 해도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거라면, 진작 만들었겠지. 공간에 다른 공간을 조성하기가 쉬운 줄 아나.
-그러니까 원가로 지어 주겠다고 할 때 받지 그랬어.
-빈국을 제외하고 200개국으로 계산하면 이게 다 얼마야?
-돈복이 터졌네.
-명분도 나쁘진 않고.
국내야 가재는 게 편이라고 해도. 아쉬울 게 없다는 식의 무진의 대응에 세계는 분노했다. 세계가 합심해도 부족한데, 분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국의 수출입을 통제해서라도 압박을 넣으라는 강력한 요구가 빗발쳤다.
운인지 우연인진 몰라도, 각국의 요구는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전과는 다른 이상 현상이 일어났고, 던전의 등급이 몇 배로 증가했다. 그런 데다 다크니스와 협조했던 초인과 각성자로 인해 던전 공략에 공백이 생겼다.
던전 등급이 올라가고, 불규칙한 브레이크가 일어나면서 뛰어난 각성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지금이야 막고 있지만, 감당하지 못할 던전이 열린다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을 압박하다 폭군이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의 하나가 세계 각국의 발목을 잡았다.
-이게 이런 식으로 해결된다고? 천운을 타고나지 않고서야.
-인생은 폭군처럼.
-진짜, 세상 살 맛 나겠다.
-저 나이 때 우리가 뭘 했는지 돌이켜 봐라.
-그러네. 스무 살에 국제 협상을 주도하는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니지.
-우리는 폭군이 사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럼 우린 존망이잖아!
***
조나단 아너.
한때는 세계 경찰을 자처했던 천조국의 현 대통령. 각성의 시대가 되면서 빛이 바래지긴 했어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과 척을 져서 잘된 국가가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너 대통령님, 커피 드릴까요?”
“주면 고맙게 마시지.”
“솔직히 놀랐습니다. 미국이 가장 먼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자리라고 보네만.”
“과연, 훌륭하세요.”
미국 내에서 다크니스를 허락도 없이 처리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압박하기 위해서 각국의 합의를 모은 것도 미국이었다.
앞장서서 한국의 부당한 월권행위를 규탄했던 미국이 이토록 발 빠르게 움직일 줄 누가 알았으랴. 과거 평택 기지의 비행장으로 은밀하게 날아온 것도 그렇고, 미국의 추진력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한 관문당 5조입니다.”
“너무 비싸네. 이전에 원가만 받는다고 했으니, 5천억만 받아도 남지 않겠나?”
“지수야, 미국 대통령님 나가신단다. 어서 문 열어 드려라.”
“……잠깐, 농담일세!”
씨알도 안 먹힐 소릴 하고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10분지 1로 깎다니, 무진은 괘씸해서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
삐질, 삐질!
슥슥, 후우우!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낸 아너는 숨을 골랐다. 농담이라고 했지만, 마냥 농담은 아니었다. 협상을 조금 더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강하다고 해도, 나이가 어릴 텐데.’
만 년 묵은 드래곤처럼 노련함이 엿보였다. 어중간한 수작을 부리면 본전도 못 찾고, 손해만 보고 돌아갈 수 있었다. 빈손으로 돌아갔을 때의 후폭풍을 상기하자 소름이 돋았다. 미국은 한때의 최강국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인류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가져오고 싶어 했다.
아너 대통령은 상전벽해를 느꼈다.
6.25 전쟁 이후로 한국은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간도 쓸개도 다 내어 줬었다. 협상 때마다 미군 철수 카드를 꺼내 압박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한국을 조금이라도 달래 줬다면 달랐을까? 자국 경제를 위해서 한국을 희생시킨 대가를 오늘 치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 내어 줄 순 없지.’
10개의 투명청룡오관과 무진탑이 필요했다. 최소 50조가 넘는다. 달라는 대로 내주기엔 미국으로서도 부담되었다.
아너 대통령의 의도를 알고 있는지, 이번에는 무진이 선수를 쳤다.
“요즘 들어 던전 오픈과 브레이크의 빈도수가 늘고,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요. 우리는 잘 대처하고 있어서 상관은 없습니다만.”
“우리도 던전 공략은 수월하게 진행이 되고 있네.”
“다행이네요. 한데, 앞으로 더 심해질 겁니다.”
“……어째서 그리 확신하는 거지?”
“가령 예를 들어 볼게요. 평소 자유롭게 출입했던 문이 잠겼어요. 그러면 반대쪽에선 어떻게 할까요? 수리공을 불러서라도 문을 따려고 노력할 테지만, 그래도 안 되면 부수려고 하지 않겠어요.”
대체 뭔 소리를 하나 의아해했던 아너 대통령은 곧, 사태의 경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근래에 들어 심해진 던전 오픈과 침식의 원인이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가뜩이나 불균형적이었던 던전의 파격에 핵폭탄을 던진 격이다.
“다크로드란 자가 지금 문을 열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던전에 이상 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미국은 잘 막고 있으니 상관없지 않나요?”
지금은 잘 막고 있었다. 인원을 때려 박아서 손해를 최소화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막는다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무진의 말대로라면 앞으로는 막지 못할 수도 있었다.
“초인종을 눌러야지, 교양인답지 않게 문은 왜 부술까?”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무진의 태평함에 아너 대통령은 부아가 치밀었다. 정계에서 잔뼈가 굵고,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하여 프레지던트 부다로 불렸다. 그러나 오늘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결국 네놈 탓이지 않느냐!’
무진이 문을 잠그는 바람에 열리지 않아 로드가 화가 잔뜩 났다는 게 사태의 요지였다.
아너 대통령은 무진에게 책임을 묻지는 못했다.
‘탓하는 순간 바로 푼다고 할 놈이지!’
대면은 처음이지만, 아너 대통령은 눈치가 빨랐다. 보자마자 무진이 어떤 성향인지 간파했다. 어설프게 물 거 같으면, 시도하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관문 10개와 탑 1개를 원하네.”
“탑은 100존데요.”
“아니 무슨 그런?”
“천조국이 100조도 없어요?”
우리가 언제 천조국이라고 불러 달래? 지네들 맘대로 천조국이라고 부르고, 100조를 달라면 줄 수 있냐고! 상징적인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답이 안 나왔다. 이래서 주변에 돈 많다고 자랑하면 좆되는 거다.
“5조에서 100조는 갭이 너무 크지 않나?”
“그 이상의 효과가 있다면요?”
크음.
아너 대통령은 폭군의 주변인들이 어째서 그리 강해졌는지를 깨달았다. 탑이 그만한 효과가 있다면 100조가 부담되긴 해도, 세워야 할 가치가 있었다.
‘이 자식, 일부러 단점이 있다고 한 거 아냐?’
사람은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선입견의 틀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러한 심리를 돈벌이로 이용하고, 명분까지 챙겼다면 비약일까? 이 영악한 인류 최강자가 그것까지 계산했다면 절대 함부로 대해선 안 되었다.
“150조 되겠습니다.”
“잠깐!”
“왜 그러십니까?”
“처음은 DC해 준다며.”
대충 넘어가려고 했던 무진은 아너 대통령의 꼼꼼함에 엄지척을 했다. 보통은 자존심상 꺼내지 않을 텐데, 명색이 천조국의 대통령이 디스카운트를 노릴 줄이야.
이래서 천조국이 되었나?
“빈국과 같은 액수로 드리죠.”
“고맙네.”
돈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두었다. 모두가 미국처럼 100조를 쾌척하진 못한다. 최빈국에게 100조는 나라 전체를 팔아도 갚기 어렵다. 중국처럼 일대일로로 포장해서 고리로 빌려주는 파렴치한은 할 수 없다.
‘최대한 빨리 강해져야 한다.’
아너 대통령은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설치되기를 바랐다.